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건 1회차 기준이고
"허억......! 허억......! 허억......!"
디아즈도 적지 않은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겼다......고위 뱀파이어를......"
그녀는 스스로의 성장에 대한 놀람, 고위 뱀파이어를 이겼다는 성취감, 복수를 끝냈다는 해방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말의 불안도 섞여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벌써 적지 않았으니까.
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레아노아가 악마의 힘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곧 너도 알게 될 것이다."
그 대답에 오히려 디아즈가 약간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그 와중에도 솔레온 백작의 말에 잠시나마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괘념치 않는다. 평생을 함께 싸워 온 친우의 명예가 달린 일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저쪽을 보니, 앤드류 역시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꽤나 얻어맞은 상태에서도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저건 체력을 넘어선 정신력의 영역이었으니까.
저 정도까지 해낼 줄은 나도 놀랄 정도였다.
느닷없이 앤드류는, 드러누운 채로 소리를 쳤다.
"나 그렇게 만만한 새끼 아니라고오오오! 하하하! 사람 만만하게 보더니, 쌤통이다!"
그의 외침에, 함께 싸웠던 성기사들 역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쌤통이다!"
"어디 감히 우리 앤드류를!"
앤드류는 머리만 빼꼼 들고 크게 웃었다.
"그치, 그치? 역시 성기사 아저씨들이 뭘 좀 볼 줄 안다니까?"
"물론이지! 하하하!"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앤드류 경!"
어느새 앤드류와 성기사들은 많이 친해진 듯 했다.
"에이! 아니죠! 다들 같이 싸웠으니 살았죠! 저도 아저씨들 아니었으면 벌써 뒤졌다니까요? 하하하!"
"크으! 사람 진국이구만?"
"그럼 오늘 술 한 잔 사!"
"고럼, 고럼! 내가 오늘 우리 아저씨들 정신 못 차릴 때까지 먹일 거야!"
......너무 많이 친해진 거 같았다.
* * *
일련의 전투가 마무리되고.
나는 내 발아래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옆에 있던 가르겐트 백작이 그런 나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나?"
"흠."
나는 잠시 대답하는 것을 생략하고, 천천히 걸으며 발로 툭툭 바닥을 쳐 보았다.
분명 뭔가 묘한 기운이 저 아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차원의 장막 밖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이 안에서, 전투를 마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전투 중에는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것들이 먼저 느껴지니 말이다.
'숨소리......인가?'
하나 굉장히 가늘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나의 머리에, 하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필멸조.'
놈들이 이 안에 필멸조를 둔 것이란 말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소리였다.
이곳은 도시 최외곽에 자리 잡은, 사형수 수용소였다.
이 지역에서 이곳만큼 탈출이 힘든 곳도 드물 것이리라.
'게다가 놈들도 바로 이곳에서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더더욱 도망갈 곳이 없었을 테지.'
추측에 확신이 들자.
나는 딱히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대로 왼팔을 들어 올렸다가.
망치질 하듯 크게 휘둘러 내려찍었다.
콰앙!
쩌저적.
멀리 있는 이들의 시선도 일제히 내게 모였다.
갑자기 바닥을 치니 그럴만하긴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르겐트 백작에게 말했다.
"곧 무너질 것이다."
그제서야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 아! 알겠네! 다들 물러서라!"
가르겐트 백작이 소리치자, 기사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하였다.
"뭐, 뭐지?"
"로한 경이 또 뭘 하시는데?"
"무슨 일인데 그래? 나도 좀 보자고."
"여기서도 안 보여, 그만 밀어."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한 번.
콰아아앙!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쿠구구궁......!
"어, 어어! 무너진다!"
"물러서! 뒤로 가!"
"야, 야! 빨리 가, 인마!"
나를 중심으로 바닥이 꺼지고.
나는 아래로 그대로 떨어지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을 만났다.
* * *
타악.
바닥을 무너뜨리고.
그 아래에 있는 곳에 나는 내려앉았다.
그리고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저쪽이었다.
이미 어둠 속에 있었으니,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익숙한......냄새가 나는 자로군."
