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순서 좀 바꾼다고 크게 달라지나
"이봐! 내 말 안 들리느냐고!"
크뢰이튼 지하실의 거처 문이 열리기 직전.
안에서 고위 뱀파이어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왕궁에 갔다 오는 동안에도 그렌델을 꾀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크뢰이튼이 코웃음을 치며 문을 열자.
뱀파이어 놈의 표정이 썩었다.
"젠장......"
크뢰이튼은 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노력을 들였구만."
"......"
그렌델에 대한 크뢰이튼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뭐, 나랑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그대로 뱀파이어 놈의 앞에 섰다.
"넌 이제 내 것이다."
"무, 무슨 소리를......?"
뱀파이어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놈이 크뢰이튼에게 돌아갔다.
크뢰이튼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두 번 질문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묻는 건 그게 무엇이든, 모조리 다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하. 정말 젠틀한 질문이로군. 그럼 나도 젠틀하게 대답할 거라 생각하였나?"
비아냥거리는 걸 보니, 아직은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이쪽 계열에서는 나도 개통령 못지않게, 재능이 있는 편이라.
"크뢰이튼."
"말씀하시오."
"여기, 방음 잘 되나?"
"물론. 마법으로 다 막아두었소."
나는 눈을 번뜩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잘 됐군."
* * *
보글보글보글.
대야에 받아 놓은 물에, 뱀파이어의 머리가 눌린 채로 공기 방울이 연신 솟구쳤다.
"우우우웁! 우부붑! 푸학!"
내가 손을 놓으니, 뱀파이어가 고개를 벌떡 들어 올렸다.
"허억......! 허억......!"
"물은 충분히 마셨나?"
"내, 내가 언제 물을 달라고 했다고!"
"얼굴도 수분기 하나 없이 푸석푸석하니. 목이 좀 말라 보이길래."
이렇게 친절할 수가.
내가 봐도 나는 정말 상냥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물이 아니라고, 그건! 피를 마셔야 한다고!"
근데 이 시건방진 놈은 그런 배려에도 오히려 성질을 내는 게 아닌가.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가 된다더니.
역시 사람은 너무 착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싫은가? 그럼 다른 걸 주지."
나는 왼손으로 시끄럽게 떠드는 놈의 양볼을 잡아 붕어 입처럼 만든 뒤.
파직, 파지지직!
"우, 우웁?"
그대로 검은 천둥을 먹여주었다.
이렇게 뭘 많이 먹여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우구구구구구구국! 우국!"
자꾸 뭔 국을 찾아.
국은 없으니 물이라도 주자.
나는 오른손으로 대야를 들어 붕어 입이 된 놈의 입에 물을 졸졸졸졸 흘려보냈다.
"푸헉! 우구구국! 푸웁! 구구구구국!"
꽤 괜찮은 소리가 났다.
놈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는 걸 본 나는.
또 한 번의 자비를 더 베풀어, 잠시 쉬는 시간까지 챙겨주었다.
"커럭......! 헉......켁켁!"
물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며, 이상한 기침을 하는 뱀파이어였다.
한 3초 정도 놈이 숨을 고르는 걸 확인한 나는 다시 왼팔을 뻗었다.
그러자 놈이 기겁을 했다.
"자, 잠시만!"
"왜? 이제 말할 생각이 좀 들었나?"
"뭐, 뭘 물어봐야 대답을 하지! 대답할 기회는 주고 고문해야 할 거 아니야!"
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네놈이 이렇게 하수일 줄은 몰랐군."
"그, 그게 무슨......개소리야......"
"자. 생각을 한번 해보자고. 내가 만약에 너한테 뭔가를 물었어. 그럼 넌 대답을 했겠나? 안 했겠나?"
"......안......했겠......지......"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을까?"
"결국 고문을......했겠......지?......"
나는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그거지. 잘 아는 놈이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나?"
"자, 잠깐. 그래서 그냥 고문부터 시작했다고?"
"어차피 할 거. 순서 좀 바꾼다고 크게 달라지나? 아니,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면 오히려 괜히 시간만 더 들었겠지. 굳이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거든."
"......그, 그래도 물어는 보고 고문을 해야......"
"시끄럽다. 시간은 금이다."
파지직!
"으그그그그극!"
내 뒤에서, 그렌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 고문, 후 질문......이게 바로 다음 세대의 기술......굉장히 가치 있는 기술이네요."
* * *
"무, 묻는 말에 다 대답하겠다......마, 말 좀 하게 해줘......"
놈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나왔다.
이제 저쪽에서 대화할 생각이 생겼다 판단한 나는, 첫 질문을 던졌다.
"오르헬. 그놈이 뭘 원하는지 털어 놓아라."
"나,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래?"
내가 왼팔을 들자, 놈이 화들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시만! 아직 말 끝나지 않았다! 다, 다른 거라도 좀 물어다오! 내가 아는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전부 다 말하겠다!"
"......"
"이, 일단 오르헬은 내가 따르는 로드가 아니다. 나는 로드 드레트노어 님을 추종하는 자. 나의 로드는 드레트노어 님이시다. 그, 그래서 오르헬 놈의 생각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야 필멸조가 말했던 드레트노어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흥미롭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도 그럴게, 뱀파이어 로드가 둘이나 얽힌 상황은 원작에서도 본 적이 없었으니.
"드레트노어 님의 명에 따라, 나는 오르헬에게 말을 전달하였다. 동맹을 권유하는 말을."
