78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최고지
참 인생이라는 게, 꼭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내 원래의 계획은 차근차근 공략대로 만티코어를 멋지게 슥삭하고.
나름의 리더쉽과 전략적인 장수의 면모를 좀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거, 저희가 따라올 필요가 있긴 한 거였습니까?"
"로한 님 혼자서도 가능하셨을 거 같은......"
"불사조의 말이 맞구려. 진정 이런 괴물, 아, 아니. 대단한 인간은 처음 보오. 단신으로 만티코어의 머리를 깨버리다니."
그냥 혼자 몬스터 뚝배기를 깨고 무쌍을 찍어버렸다.
'참 생각대로 안 되네......'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긴 했던 거 같은데.
어쨌든 잘 해결되긴 했으니.
결과 자체는 만족스럽다 할 수 있었다.
나는 만티코어의 머리 위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놈에게 물리기 직전의 상태 그대로 아직 얼어 있는 퀘더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서, 얼음 땡을 해주었다.
"정신 차려."
"아, 아! 예!"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
갑자기 왜 또 존댓말이야?
그럴 수 있지.
방금 전만 해도 저승길 문턱을 즈려 밟았다가 다시 돌아온 기분일 테니.
굉장히 이해심 깊은 내가 양해해 줘야지 어쩌겠는가.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딴죽을 걸지 않고 넘기며, 엘더 프로스를 돌아보았다.
"이제 만티코어도 처리했으니, 오르헬의 혈사검을 챙겨야지."
그에 프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겠소."
* * *
"저는 이곳에서 만티코어 시체의 뒤처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꼬리의 독은 그냥 방치했다가는 숲의 다른 생명들이 피해를 볼 것입니다."
퀘더러는 그렇게 말을 하며, 그 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할 일이 남은 나는 엘더 프로스의 뒤를 따라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디아즈와 그렌델이 걸었다.
"로한 님."
따라오던 그렌델이, 한발 빠르게 걸어 내 옆에 섰다.
"무슨 일이지?"
"그런데 사실 이 마스트로프 숲까지 저희가 온 것도, 해리슨 백작이 흘려준 정보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한데, 그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희가 오르헬의 혈사검을 챙겨가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겠지. 아마 우리가 오르헬의 혈사검을 손에 넣는다면, 놈은 필시 중간에서 가로채려 들 것이다. 사람을 보내든, 함정을 파든."
"역시......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처음 출발할 때부터 생각은 했지. 그래서 준비도 해두었다."
"......예?"
나는 고개만 살짝 돌려, 뒤를 따르는 디아즈를 불렸다.
"디아즈."
"예, 로한 님. 출발 전 말씀하셨던 대로, 마르스토프 숲과 헤세테 왕국을 가로지르는 경로 내에 매복이 용이한 지역을 전부 체크해 두었습니다."
"잘했다."
저런 부분은 나보다 디아즈가 훨씬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보스 공략법 아니면 실시간으로 감지를 하는 방향에서야 다른 이들보다 우수했지, 이와 같은 지형을 이용한 매복 전략 같은 것은 나보다는 전문가들이 많이 존재했다.
당장 엘더 호위 엘프인 퀘더러만 하더라도, 숲 속에서의 전략전술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테니까.
'전문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최고지.'
나름 속으로 뿌듯해하던 그때.
그렌델 역시 놀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로한 경은 빈틈이 없었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들의 시야 앞에, 꽤나 큰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그 둘레가 얼마나 큰지 한 바퀴를 도는 데 몇 발자국으로는 모자랄 지경이었다.
엘더 프로스가 그 앞에서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을 했다.
"이곳일세."
그리고는 조용히 그 나무 기둥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후우우웅......!
그의 주변으로 바람이 가벼이 불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바람이 위로 올라가며 나뭇잎을 건드렸고.
살랑.
한 장의 잎이, 팔랑팔랑 거리며 떨어졌다.
엘더 프로스는 그것을 살포시 손바닥으로 받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솨아아아!
프로스의 손바닥에 앉은 나뭇잎에, 바람이 휘감기는가 싶더니.
오르헬의 혈사검으로 변한 것이다!
'저런 마법까지 걸어두었군. 그러니 찾아내기 힘들어서 해리슨 백작도 건드리지 못한 거고.'
당장 만티코어만 해도 뚫기 벅찰 텐데.
엘더 엘프의 고위 마법까지 길을 막고 있는 꼴이니.
감히 엄두도 나지 않았을 터였다.
프로스는 그 단검을 그대로 내 앞에 가져다주었다.
"우리 마스트로프 엘프가 여태 목숨 걸고 수호해 온 것이오. 귀하에게 우리의 피와 땀을 넘기겠소."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 * *
단검을 획득하고 다시 돌아가는 길.
숲의 많은 엘프들이 어느새 만티코어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는 죽었으니, 놈의 영역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퀘더러의 지시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만티코어의 독을 마법으로 중화하고.
놈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는듯하였다.
우리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퀘더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원하시던 일은 잘 마무리 하셨습니까?"
눈동자를 보면 분명 내게 묻는 것 같은데......
'왜 자꾸 존대야?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과가 없진 않았다."
"다행입니다."
"그, 그래."
