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해봤는데 됐으니, 가능한 일이 맞겠지
나는 3 왕자의 머리를 짓누른 손에, 힘을 실었다.
꾸우우욱!
"으윽? 으그그그그! 이게 무슨......!"
내 힘을 이겨내려고 목에 잔뜩 힘을 주는 거 같은데......
소용 없었다.
나는 지금 거신병의 왼팔을 발동한 채 그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으니까.
"왜? 마음대로 안 되나?"
놈의 눈동자가 희번덕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어디, 힘만 센지, 아닌지 한 번 보자고."
나는 지체할 생각이 없었기에, 곧바로 마나 버닝 스킬을 시전했다.
잡몹도 아니고 신화급 몬스터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려야 얻을 수 있는 스킬이, 고작 이 정도 정신 지배도 풀지 못할 리는 없었으니까.
파아아앗!
내 손에서 빛이 발하는 순간.
3 왕자의 발작이 점점 사그라들더니......
얼굴의 혈색이 되돌아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악!......
검은 어둠이, 사방으로 나를 덮쳤다.
* * *
'이게......무슨 일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세상.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현실 세계가 아니었다.
정신의 세계였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로......'
그때였다.
바닥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것은 점점 사람의 형태처럼 변해가더니.
마침내 완전히 그 형태를 완성하였다.
분명의 인간과 비슷한 형태이기는 했으나, 뭔가 조금은 불쾌한 느낌이 드는 형상이었다.
퀭한 느낌이 많이 보이는, 비쩍 마른 얼굴.
괴상하리만치 긴 팔.
그리고 시뻘건 눈동자.
굳이 대화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
뱀파이어의 정점.
불멸의 존재이자, 태초부터 존재했던 자들.
뱀파이어들의 영원한 지도자이자, 마지막 왕들.
그 초월적인 존재가 바로 뱀파이어 로드들이었다.
세상에 단 다섯뿐인 존재.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으나, 동시에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
불멸임과 동시에 분명 언젠가는 사라질 자들.
그 중 하나가 지금 내 앞에, 허상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설마하니 내가 만든 광기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군."
"......"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신기하다는 듯 훑었다.
"나는 뱀파이어들의 군주들 중 하나. 로드 오르헬이다."
* * *
"오르헬?"
드레트노어가 아니라고?
게다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원작에서도 다섯 뱀파이어가 모두 등장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느끼고 있겠지만, 이건 진짜가 아니야. 이중 마법이지. 첫 번째 저주를 해주 하면, 저절로 이어서 발동하게 만들어 둔 것이다. 감히 여기까지 닿은 자에게 그 공로를 인정하여, 친히 경고를 해주기 위해서 말이지."
뱀파이어 로드가 그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가히 비현실적이었기에, 혐오감이 듦과 동시에 공포스러웠다.
"어차피 첫 번째 저주를 풀었다면, 이것도 쉽게 풀겠지만......그 전에 한 마디만 딱 해주마."
'아니, 풀 방법 없는데......마나 버닝으로 있는 마나 다 써버려서......'
내 속을 모르는, 오르헬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것은 운명의 큰 물줄기이다. 포기하라. 다가올 미래에 떨어라. 그리고 도망쳐라. 그것이 네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지니. 감히 거스르려 하지 말지어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대침공이 일어나는 것......그것을 거스르려 하지 말라는 것이군.'
하나 이걸 어쩌나.
내 가장 큰 목표가 그 운명의 물줄기를 바꾸려는 것인데.
"......싫다면?"
"운명을 거스를 순 없다. 죽어야 할 자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쓰러져야 할 왕국은 멸망을 피할 수 없는 법. 그것이 세상을 가로지르는 이치이다."
"글쎄. 그것도 동의할 수 없겠군."
벌써 죽었어야 할 운명이 여럿 바뀌었다.
반대로 먼 미래까지 살아 있을 자들도 내 손에 죽었다.
그리고, 다른 삶을 사는 자들도 생겼다.
당장 내 옆의 디아즈 역시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고.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목도하였다.
미래가 바뀔 수 있음을.
내 손으로 일구어 내었다.
그 바뀐 미래를.
그렇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오르헬은, 나를 내리깔아보았다.
"굳이 소용없는 발버둥을 치겠다는 것이냐? 그래......인간이란 그리 어리석은 법이지. 내가 그걸 잠시 잊었었군. 하나, 이 이상 시건방을 떨다간......환상이 아닌 진짜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 그거 좋네."
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에 당황을 한 것은 저쪽이었다.
"......뭐라?"
나는 눈을 부릅뜨며, 놈에게 천천히 걸어 다가갔다.
"내가 지금 너를 찾고 있는 중이거든......!"
"......?"
뚜벅.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뚜벅.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치아를 드러내었다.
"어디 숨어서 이 지랄을 떨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가만히 있어라. 내가 찾아갈 테니까."
"미, 미친......?"
짜증 나니까 일단 이 허상의 세계에서라도 한 번 베어버리자 싶었다.
그래서 나는 옆구리의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그러자, 오르헬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
"여, 여기는 내가 만든 정신 세계이다. 물리적인 검 따위로 나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놈이 팔을 한번 휘젓자.
