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내 검 잘랐던 거, 기억 안 나요?
"환영식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나의 질문 아닌 질문에, 빈센트 기사단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을 했다.
"몰렌 백작령은 기본적으로 반 국왕파 성향이 짙은 곳이긴 한데......이건 좀 과한 것 같습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전쟁 중인 적국도 아니고, 자국의 군대가 다가오는데, 다짜고짜 투석기를 발사하다니.
아마 누가 보아도 일반적인 상태는 아니라 할 것이었다.
게다가 하필 타이밍도 솔레온 백작이 도피를 한 직후이지 않은가.
나는 저 안에서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결심을 굳혔다.
"돌파한다!"
강경한 결단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흑철 기사단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 명을 따랐다.
"예!"
"목표는, 허물어진 성벽! 저곳을 뚫고 돌격한다!"
바로 고개를 끄덕인 빈센트 기사단장이,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방패 들엇!"
처처척!
기사들은 각자 일제히 방패를 세워, 화살이 비집고 들어 올 틈도 없이 전차와도 같은 모습을 만들었다.
실제로 이 시대의 기사들은 전차와도 같은 포지션이기도 했으니.
그러나 화살은 막을지언정, 적진에는 투석기도 떡하니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투석기 앞에서는 당연히 방패 따위는 무용지물에 불과하였다.
해서 나는 이번에도 가장 선두에 섰다.
"내가 선봉에서 길을 뚫겠다! 날아오는 바위는 내가 처리 할 테니, 오로지 화살만 막는다는 생각으로 전투 준비하라!"
나의 외침에, 모든 기사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였다.
이미 목숨을 건 전투를 한 차례 지나쳐 온 우리들이었으니.
서로에 대한 믿음은 결코 모자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얼핏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지만 기사들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그들의 기세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디아즈와 빈센트 기사단장에게 말을 했다.
"둘은, 내 좌우에서 화살을 방어하라. 검은 뽑을 필요도 없이 오로지 방어에만 전념하면 된다. 그리고 디아즈는 피코 품에 잘 챙기고."
어차피 내가 최전방에서 길을 뚫지 않는다면, 원정대 전체의 진격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전황을 간파한 디아즈와 빈센트는 바로 대답을 해왔다.
"예. 로한 님."
"알겠습니다, 경!"
그들의 준비가 된 걸 확인한 나는.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전군! 진격!"
내 신호에 좌우로 디아즈와 빈센트 기사단장.
그리고 뒤로는 원정대가 일제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뒤처지지 마라!"
"돌겨어어어억!"
함성과 함께, 하늘로 화살이 까맣게 날아올랐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방어 진형으로!"
명령을 내렸고.
척! 척! 처척!
기사들이 방패를 세우며 완전한 방어 태세를 갖추며, 그 자리에 멈추었다.
디아즈와 빈센트 기사단장 역시 두 방패를 이용해 벽을 세웠다.
잠시 후.
엄청난 양의 화살이 한순간 비처럼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익......퉁! 투퉁! 퉁! 퉁!
방패 너머로 들리는 살벌한 소음.
도대체 저 성벽 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살의 가득한 공격을 펼친단 말인가.
여러가지 의문이 동시에 들었지만, 결국은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화살 비가 멈추자.
"진격!"
다시 우리는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다음 순서는 투석 공격이었다.
텅! 텅! 터엉! 텅!
몇 개의 돌덩이가 하늘에 떠올랐다.
다 막을 필요는 없었다.
몇몇 개는 충분히 회피가 가능했으니까.
다만 단 하나.
정면으로 날아오는 저것은 처리를 해야 했다.
나는 검을 뽑아들고, 가볍게 세로로 선을 그었다.
사악.
공간과 함께 단면조차 말끔하게 좌우로 동강 나는 돌덩이.
일전에 언데드와의 전투에서는 내 공간 베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흑철 기사단의 기사들이 깜짝 놀란듯했다.
"사람 만한 돌덩이를 무슨......!"
"단면이 이건 나무를 잘라도 이렇게는 힘들 텐데......"
너무 놀라 잠시 넋을 놓은 그들에게 내가 소리쳤다.
"다시 진격한다!"
"예, 예!"
"움직여라!"
바위도, 화살도.
우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 *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군."
우리는 무사히 성벽을 돌파하였다.
그런데......
"캬아아악!"
"크륵!"
"키이이이이......!"
내부의 병사들 상태가 얼핏 봐도 정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몰덴 백작령은 야만 민족 출신이라고 하기는 했는데......
'이건 야만의 수준이 아니라 광기인데?'
그들이 원래 이 몰렌 백작령을 지키던 병사인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갑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으니.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평범한 병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온 몸을 이상하게 비트는 좀비와, 광견병 걸린 개를 뒤섞어 놓은듯하였다.
외형도 굉장히 불쾌한 모습이었다.
전혀 관리 안 된 마구 헝클어진 머리.
비쩍 마른 얼굴에,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그리고 길게 뻗은 송곳니까지.
더불어 눈의 흰자는 실핏줄이 전부 터진 듯 뻘겋게 변해, 혐오감을 일으켰다.
그 괴이한 현상을, 나는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흡혈귀다......!"
정확히는, 고위 뱀파이어가 만든 하급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러나 저들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다.
인간을 훨씬 상회하는 힘을 가진 데다가, 구울 같은 언데드들과는 달리 지능도 가진 녀석들이었으니까.
