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크뢰이튼을 따라 헤세테 왕국에 들어섰다.
한때 공국으로 시작해 세를 불린 이 헤세테 왕국은, 도시 국가라 칭할 정도로 작은 국토를 지닌 왕국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이 가장 강대한 다섯 왕국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마법사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마법사는, 그냥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저 마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마법을 쓸 수도 없었으니.
특별한 도구나 매개체 없이, 순수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은 오로지 혈통으로만 태어났다.
그리고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마법사의 혈통을 가진 국가가 바로 이 헤세테 왕국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크뢰이튼은 이상한 존재였다.
'보통은 마법사라고 해도, 인간. 칼에 찔려도 죽고, 수명이 다해도 죽었지......'
하지만 크뢰이튼은 달랐다.
백 년 전에도 존재했으니까.
'마법사 캐릭터의 튜토리얼......'
사실 나는 그것 때문에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도 그럴게, 백 년 전 레데이아를 죽인 게 나라고 말을 해두지 않았던가.
이렇게 금방 크뢰이튼을 만나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까닭이었다.
도적 캐릭터로 플레이를 하면, 크뢰이튼은 거의 엔딩 직전에서야 언급만 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고 그때 대충 넘긴 건데.
'어떻게 넘기지......'
딱히 언급을 하지 않으면 크게 걸고 넘어질 것 같지는 않긴 한데......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크뢰이튼의 거처에 도착을 했다.
그는 내부에 들어서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를 따라 들어가면서도, 우리들 셋은 분주히 집안을 구경했다.
마법사의 집을 보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에.
마법사의 집답게, 사방에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벽장에는 각종 마법 도구들이 가득했다.
일전에 보았던 연금술사 마르코의 거처와 얼핏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마르코의 실험실이 마치 물리학자 느낌이 풀풀 나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책과 문자가 가득한, 수학자의 느낌이 풍기는 곳이었다.
둘 곳 다 학자의 뉘앙스가 매우 강한 공간이었지만, 그 미묘한 차이가 신기하게도 눈에 쏙 들어왔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는데.
크뢰이튼은 자연스럽게 그 아래로 내려갔다.
나 역시 그를 따라 걸었고.
뒤에서 멈칫하던 디아즈와 앤드류도 곧이어 내려왔다.
그리고 길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크뢰이튼이 그 문을 열자.
끼이이익......
조금은 비현실적인 광경을 우리는 목격하게 되었다.
무릎을 꿇은 채 쇠사슬에 꽁꽁 묶여 눈을 희번덕거리는 뱀파이어와.
그의 앞에서 의자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몽환적인 한 소녀가.
한 공간에서 있는 모습을.
* * *
사실 이 방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부터 내 귀에는 살짝씩 들려왔다.
뱀파이어의 속삭임이.
제 3의 눈이 만들어 준 초감각의 힘이었다.
[네게도 불멸을 이룰 기회를 주겠다!]
[천만금? 억만금? 네가 평생 벌어도 이런 부귀영화를 누릴 순 없을 것이다!]
[나를 살려만 보내 준다면, 평생, 네 앞길을 막는 모든 이들을 죽여주마!]
각종 감언이설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말에는 단 한 번의 대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혼잣말처럼.
대체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걸까?
그리고 저렇게 매혹적인 속삭임을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것일까?
혹여나 넘어가면 어쩌려고......
걱정스러웠으나, 크뢰이튼은 전혀 괘념치 않는 듯 보였다.
그는 느긋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소녀를 보고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잘 지키고 있었느냐?"
"......예. 스승님."
뱀파이어의 갖은 유혹에도 전혀 목소리를 내지 않던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에 뱀파이어조차도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귀가 먹은 건 아니었군......"
그러거나 말거나 크뢰이튼은 그녀를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내 제자인 그렌델이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에서도 무뚝뚝함이 흘러넘쳤다.
디아즈의 첫인상과도 약간은 달랐다.
디아즈가 긴장을 한, 날이 선 모습이라면.
그렌델 쪽은 아예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다.
크뢰이튼은 그녀의 반응에 익숙한 듯, 이야기를 넘겼다.
"직접 보여주려고 내려왔소.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계속하도록 하시는 게 어떻겠소."
"그러지."
우리는 그렌델만 놔두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왔다.
각종 스크롤과 책들을 대충 치워 자리를 만든 크뢰이튼은, 우리에게 앉을 것을 권하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사실 흥미로운 쪽은 오히려 우리인데.
"본인이 왜 왕실과 연결시켜달라는지, 궁금하지 않았소?"
"글쎄. 내가 알아서 득이 될 것이 있나?"
"오호. 그렇게 대답을 하니, 내가 할 말이 없군."
그러나 디아즈는 조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말씀 나온 김에, 왜 왕실과의 연결을 원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별건 아니오. 3 왕자 저하를 죽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어......설마 이럴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
"......"
"......"
생각지도 못한 일에 얽힌 것 같았다.
* * *
우리들의 표정이 굳자.
크뢰이튼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암살이나 반란 같은 정치적인 것은 아니라오. 외부로 알려지지는 않았네만, 3 왕자 저하께서는 지금 악마의 쓰인 상태이오."
