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 몰라? 이거 섭섭한데?
마스트로프 숲은, 과거 엘프들과 악마들의 결전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숲이었다.
그곳에서 큰 승리를 이룩한 엘프들은 이 땅의 축복 덕분이라 여기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동료들의 시신을 뭍은 땅도 이곳이고,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난 땅도 이곳이었으니까.
그런 역사가 담긴 땅이었기에, 마스트로프의 엘프들은 외부인의 접근을 극도로 꺼려했다.
마르지오 3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해는 되었다.
근래, 급격히 세력이 커진 인간들은 이곳저곳 영토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마르지오 3세의 말에 따르면 이곳 역시도 몇 차례 공격을 받았다 들었다.
다 그런 건 당연히 아니지만......
소수의 몇몇의 인간 귀족들은, 엘프들을 물건처럼 사고, 팔기도 해왔으며, 노리개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다지 인간들에게는 호의적이지 않을 수밖에.
마스트로프 엘프 외에도 엘프와 인간은 그다지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 놓는다더니. 딱 그 꼴이군.'
소설이나 영화에서 인간과 엘프가 사이 좋지 않다는 설정은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게 크게 와 닿지 않는 공허한 말일 뿐이었고.
더군다나 파오갓에서는 스토리 시작 부분이 이미 거의 아포칼립스 상태였다.
그래서 엘프와의 관계 따위, 생각 해 본 적도 없었다.
한데 막상 이걸 피부로 느껴보니 직접 마주한 현실은 보다 더 냉혹했다.
처적!
마스트로프 숲에 발을 들이고.
얼마 깊게 들어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엘프 전사들이 창날로 마주해주는 걸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숲에 더 이상 들어 올 생각은 말아줬으면 한다. 우리도 피를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가장 앞에 선 엘프가 우리를 향해 외쳤다.
그 어디에도 호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살의만 가득할 뿐.
'숫자도 적지 않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고작 다섯이었다.
그러나 사실 사방에 엘프들이 활을 끝까지 당긴 채 우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제 3의 눈을 가진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뭐.
우리가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나는 굳이 그들처럼 살기를 내비치지 않았다.
"엘더와 이야기를 나누러 왔다."
"그대들과 나눌 이야기는 없으니 돌아가라 하는 것이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한 번에 말이 통할 리가 있나.
때문에 나도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출발 직전 마르지오 3세에게 부탁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품에서 그걸 꺼내려고 손을 살짝 집어넣자.
퓩!
저 뒤 편에서 내 발 앞을 향해 화살이 한 발 날아왔다.
다음 번에는 머리에 박아버리겠다는 경고였겠지만......
텁!
나는 오히려 남은 손으로 화살이 박히기 전에 낚아채 버렸다.
이 한 수로, 경고를 하는 쪽은 나로 변했다.
"......!"
엘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바람의 정령이 내린 가호가 실린 화살.
보통 인간들이나 오크들이 쓰는 것과는 속도 면에서 월등한 우위를 점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각에서 날아오는 그걸 잡아버렸으니, 놀랄 만도 했다.
나는 최대한 여유를 잃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내게 함부로 선공을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뚜둑!
나는 화살을 부러뜨리며.
품에서 꺼낸 물건을, 엘프들에게 보였다.
"그, 그건......잃어버린 엘더의 반지? 그게 왜 거기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 * *
나와 디아즈 그리고 그렌델.
우리 셋은 그렇게 엘프들의 도시에 발을 들였다.
매우 편하게.
너무 쉽게 들어오다 보니, 성곽을 지키는 엘프들 마저도 우릴 신기하게 쳐다볼 지경이었다.
호기심 많은 그렌델도 의문이 든 모양이었다.
"그 반지가 대체 뭐길래 저들이 저렇게 반응하는 겁니까?"
나는 그에 대답을 해주었다.
"잃어버린 엘더의 반지."
"반지? 그게 뭐라고 이렇게 들여보내 주는 겁니까?"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뿌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성서와 같은 것이니."
"그 정도의 가치가......있는 것이었습니까?......"
그렌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그걸 로한 경이 어떻게 가지고 계신......"
나는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건 사실 원작을 직접 경험한 나만이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니, 나중에 시간이 흘러.
대침공이 일어나고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이후.
그간 거의 교류가 없던 엘더 엘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회의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그 대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잃어버린 엘더의 반지가 언급되었다.
다수의 엘더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퍼즐 맞추듯 모아 찾아낸 것이 바로 그 반지였다.
'대침공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한 엘더와 친분을 쌓게 되는데.
그에게서 잃어버린 엘더의 반지를 찾아 달라는 퀘스트를 깨고.
덕분에 잃어버린 엘더의 반지를 얻게 되면, 이후부터는 엘프와의 친밀도가 급격히 상승하게 됐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조금 더 희귀한 아이템이나 마법들도 쓸 수도 있게 되고.'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부분이 바로 잃어버린 엘더의 반지 퀘스트였다.
물론 그런 보상들이 따르는 만큼 얻는 게 쉽지는 않았다.
폐허가 된 헤세테 왕국.
그 안에서 몬스터들을 헤치고 나아가 얻어야 했으니까.
