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디서부터?
"나 벌써 까먹었어요? 앤드류! 앤드류잖아요! 같은 일곱 기사단! 내 검 잘랐던 거, 기억 안 나요?"
피 튀기는 전장 한가운데서.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가리키는 앤드류의 모습은 꽤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건 그렇고.
기억 나기는 났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앤드류는 폭염의 기사라는 이명에 걸맞게, 폭염 베기를 사방으로 뿌리며 대답했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고 얘기하시죠. 저쪽 퇴로 쪽 방향에 생존자들 피난처가 있거든요!"
"그렇게 하지!"
나 혼자 날뛴다면 몰라도, 지금은 저 기사들 역시 내 수족이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도 잃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앤드류는 믿을만하긴 하니까.'
"빈센트 기사단장!"
"예! 로한 경!"
"내가 제일 후미에 서서 막겠다! 부상당한 병력부터 먼저 탈출시키고, 멀쩡한 기사들은 지원군과 함께 합세하여 움직이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퇴로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 낙오된 이들을 살폈다.
그리고 내 옆으로 디아즈와 앤드류가 따라붙었다.
펑! 퍼퍼펑!
일격, 일격마다 폭염이 휘몰아치는 앤드류의 검격은, 연신 하급 뱀파이어들을 난도질하였다.
앤드류가 가진 기본기 자체도 워낙 탄탄했던지라, 모든 공격이 매서웠는데.
더불어 그 베기에 폭염 공격이 더해지니.
제아무리 뱀파이어들이라 하지만 베이자마자 폭발을 해대니, 버틸 수 없이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얕게 베이거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아도 목이나 심장만 멀쩡하면 다시 회복을 하는 뱀파이어 놈들이었지만.
앤드류의 권능인 폭염이 검격에 섞이자, 그들의 생존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게 폭락했다.
서걱! 퍼펑! 샥! 펑!
그야말로 앤드류의 검에는 베이는 족족 죽어나간 것이다.
"케에에엑!"
"크르르르르......!"
피 냄새에 흥분했을 뿐, 구울과 달리 이성이 아직 남아있던 놈들은 슬금슬금 앤드류를 피하기 시작했다.
앤드류와 뱀파이어들 사이의 기류를 보아하니, 이미 일전에도 몇 번의 전투를 치른 모양이었다.
명백하게 앤드류를 겁내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
덕분에 나와 디아즈 쪽으로 공격이 몰리기 시작했는데......
물론 호락호락 당할 우리가 아니었다.
디아즈 역시 최근 나와 함께 한 수련 덕분에 기량이 확연하게 올라간 상태였다.
"흐아아압!"
석둑! 석둑!
앤드류 같은 폭염은 없지만, 디아즈에게도 레아노아에게 이어받은 권능이 있었다.
임팩트가 크지는 않아 가끔 잊어버리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한......
[자비 없는 공격자] 라는 이름의 체력 비례 데미지 권능이!
"키이이이이!"
"크르으으으......!"
디아즈마저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자, 자연스럽게 이제 내 쪽으로 남은 병력이 몰렸는데......
나는 놈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고유 스킬 가진 애들 피해서 나한테 온다고?'
판단을 잘못해도 한참을 잘못한 것이었다.
파직......파지직! 쩌정! 쩌저저저저정! 콰과가가강!
나는 검은 천둥을 풀파워로 뿌려댔다.
천지 스톰을 방불케 하는 번개 줄기가, 내 전방으로 춤을 추듯 휩쓸고 지나갔다.
그 후.
내 앞으로는 거대한 뱀파이어 공동 묘지 하나가 만들어졌다.
확실히 고유 스킬을 가진 네임드 급 인간이 셋이나 모이니.
그 무력이 상상을 초월하였다.
이렇게나 시너지가 크게 날 줄은 나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결국 아직 머릿수가 많이 남은 뱀파이어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고.
앤드류가, 내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와......번개 권능......미쳤네......"
* * *
나와 디아즈는 앤드류를 따라 달려나갔다.
중간중간 하급 뱀파이어 몇몇이 나타나긴 했지만.
촤악!
우리 셋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 자그마한 셸터 같은 곳이었다.
"으으윽......"
"여기! 좀 도와줘! 피가 너무 많이 나! 지혈 좀 도와줘!"
"커헉......커헉......"
"후......편히 가시게......"
하나 이곳도 결코 대피소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작은 지옥에 가까웠지.