내 눈은 아직도 어둠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점차 녀석의 윤곽이 보였다.
거대한 붉은 눈의 까마귀.
첫 인상은 딱 그러했다.
그 붉은 눈의 까마귀는, 거대한 새장에 갇힌 채.
그걸로도 모자라서 온몸이 팔뚝만 한 쇠사슬로 칭칭 감긴 모습이었다.
아마도 저 구속구는, 레데이아의 작품인 모양이었다.
"불사조의 새로운 주인인가?"
역시 신수인 필멸조라 그런가.
한 방에 알아내는 게, 보통은 아닌듯싶었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기에, 나는 바로 대답을 했다.
"그렇다."
"불사조의 주인을 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로군. 불사조 녀석이 그대를 이리 이끌었는가?"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오는 필멸조.
이번에도 나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아니. 녀석은 지금 안전한 곳에서 자고 있다."
"......"
필멸조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에휴."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 녀석.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군."
"그렇다. 아직 그냥 아기 새 정도이지."
"그러니 형제가 이리 잡혀 있는데도 태평하게 잠이나 쳐 자고 있겠지."
필멸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 좀 풀어줄 수 있겠나? 그 마녀를 용케도 잘 따돌리고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마녀가 되돌아오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
나는 검을 뽑아들고 거대한 새장의 철창부터 잘랐다.
스윽.
그리고는 필멸조에게 다가가서 녀석의 몸통을 꽁꽁 묶고 있는 쇠사슬을 조심조심 잘라내기 시작하였다.
"오호. 매우 잘 드는 검이로군. 좋다! 그런데, 조금만 더 서두를 수 없겠나? 이러다 레데이아가 다시 오기라도 하면......"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필멸조의 날개가 다치지 않도록 여전히 느린 속도로 쇠사슬을 잘랐다.
워낙 타이트하게 묶어둔지라, 거의 살에 파묻혀 있어 빠르게 하기가 힘들었던 까닭이었다.
필멸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미 죽었거든."
"죽......였다고? 서, 설마 그 레데이아를? 그 마녀를 죽였다고 말하는 건가?"
* * *
몇 번을 연타로 되묻는 건지.
그만큼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확실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릴......"
딱히 대답 없이 계속해서 쇠사슬이나 자르자.
필멸조는 다시 물어왔다.
"정말......그 차원을 넘나드는 괴물을 죽였다는 말인가?"
서걱.
그때쯤.
쇠사슬의 매듭도 다 잘라 내어져, 필멸조의 몸에서 쇠사슬이 완전히 풀려났다.
촤라라랑.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늘어지는 쇠사슬 뭉치.
저걸 둘둘 감고 있었던 탓인지, 필멸조의 날개는 깃털이 엉망진창으로 눌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
"그래. 죽였다."
"불사조 녀석......이번 생에는 대단한 인간을 데려왔군. 그럼 그 옆에 있던 고위 뱀파이어 놈들과, 뱀파이어 로드도 죽은 건가?"
"뱀파이어 로드?......"
고위 뱀파이어 둘은, 솔레온 백작과 몰렌 백작을 일컫는 말인듯싶었다.
그러나 뱀파이어 로드는 본 적이 없었다.
'연관이 있기야 하겠지. 고위 뱀파이어를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뱀파이어 로드뿐이니까.'
그것도 둘이나 동시에 나타났다.
때문에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다.
다만 막상 내 귀로 들으니, 더욱 크게 체감적으로 다가왔다.
"뱀파이어 로드는 보지 못했나 보군?"
"고위 뱀파이어 둘은 죽였다."
"그래......드레트노어. 그 간사한 놈이라면 이미 도망칠 구멍 하나쯤은 만들어 놓았을 테지."
드레트노어......?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옴에,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자가 연관되어 있는 건가?"
나의 물음에, 필멸조는 굉장히 놀라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 자라니. 드레트노어를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알고 있는 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많이 놀라는 것도 처음이군.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드레트노어를 알고 있다니."