"뱀파이어 로드의 동맹이라......그런 게 가능한가?"
다섯의 뱀파이어 로드는 사이가 더럽게 나쁜 이들이었다.
해서 몇몇은 아예 바다를 넘어, 다른 대륙에 터를 잡았다고도 전해졌고.
원작에 모든 뱀파이어 로드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 정도로 거리를 두며 떨어져 지내는 놈들이 느닷없이 동맹이라니.
'반대로 말하자면......전에 없을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이겠군.'
그 부분이 조금 걱정되는 점이었다.
특히 드레트노어의 목표가 뭔지 알고 있는 이상, 간과할 수가 없었다.
필멸조의 말에 따르면 놈이 결국 대침공을 유다할 것이었으니까.
"오르헬은 그 동맹을 받아들이고, 거래를 제안했다."
"무슨 거래?
"악마들은 자력으로 중간계에 닿을 수 없다. 중간계에서 길을 열어 주어야만 가능하지. 알고 있겠지만, 오르헬은 이미 제 9 악마군단장, 언데드 군단의 군주와 계약을 한 상태이다."
이건 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실 뱀파이어 로드와 악마들 역시도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뱀파이어 로드들과 또 악마군단장과 이어져 있었다니.
게다가 제 9 악마군단이라면......이전에 죽인 호라이크던이 참모로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대침공의 선봉 부대이기도 하였고.
때문에 내가 그 호라이크던을 죽였던 거니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이미 슬슬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 9 악마군단이 지옥에서 중간계로 넘어올 길을, 두 뱀파이어 로드가 만들어준다는 것인가?"
"그, 그렇다......"
"왜? 오르헬이란 놈은 무슨 거래를 한 거고, 드레트노어는 무슨 생각으로 그걸 같이하는 것이지?"
"오르헬은 악마의 마법을 손에 넣었다. 뱀파이어 로드로서는 가질 수 없는 힘이지. 예를 들자면......강령술과 같은 금지된 마법들."
강령술?
그래......
거래 상대가 언데드 군단장이니 얻어내기 딱 좋은 것이긴 하지.
하지만 왜?
'이미 뱀파이어 로드라는 힘만으로도 중간계에서는 견줄 자가 거의 없을 텐데......왜 더 큰 힘을 탐하는 거지? 그것도 악마와 거래를 할 정도로.'
의구심이 들었다.
"계속 말해라."
"오르헬이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드레트노어 님은......"
자신이 따르는 군주의 뒷이야기를 하려니.
여태 술술 불던 그의 입이 주춤 주춤거렸다.
그에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도움을 주었다.
왼팔을 들어 올려.
파지직.
스파크를 보여주며 말이다.
그 검은 번개를 본 뱀파이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드레트노어 님은......크헉? 꾸어억? 어어어커컥!"
그 순간이었다.
말을 하던 놈의 온몸이 이상하게 비틀리더니.
두 눈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몸이 찌부러지기 시작했다.
크뢰이튼과 그의 제자 그렌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뱀파이어의 좌우로 붙었다.
"스승님!"
"그래! 자폭 마법이다! 폭발력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않게 잡아라!"
"알겠습니다!"
크뢰이튼은 당황하지 않고, 양손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직 앳돼 보이는 그렌델 역시도 침착하게 마나를 전개 시켰다.
뱀파이어는 온몸이 베베 꼬인 상태에서 분노를 터트렸다.
"오르헬! 감히......! 언제 내 몸에 이런 마법을......!"
그러더니, 별안간 또 목소리가 바뀌었다.
"크흐흐......내가 너와 드레트노어를 쉽게 믿을 줄 알았나?"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암흑의 정신세계에서 만났던 오르헬의 그것이었다.
미리 걸어 둔 마법으로, 뱀파이어의 정신 속에 파고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정확히는 내게.
놈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나를 찾아온다고? 우습구나. 내, 네놈의 그 이상한 창을 만드는 잔재주에 잠시 주춤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고 잠시일 뿐이었다."
말은 잘하네.
쫄았으면서.
"날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직접 네놈을 찾아가 갈가리 찢어발겨 주마. 그 몸에 흐르는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짜내어 마실 것이니!"
빙의 당한 뱀파이어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한 때 인간들의 영웅이었던, 지금은 죽어 잊혀진. 듀라한과 함께 너를 찾아낼 것이로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퍼어어어엉!
뱀파이어의 몸이 터지고.
크뢰이튼과 그렌델이 전력으로 그 폭발을 억눌렀다.
"크으으윽!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폭발이군!"
"이, 이 정도의 마력이라니......!"
콰아아아아!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힘과.
꾸우우우욱!
그걸 역행하는 마법.
두 힘이 한참을 격돌하였고.
슈우우우우......
결국 그들은, 폭발을 완벽하게 잡아내었다.
"허억......! 허억......!"
"쿨럭, 쿨럭!"
녹초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크뢰이튼과 그렌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듀라한이라면......이건 막을 수 없을 것이오. 초월적인 존재의 힘이 필요하오."
"왕국의 군대에 도움을 요청해도 안 됩니까? 스승님?"
"듀라한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의 정점을 찍었던 기사들의 시체로 만들어지는 존재. 전성기 시절의 그 힘을 그대로 가진 괴물들이다. 설사 막는다 하더라도, 왕국은 멸망할 것이다."
"그럴 수가......"
하나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래봤자 듀라한도 언데드잖아?'
내게는 필멸조의 가호가 있지 않은가.
걱정은......되지 않았다.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