부상자들이 혹시나 뱀파이어들에게 들킬까,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순간 순간마다 사망자가 늘어가는 중이었다.
혹시 이곳마저 뱀파이어들에게 들킬까, 죽는 이가 생겨도 목놓아 울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나와 디아즈는 그런 사람들을 지나 계속 걸었다.
앤드류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앤드류가 선 곳은, 한 사내의 앞이었다.
"앤드류 경? 왜 본대보다 이렇게 늦었나?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라지 않았나."
야만전사.
그 이름이 진짜 찰떡같이 어울리는, 약간은 고릴라 같기도 한 중년의 사내였다.
옆에 세워진 무기도 하필 웬만한 사람 몸통만 한 도끼였기에 더욱 무지막지한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그는 앤드류의 뒤에 있던 나와 디아즈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은 누구 신가?"
"아! 여기가 바로 제가 전부터 말했던 그......"
앤드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아하. 그 로한 경?"
전부터 말했다니.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또 뭘 얼마나 말했길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아채는 걸까.
여러 의문점이 있었지만, 일단은 그냥 넘겼다.
"이야! 이거 반갑소. 말씀 많이 들었소이다. 나는 이곳의 통솔자인 카손이오."
카손이 솥뚜껑만 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로한이다."
카손의 손이 내 손을 잡았는데.
'우와. 무슨 손바닥이......'
돌덩이를 만지는 것만 같았다.
손바닥 안쪽에 이렇게나 많은 굳은살이 박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마 그만큼 저 거대한 도끼를 자주 휘두른다는 소리일 터였다.
"그리고 이쪽은 로한 경의 부관이신 디아즈 경이시고."
앤드류는 디아즈도 소개를 하였다.
"반갑소."
"예. 다아즈라고 합니다."
대충 핵심인물들은 다 모인 것 같았기에, 나는 앤드류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군."
"아. 그게 말이죠. 처음에는 로한 경이랑 대련 한 판 붙어보려고 쫓아간 게 시작이었거든요?"
"나를 쫓아? 어디서부터?"
"당연히 스트라운 교구에서부터죠."
"......"
스트라운 교구라면......완전 처음 아닌가?
거기서부터 쫓아왔다고?
근데 이렇게 오래 걸렸다고?......왜?
"그랬는데 말이죠."
* * *
"제가 좀 길치란 말이죠."
"......"
"거기다가, 아니. 왜 그렇게 이동이 빨라요? 쫓아가면, 벌써 출발했다 그러고. 또 쫓아가면 떠났다 그러고. 뒤지는 줄 알았네. 진짜."
그게......과연 내 잘못인가?
"스트라운에서부터 하필 길을 잘못 들어 가지고......여튼 돌고 돌다가, 그 시포레오에 크라우스 아저씨 아시죠? 그 아저씨한테 들었거든요. 발트라스 왕국으로 갔다고. 그래서 쫓아 온 거죠. 그렇게 도착한 게 여기였는데......성 밖에서 엄청 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죠."
앤드류는 손짓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묘사하며 열성적으로 설명을 이었다.
"그게 막 솟구치는데. 어후, 이건 뭔 일이 나도 크게 났구나. 화재인가보다! 나도 도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발을 들였죠. 그런데 이게 뭐람?"
의외로 앤드류는, 맛깔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화재가 문제가 아니라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더라고요.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들이랑, 손자를 지키려는 할머니랑. 막 도륙을 당하는 거에요. 눈 앞에서. 일곱 기사단이 그걸 그냥 넘기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맞장구라도 쳐야 하나?
"그래서 일단은 사람들부터 살리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이렇게 된 거죠. 사실 저도 여기 온 지는 이틀밖에 안 됐어요."
걱정이 무색하게 앤드류는 맞장구치지 않아도, 알아서 할 말 끝날 때까지 다 하는 타입이었다.
다만 다 들었는데도 딱히 도움이 되진 않는, 실속 없는 느낌이 좀 있었다.
역시 얼굴만 잘생긴 녀석은 마음에 안 들었다.
카손은, 앤드류의 말이 끝나도 정확한 정황이 파악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는지, 적당히 치고 들어왔다.
"이 사달이 일어난 건 고작 일주일 전이오. 알지 모르겠지만, 원래 이 몰렌 백작령은 발트라스 왕국에 잘 섞이지 못하는 느낌이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과 합쳐진 지 얼마 안 된 부족이었다고 들었다."