필멸조가 놀라는 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드레트노어는 수천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골치 아픈 존재 보스 몬스터로 등장을 했었으니까.
등장할 때조차 드레트노어가 누군지도 모르고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데 그건 1회차 기준이고.'
2회, 3회차가 넘어가면 드레트노어의 존재에 놀라는 시네마틱 영상은, 귀찮아서 넘겨버리곤 했다.
그 정도로 봐왔으니 모를 리가 없지.
뭐, 어쨌든.
그 드레트노어가 등장하는 것은, 원작에서도 꽤 후반부였다.
'따지고 보면 레데이아와의 전투 거의 직후이긴 하네.'
그놈이 이 시점부터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는 말인가?
레데이아도 그렇고.
내 생각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게임으로만 접할 땐 굳이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만......'
의외의 존재가 등장함에, 내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던 그 와중에.
필멸조는 고민거리를 하나 더 얹어 주었다.
"드레트노어는 그 불사의 몸을 걸고, 불길한 존재, 모르자돈의 괴수와 거래를 하였다."
"모르자돈의 괴수라면......설마, 그......"
"그렇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분노에서 태어난 저주와 같은 존재."
드레트노어도 당혹스러운데 모르자돈의 괴수까지 나오다니.
모르자돈의 괴수 지금의 신들 이전 세대의 신족, 타이탄의 자손이었다.
타이탄의 자손이라고는 하나, 명칭부터가 괴수이듯 모르자돈의 괴수는 끔찍한 모습의 존재였다.
생긴 건, 눈알이 다다다닥 박힌 거대한 사마귀 같은 형태라고 보면 쉬웠다.
신의 권좌를 빼앗긴, 타이탄의 분노에 의해 태어나게 된 그 괴수는.
지금의 신들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현세대의 신들을 따르는 인간들에게는 매우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고.
물론, 그로 인해 모르자돈의 괴수는 저 어딘가에 신이 만들어 둔 감옥에 갇혀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세상 밖으로는 나오지 못했는데......
나는 필멸조에게 물었다.
"드레트노어가 그놈과 결탁을 했다고? 이유가 무엇이지?"
"그것은 나 역시 알지 못한다. 단지 불멸의 존재가 불멸을 팔아넘겼기에 나는 알아차렸을 뿐. 그래서 놈을 쫓던 중, 레데이아에게 당했었다. 아마 드레트노어와 레데이아. 둘 다 한패였겠지."
"......"
조금은 아쉬웠다.
정보가 없다니.
그런데......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필멸조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예 소득이 없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드레트노어와 모르자돈의 괴수는, 지옥의 세력을 이 중간계로 끌어들일 심산이다. 중간계가 혼란에 빠뜨릴 작정인 것이야. 그 분노를 채우기 위해서."
결국 대침공을 일으키는 게 드레트노어와 모르자돈의 괴수라는 소리인가?
잠깐만, 잠깐만.
필멸조는 큰 건은 아닌 듯 말했지만, 내게 이건 매우 큰 정보였다.
지금까지는 결국 일어날 대침공에 대비를 하고.
또 기껏해야 대침공을 늦추는 데에 혈안이 되었던 나였다.
대침공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몰랐으니까.
한데 지금, 필멸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대침공의 원인 자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말인즉, 저놈들을 막기만 하면......
'악마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지 않아도 되잖아?'
대침공 이후의 파오갓 세계는, 그야말로 종말 직전의 세상이었다.
살아 남는다 한들, 지금처럼 편히 돌아다니고, 먹고 마실 수 없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길 대충 몇 미터만 걸어도 괴물들이 튀어나오는데 말해 무엇하랴.
애초에 그 일이 벌어지는 걸 막을 수 있다면?......
필멸조는 입을 다문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드레트노어, 그자를 막아야 한다. 나를 돕는다 약속을 한다면, 인간이여. 그대에게 필멸조의 가호를 내려줄 것이니. 죽음의 섭리를 벗어난 자들을, 안식처로 되돌리는 힘이노니."
게다가 보너스까지 준다는데......
거절을 할 이유를 찾기가 꽤 힘들었다.
나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