검날이 갑자기 흐물흐물해지더니......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게 아닌가.
꽤나 신기하긴 했다.
근데 내 무기가 검 하나는 아니라서 말이지.
나는 놈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여기가 네놈이 만든 세계든 아니든. 그따위 잔재주로 나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큭큭큭!"
그와 동시에 나는 황금의 창을 창조하였다.
솨아아아악!
이건 물질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내 손에 갑자기 금빛의 창이 생기자, 오르헬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간이......맞긴 한 건가......!"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놈의 면상을 향해 냅다 투창을 했다.
슈우웅!
그에 오르헬은 이 공간을 스스로 깨어버렸다.
이곳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낀 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도망치려고? 그래, 도망쳐 봐라. 곧 포기하게 될 테니까. 큭큭!"
오르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파앗.
이 검은 세계가 소멸했다.
* * *
"......님! 로한 님? 로한 님!"
천천히 다시 청각이 돌아오기 시작한 게 가장 처음이었다.
그리고 차츰차츰 다른 감각들이 돌아왔다.
촉각이 돌아오고 후각이 돌아오고, 그리고 시각이 다시 현실을 느꼈다.
나를 부르는 디아즈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3 왕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다시 원래의 낯빛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조금 수척해지긴 했었으니, 크게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오르......! 미오르, 내 아들아......!"
그리고 그의 침상 옆에서 국왕 마르지오 3세가 무릎을 꿇고 흐느끼고 있었다.
아마 일차적인 문제는 잘 해결이 된듯하였다.
다만 진짜 문제는......그 너머에 있는 존재.
뱀파이어 로드 오르헬이라는 존재였다.
"로한 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3 왕자를 정상으로 돌려놨는데도 내 얼굴이 풀리지 않으니, 디아즈가 물어왔다.
그에 나는 내가 본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배, 뱀파이어 로드가 직접 말입니까?"
디아즈는 물론이요, 같이 이야기를 들은 크뢰이튼의 얼굴 역시 굳었다.
"이중 저주 마법이라. 그럼 3 왕자님과 직접 만났을 가능성이 높소. 그 정도의 고위 마법은, 원격이나 하수인을 통해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모두의 시선이 3 왕자를 향했다.
하나 아직은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긴 힘들 것 같았다.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도통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었기에.
지금 당장 그의 입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크뢰이튼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려, 물어왔다.
"대체......뱀파이어 로드의 정신 마법에서 어떻게 벗어난 것이오? 그건 보통의 능력이나 웬만한 마법으로 가능한 게 아닐 텐데?......"
"글쎄. 겁을 좀 주니까 알아서 풀더군."
"......뱀파이어 로드의 정신 마법 안에서, 뱀파이어 로드를 겁을 주고, 또 그걸 풀어냈단 말이오?"
"그래."
크뢰이튼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말이냐는 얼굴로.
"그럴 리가. 놈이 만든 세계에서는, 검을 뽑더라도 그것조차 없앨 수 있을 진데......"
역시 마법사라 그런가.
정확하게 짚는 크뢰이튼이었다.
어떻게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을 저렇게 잘 맞췄는지 신기할 정도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구리에 채워진 내 검을 내려다 보았다.
다행히도 가상의 세계였기에, 실제 검은 멀쩡했다.
"그렇더군. 검을 뽑으니, 액체처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버리더군."
"그 정도로 상대 입장에서는 컨트롤이 불가능한 곳이오."
"그래서 다른 걸로 겁을 주었다. 생각보다 겁이 많더군."
"그, 그게 가능한 일이오?"
"해봤는데 됐으니, 가능한 일이 맞겠지."
"......그것 참......저리 말하니, 할 말이 없네."
어느샌가 방 안의 모든 이들이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왜? 사실 그대로 말했는데?
내가 멀뚱히 크뢰이튼을 쳐다보자.
잠시 넋을 놓고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던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크, 크흠. 어, 어쨌든 뱀파이어 로드의 개입은 확실한 것 같소. 놈이 3 왕자 저하를 노렸다는 건데......실패를 했으니 이대로 물러나 주면 좋으련만. 순순히 그럴 것 같진 않단 말이지."
크뢰이튼의 그 말에, 국왕 마르지오 3세의 얼굴이 다시금 굳었다.
"그럼 뱀파이어 로드를 찾을 다른 방도는 없나? 계속 떨고 있을 수만은 없네!"
"뱀파이어 로드를 추적할 방법이라......흐음......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아서 말이지요. 3 왕자 저하께서 증언이라도 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크뢰이튼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이 내뱉은 말은, 안된다는 걸 알기에.
그에 나는 의견을 하나 내었다.
"물어볼 만한 놈이 하나 있지."
"허어......설마......"
굳이 3 왕자가 깨어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에게 우리를 안내해 줄 놈이 하나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손가락을 풀며.
뚜두둑!
크뢰이튼에게 보상을 확인받았다.
"약속도 지켰고. 이제 그 뱀파이어는 내 것이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대에게 놈의 신변을 넘기지."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크뢰이튼의 지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