나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
"그렇소이다. 꽤 지독한 녀석이었지.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그 빙의를 풀기 위해 나는 다방면으로 노력을 거듭했었네만......결국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였소."
"그래서 죽이겠다는 건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 쪽에서도 같은 의견이 이미 나왔었소. 하지만 국왕께서 거센 반대 의견을 내고 계시지. 나는 아쉽지만 더 이상 3 왕자 저하의 고통을 덜어드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덕분에 왕실에서는 완전히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소. 지금은 내 이름으로는 전하를 알현할 수조차 없지."
한숨과 함께,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접근한 것이군."
"하하. 왕실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라서 말이오. 마침 그대들이 내 앞에 떡하니 나타났었소."
크뢰이튼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나는 아직 궁금한 게 조금 더 있었다.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쉽게 떠벌려도 괜찮은가?"
그의 말대로 3 왕자에 대한 이야기는 기밀 중에서도 일급 기밀일 것이 뻔했다.
왕실 내부의 치부에 가까운 일.
그것을 저리 가볍게 발설해도 괜찮을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을, 크뢰이튼이 천천히 해주었다.
"나는 그대를 기억하고 있소. 그래서 믿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고."
"......"
무슨 소리지?
내가 크뢰이튼을 만날 일이 언제 있었다고......
"백 년 전. 차원을 가르는 마녀, 레데이아. 기억하시오?"
내가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앤드류가 먼저 깜짝 놀랐다.
"레데이아라면, 얼마 전에 우리가 죽인, 아니지. 로한 경이 죽인 그 마녀잖아요?"
앤드류가 그 말을 꺼내자.
크뢰이튼도 또 놀랐다.
"레데이아가 부활했단 말이오? 그 예언을 진짜 해내다니......!"
저 둘이서 서로 놀라고 있으니, 내가 놀랄 타이밍이 없었다.
앤드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크뢰이튼에게 물었다.
"예언이라고요? 무슨 예언이 있었는데요?"
"백 년 후. 다시 돌아와 나를 죽이겠다 했었소. 단지 악에 차서 내뱉는 헛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짜로 부활했어요. 우리 로한 경이 그 마녀의 차원 장막까지 잘라내셔서는 슥삭! 하셨죠."
쟤는 또 왜 뭘 저렇게 지가 자랑스러워하며 말을 하는 건지......
'아니, 그런데 대화가 왜 갑자기 레데이아로 흘러가는 거야? 이거 잘못하면.'
백 년 전 레데이아와 싸웠다는 내 말이 이상하게 꼬일......
"허허......정말 그때 말한 대로 하신 것이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갑자기 크뢰이튼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백 년 전, 내게 마녀를 쫓을 길을 알려 주었던 것. 잊은 것이오? 나는 그대를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소. 내겐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알려 줬다고?
내가? 크뢰이튼에게?
뭐가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한순간도 잊지 않았기에 나는 그대를 단박에 알아보았소."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 * *
"레데이아와의 전투 당시. 그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마녀를 놓쳤을 것이오."
'튜토리얼의 시점 전에, 누굴 만났던 건가?'
그게 나였고?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내가 아는 거라곤, 원작에서 보여졌던 장면들뿐이었으니까.
원작에서는 다른 건 없었다.
바로 튜토리얼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던 크뢰이튼은, 튜토리얼의 시점 이전에 나를 만났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은 전무했다.
"백 년 전이라......그때 무슨 얘길 나눴었지?"
나는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크뢰이튼을 떠보았다.
"오래된 일이라, 나도 나눴던 말은 가물가물하오. 다만 이건 선명하군. 그 마녀와 싸우다가, 내가 놓쳤을 때. 그대가 나타나 검으로 차원의 장막을 베어 길을 만들어 주었소. 차원의 장막을 가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
그때도 나는, 차원의 장막을 베었던 건가?
하지만 정보의 양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약간의 추론 정도는 가능하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백 년 전에도 나는 존재했었다는 거.'
그리고 지금 이 몸이, 확실히 보통의 사람은 아니라는 거.
그렇다면......분명 어디선가 또 다른 나의 흔적을 찾을 방법도 있을 터였다.
지금 당장은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막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알 방법이 생길 거야.'
막연히 그런 희망이 떠올랐다.
다만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하나 처리해보자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3 왕자가 악마에게 빙의 되었다고 했지."
"그렇소이다.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해보았소만......무리였소."
나의 질문에, 크뢰이튼은 내 의도를 파악한 듯 보였다.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오? 이것도 방법이 있소이까?"
"해봐야 알겠지만."
"그렇단 말이오? 호오?......"
크뢰이튼의 눈빛이 반짝였다.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은 마법사이기 이전에, 학자의 눈빛이었다.
"일단은 죽이기 전에......"
꽤 오래간만에 다시 꺼내는 스킬.
정신 공격 방면에서는 거의 최강의 방어 스킬인......
[마나 버닝]
그것이 내겐 있었으니까.
도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시도는 해봐야겠지."
그렇게 우리는, 왕궁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