덕분에 투석기 같은 병기까지도 동작시킨 것이고.
단지 아직 뱀파이어가 된 지는 얼마 안 된 탓에, 가까이에서 맛있는 피를 가진 인간을 보니, 피를 향한 욕망에 이성이 많이 날아간 듯 하였다.
나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사들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로, 공략법을 알렸다.
"집중하고 목과 심장을 노려라! 인간과 달리 그 외의 신체는 베여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빈센트 기사단장이 다시 한 번 집중을 시켰다.
"다들 로한 경 말씀 들었겠지? 목과 심장이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침착하게 삼삼오오 모여, 진영을 꾸리고 공방을 맞춰 놈들에 맞서나갔다.
올드리온 최강의 기사단 중 하나라는 그 명성에 걸맞게.
칠흑 기사단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조급했다.
'이거......시간 문제다.'
* * *
대규모 뱀파이어 전을 원작에서 겪어 본 나로서는 확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준비가 너무 빈약했다.
설마 여기서 뱀파이어들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물량이 심각하게 모자랐다.
도무지 얼마나 많은 수가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검은 천둥을 일으키고.
콰가가가강! 쩌저정!
공간을 베며 일격에 대여섯의 목을 한 번에 날려도.
아직 몰려드는 뱀파이어들은 까마득했다.
나야 최근 급성장을 한 덕에 아직 더 날뛸 수 있다지만......
'기사들은 무한 체력이 아니다.'
호라이크던과의 전투와는 상황이 달랐다.
스켈레톤들은 그 수가 많다 하더라도, 그들의 수장인 리치를 죽이면 일순간에 다 없애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고.
호라이크던만 처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뱀파이어들은 성질이 달랐다.
수장을 없앤다 한들, 이들은 소멸하지 않으니까.
심지어 그 수장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이들 전체를 이끄는 사령관의 입장이었다.
'무책임하게 전투를 이어나갈 수는 없어. 최소한 싸우더라도 재정비는 할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전면전을 벌일 타이밍이 아니었다.
때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최소한 지금이 새벽 정도만 되었더라도 어떻게든 버티며 시간을 끌어 보았을 텐데......
'아직 해가 뜨려면 너무 멀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 기사들이 다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
"전선을 물린다! 퇴각 준비!"
내 명령을 빈센트 기사단장이 다시 한 번 기사들에게 알렸다.
"방어선을 유지하며 퇴각을 준비하라! 낙오되지 않도록 최대한 붙어!"
빈센트 기사단장의 말에는, 낙오된 이를 구할 수 없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니 제발 낙오되지 말라는 뜻이었고.
아무래도 퇴각을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기사들의 사기가 조금은 줄어든 게 보였다.
이러한 휘하 기사들의 사기 역시 내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기에, 나는 더 이를 악물었다.
기세가 죽으면 전세가 넘어가고.
전세가 넘어가면 희생자가 나온다.
당연히 나는 사령관으로서 전부 다 살려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기세를 살려야 했다.
"단 한 명의 낙오도 용납지 않는다! 전부 살아나갈 것이다!"
그에 차갑게 식을 뻔했던 기사들의 전의가 조금씩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로한 경을 따르라!"
"방패 똑바로 들어!"
"정신 차리고 버텨라아아!"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아악!"
전력을 다해 모든 기사들을 체크한다고 체크했지만.
한 명이 결국 쓰러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쓰러지며, 방어선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당장 그 자리로 뛰어가, 흡혈귀들을 도륙 내었다.
촤자자자작!
순식간에 공간 베기가 사방으로 펼쳐지며, 검막을 형성하였다.
"디아즈!"
"예! 지금 갑니다!"
디아즈 역시 달려와 쓰러진 기사를 부축하고, 물러났다.
동시에 나는 곁눈질로 방어선을 살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양옆의 기사들이 빈틈을 메우며 다시 방어선을 구축하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조금 더 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런데.
"으아아악!"
저 반대편에서 또 다른 기사가 쓰러졌다.
'큰일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를 비울 수가 없었다.
'젠장......!'
그때.
어디선가 횃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빨리빨리 뛰어! 다 죽기 전에 데려와야 할 거 아니야?"
* * *
나는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면서도, 갑자기 나타난 무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을 해야 했기에.
하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아군 같았다.
"여기! 지원해 줘! 방어선 짜야 해!"
"간다고, 가!"
이미 많은 경험이 있는 것처럼, 퇴로부터 깔끔하게 마련을 하고는.
눈치 빠르게 반대편의 무너진 방어선 쪽부터 병력들이 투입되더니.
"부상자! 여기 부상자 살펴!"
"의무병!"
순식간에 다친 기사를 퇴로로 유도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몇몇의 인원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뱀파이어들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 왠지 조금 익숙한 얼굴이 하나 끼어 있었다.
금발의 단발머리를 뒤로 묶은, 약간은 날 티 나게 자알 생긴 얼굴.
마침 그자도 나를 돌아보는 게 아닌가.
"......"
"로한 경? 와. 드디어 찾았네!"
심지어 나를 알아보았다.
누군지 헷갈려 하던 그때.
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그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했다.
"나 벌써 까먹었어요? 앤드류! 앤드류잖아요! 같은 일곱 기사단! 내 검 잘랐던 거, 기억 안 나요?"
아! 드디어 생각났다.
일곱 기사단이 되면서 제일 처음 만났던, 일곱 기사단의 일원.
앤드류.
근데......쟤가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