근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내가 한 발 먼저 움직인 덕에 헤세테 왕국은 멸망하지 않았고.
몬스터도 득실득실 하지 않게 되었고.
직접 갈 필요도 없이......
'국왕 시켜서 사람 보내니까 이렇게 쉬울 수가 없네.'
말만 하면 다 해결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마스트로프 엘프 도시도 느긋하게 걸어서 입성하기도 했고.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응접실 같은 곳에 도착을 하였다.
"곧 엘더께서 오실 거요."
"알겠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디아즈가 큰 숨을 내쉬었다.
나름 긴장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후우. 이렇게 조용하게 여기까지 들어오게 될 줄이야......"
"왜. 내가 힘으로 다 뚫고 들어올 줄 알았나?"
정곡을 찌르는 그 물음에 디아즈가 살며시 웃었다.
"로한 님이시라면......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절대로요."
디아즈가 미소를 보이자.
그렌델이 놀랐다.
"웃으니까 엄청 예쁘십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는지, 디아즈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심지어는 귀까지.
"크, 크흠."
그렌델은 그런 말을 던지고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잘 웃는 사람 좋아하십니까?"
"뭐?......"
"큰일입니다. 저는 잘 웃을 줄 모르는데."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 어색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
"......"
도대체 어떤 생각의 흐름이 나오면 저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바깥에서 늙은 엘프 하나가 들어왔다.
* * *
"마스트로프 숲의 엘프, 프로스라오."
"로한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로한. 반갑소이다. 최근 백 년간. 귀하가 처음이오. 이 땅에 발을 들이는 인간은."
"몰랐군."
"그만큼 귀하가 특별한 손님이라는 뜻이오."
"내가 특별하다기보단, 이게 특별한 것이겠지."
"......"
품에서 잃어버린 엘더의 반지를 꺼내자.
엘더 프로스의 눈이 반짝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직접 보아도 괜찮겠소이까?"
"귀한 물건이니 살살 다뤄주면 좋겠군."
그 말과 함께 나는 그 반지를 프로스에게 건넸다.
그는 소중히 반지를 받아들었다.
잠시 그것을 살피던 프로스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는 게 보였다.
아마 진품인 걸 알아본 것이겠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이......진정......어찌......허허......"
겨우겨우 그 감정에서 벗어난 프로스는, 다시 시선을 내게 돌렸다.
"인간인 귀하가, 이걸 어찌 가지고 있는 것인가?"
"꿈속에서 한 엘더 엘프가 길을 비추어 주었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당신을 찾아가라고 하더군."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최근에는 피곤했던 탓인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잤으니까.
그래도 엘더쯤 되는 늙은 구렁이를 속이려면, 이 정도는 필요했다.
아니, 사실 이걸로도 모자랐다.
그에 나는 엘더들만이 알고 있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그리고 이 말을 알려주더군. 엘프들의 지도자 엘더는 중간계의 균형을 위하여, 그 어떤 희생도 불사할 지어다."
"그건......!"
"미스트로프 엘프들의 엘더 프로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허허......대체 어떤 엘더이신지 궁금하군. 귀하의 꿈에 나타나셨다는 그분 말이오."
나도 모르지.
그런 거 없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은 그 도움이 무엇인지부터 들어봐야겠구려."
"뱀파이어 로드 오르헬이 인간 왕국 하나를 헤집어 놓고 있다. 해서, 오르헬을 봉인할 수 있는 봉인구를 찾아온 것이다."
"로드 오르헬?......"
그 말을 듣던, 프로스의 부관으로 보이는 엘프가 입을 떼었다.
"장로님. 안될 말입니다. 당장 내쫓으셔야 합니다."
"......"
응?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오르헬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부터, 공기가 싹 바뀌었다.
프로스는 아직 고민하고 있는듯했으나, 그의 옆에 선 엘프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우. 시끄러, 삐약."
내 품에서 자고 있던 피코가, 목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녀석은 날개로 눈을 비비며 기어 나오더니.
"엥? 여기가 어디야? 삐약."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심각한 상황에, 얘는 자다 깨서 또 왜 이래.
"엥? 프로스? 꼬맹이 프로스 아니야? 삐약?"
피코가 갑자기 프로스를 향해 날개로 손가락질을 하는 게 아닌가.
뭐야 이건 또.
"이야! 오랜만이다, 삐약! 그새 많이 컸네? 삐약."
"......?"
"나 몰라? 이거 섭섭한데? 삐약. 너 막 울면서 뒹굴 때 내가 막 불길로 너 구해주고 그랬잖아, 삐약."
이야기를 듣던 프로스의 부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분은 엘프들의 수장이신 분이다! 최소한의 예를 갖추어야......"
"잠깐."
그의 입을 프로스가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설마......불사조?"
"그래! 나다 나. 삐약. 부활하느라 이 꼴이 되었지만. 삐약."
"......!"
"잘 컸네, 삐약. 아, 이쪽은 내 새로운 주인이다, 삐약."
피코는 날개로 나를 가리켰고.
엘더 프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잃어버린 엘더의 반지에, 불사조까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하루아침에 연달아 터지는구려......"
부관의 목소리에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이제는 나를 정확히 바라보며 확고하게 변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