"아! 경께 보여 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리로 와 보시겠습니까?"
그는 손짓을 하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의아해진 나는 엘더 프로스를 쳐다보았으나, 그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퀘더러의 뒤를 따랐다.
그는 만티코어의 시체로 나를 이끌었는데.
죽은 만티코어의 머리 쪽에 다다르더니 발을 멈추어 세웠다.
"여기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몇 명의 늙은 엘프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고 마법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퀘더러는 쪼그려 앉으며 손가락으로, 그 늙은 엘프들이 힘을 쏟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게......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아마 이런 것은 처음 보지 않느냐는 듯 한 얼굴로.
"만티코어가 죽고 잠시 후에, 놈의 입에서 굴러 나왔습니다. 꽤나 거대한 힘이 농축되어 있는 탓에 지금 장로님들께서 직접 정화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녀석의 효능이 무엇이냐면......"
"만독불침. 어떤 독이든 다 막아내어 버리지."
"......! 아, 알고 계셨습니까?"
"음."
만티코어의 내단.
원작에서도 나오는 파워 업 계열 아이템이었다.
다만 게임 속 만티코어는 아무리 잡아도 저게 드랍 되는 일은 없었다.
'억겁의 세월을 지낸, 오래 산 소수의 만티코어들만이 몸 안에 품고 있는 거랬는데......'
이런 만티코어들은 오우거나 트롤, 심지어는 거인들까지도 잡아먹고 산다는 내용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더럽게도 영악하고, 원작에서 본 것 이상으로 재빠르더라니.
알고 보니, 엄청나게 골치 아픈 놈이랑 싸운 모양이었다.
오우거나 트롤도 씹어 먹을 정도라면......
그냥 일반적으로 중반부까지 클리어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최소 고인물 패턴으로 얻을 거 다 얻으면서 중반부 진행한 플레이어들만 겨우 클리어할 수 있을듯싶었다.
'......잘못하면 골로 갈 뻔했네......'
모르면 용감하다 했던가.
차라리 잘 몰라서 오히려 잘 싸운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을 알지 못하는 퀘더러는 머쓱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 제가 건방졌습니다. 감히 로한 경께서 이걸 모를 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었습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귀한 물건은 맞으니까."
"당연하지만, 이건 로한 경께 드리겠습니다."
진짜 당연한 거지.
내가 쓰러뜨렸는데.
그럼 안 주려고 했던가?
안 줬으면 만티코어처럼 정수리에 주먹 찜질 좀 들어갔을 것이었다.
"일단은 아직 정화가 덜 되어서 당장에 힘을 품으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략 한 달 정도....."
한 달은 너무 길지.
나는 아직 정화 마법이 진행 중인 만티코어의 내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로, 로한 경?"
"어이! 이보시오! 지금 손대면 위험하오!"
"잠깐만......!"
그들의 만류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3의 눈이 가진 감각을 믿었기에.
'이런 느낌이라면......당장 먹어도 문제없지. 피코의 회복 능력이 남은 잔독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손이 그것에 닿자.
치이이익......!
독이 피부를 녹임과 동시에, 불사조의 능력이 다시 피부를 재건시켰다.
두 힘이 서로 부딪히며 격렬하게 싸웠다.
'이 정도 독이라면, 격렬한 전투 중에 당하면 치명적이겠어.'
제아무리 피코의 힘이 있다고 한들, 독만 치유할 수만은 없을 테니까.
베인 상처도 커버해야 하고, 부러진 뼈도 고쳐야 했다.
거기에 이런 독까지 들어온다?
그럼 정말 위험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나 이제 이걸 내 것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앞으로 독 걱정은 없다!'
나는 그것을 입에 툭 던져 넣었고.
화르르르륵!
강한 독성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불사조의 힘이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오......!"
"불길이, 불길이 너무나 성스럽군!"
"보통의 불이 아니야......"
그리고 눈을 반짝이는 퀘더러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역시 로한 경!"
"......"
나는 그를 무시하고, 만티코어의 내단을 흡수하는 데에 집중을 하였다.
* * *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세상 여태 느껴 본 적 없는 가벼움을 느꼈다.
이렇게나 몸이 편할 수가 있었던가?
상상도 못해 본 정도의 컨디션이었다.
피코의 말에 따르면.
"체내의 잔잔한 독까지 전부 만티코어의 내단이 먹어치우는 것 같다, 삐약. 굳이 회복할 필요가 없어 내 불꽃이 치유하지는 않았지만......사람의 몸에는 피로감을 일으키는 독성들이 기본적으로 있거든. 삐약."
어제 섭취한 만티코어의 내단이 내 몸 상태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준 모양이었다.
이런 체력 상태가 이제부터는 디폴트 값이라니.
'미쳤는데?'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후후후."
그렇게 개운한 아침을 만끽하는 동안.
어느샌가 디아즈와 그렌델은 다시 헤세테 왕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덕분에 나는 편히 식사를 하고 말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로한 님."
"그러지."
말의 고삐를 부여잡자.
퀘더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로한 경! 다시 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어, 어......그래."
글쎄.....과연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나의 작은 의문과 함께.
우리는 다시 헤세테 왕국을 향해, 해리슨 백작을 향해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