"오. 알고 있구려? 그렇소. 우리는 우리만의 왕을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전사들이었소. 그래서 발트라스 왕국의 일원이 된 이후에도, 종종 마찰이 있었지. 기본적인 성향 자체가 조금 달랐던 탓이오."
"그럴 수 있지."
"물론 실은 그리 나쁘게 병합된 것은 아니오. 왕국에서도 나름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고, 풍부한 지원도 있었소. 덕분에 백성들 삶의 질도 올라갔고. 다만 그럼에도 의견 차이는 항상 있어왔었소. 다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쪽과, 지금 상태를 유지하자는 쪽. 그리고 그 균형이.....솔레온 백작에 의해 무너졌소."
솔레온 백작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독립파를 부추겼나?"
"아니. 그 반대요. 찬성파를 부추겼지. 나는 백작령의 독립을 원하던 독립파이자, 부족장이었던 몰렌 백작의 부관이었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립파도 아닌 찬성파를 왜......
"솔레온 백작은 현황 유지를 원했던 몰렌 백작을 건드렸소."
"찬성파가 넘어갈 일이 있었나?"
"몰렌 백작은 애초에 발트라스 왕국의 국왕 자리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
"그는 처음부터 전쟁을 일으킬 작정이었소. 내전을!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냥 독립을 하려 했던 것이오. 원래의 모습대로......그저 작은 우리의 나라 모습으로. 하나 결국......이렇게 피바다가 펼쳐져 버리더군. 나는 아무것도 막지 못하였소. 겨우 이 인원들만 살렸지. 그것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곳에서."
카손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앤드류는, 화제를 살짝 돌렸다.
"로한 경은 여기 어떻게 알고 온 거에요? 뱀파이어 놈들이 성을 완전히 틀어막아서 구조 요청도 못 했었는데."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솔레온 백작을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 상태더군.
"아하......"
"솔레온 백작이 어디 있는지는 혹시 알고 있나?"
"글쎄요. 지금 여기 내부에서도 정리가 안 된 상황이라......지원군이 더 오고, 상황을 진압한 후 수색을 해야 할 거에요."
그에 나는 빈센트 기사단장을 불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로한 경."
"가르겐트 백작이 직접 이끌고 온다던 후속 부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나?"
"아마 그 행군 속도라면......내일 해가 진 무렵쯤에 도착할 겁니다."
"그러면, 또 어두운 상황에서 투석기 공격을 받겠군."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선봉 원정대야, 내가 있어서 막았지.
일반적인 경우 불시에 그런 투석기 공격을 받는다면, 부대의 절반은 소멸되고 전투가 시작될 것이었다.
그건 안될 말이었기에.
나는 투석기를 망가뜨려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 밤이 되기 전에, 투석기를 전부 파괴한다."
그에 빈센트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떠오른다면, 하급 뱀파이어들은 확실히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카손은 그런 우리들에게 절망스러운 대답을 내어 놓았다.
"이 성 안은, 낮이 없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요. 해가 뜨지 않는다는 것이오. 이 성은, 우리가 아는 세상과 완전히 독립된 곳이 되어버렸소. 들어올 수만 있을 뿐. 나갈 수가 없는......다른 차원 같은 곳 말이오. 북쪽으로 나가면, 희한하게도 남쪽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어있었소."
차원 분리 마법?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카손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요. 일단 상황이 파악이 되어야 뭘 하든 말든 대책을 세울 텐데......어디서부터 어떻게 알아내야 할......"
나는 그의 말을 툭 끊으며.
정답을 내어주었다.
"차원을 가르는 마녀. 레데이아."
내 대답에, 벤센트 기사단장과 카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레데이아? 그게 누구요?"
하지만 그나마 성기사단에 몸을 담았던 디아즈와 앤드류는 눈을 크게 번뜩였다.
"확실히. 그 마녀가 있긴 있었죠."
"와우......한 방에 알아낸다고요?"
하나 곧 디아즈와 앤드류의 얼굴은 얼어붙었다.
"그 마녀라면......방법이......"
"큰일이네. 이거 잘하면 영원히 못 나가겠는데......"
물론 내 얼굴은 여전히 그렇게 얼어붙지 않았다.
그걸 눈치챈 디아즈가 물어왔다.
"설마, 로한 님.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씨익.
"방법이......있지."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고인물의 지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