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신경 쓸 필요 없다
발트라스 왕국의 수도, 올드리온 대교구 소속 이단 심문관 제프론.
내가 그를 보고 굳은 이유는, 그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침공의 전조였던 이 세인트 발라트 기습 침공 사건.
갑작스러운 악마들의 공격에, 엄청난 피해가 터져 나온 이 사건은.
많은 이들의 생각을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종종 있었던 악마들 개개인이 실행한 작은 공격과는 달리.
세인트 발라트 기습 침공 사건은 인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에 가까웠다.
그 일은 꽤 오랜 세월 평화에 젖어 살던 인간들에게, 그간 잊고 있었던 악마의 참혹성과 두려움을 일깨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세인트 발라트의 몰락으로 인간들은 가족, 사랑하는 이, 살아가던 터전을 비롯해 많은 것을 잃게 되는데......
그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이 바로 제프론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사람 좋은 모습이지만......'
극한의 절망을 지나고 난 그는, 악마인지 악마 심판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모호한 사람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 바였다.
아내와 자식들.
키우던 강아지와.
그리고 평생을 함께 싸워온 동료 성직자들과 친구들까지 전부.
지금으로부터 며칠 후면, 그는 사랑했던 모든 걸 잃게 된다.
그와중에 혼자 살아남아 미칠듯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결국 마지막에는 미쳐버리는.
나름 찬찬히 뜯어보면 꽤나 슬픈 스토리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막아야 했다.
이 세인트 발라트가 멸망하는걸.
대침공을 미루는 것도 미루는 거지만, 세상 골치 아픈 빌런의 탄생도 덩달아 사전 차단할 수 있으니까.
그의 성격상, 빌런으로 진화를 한다면 나도 아마 처단 목록에 들어갈 듯싶었으니까.
'자신의 상식에 조금만 어긋나도 죽이려 들었지.'
제프론의 판단 기준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바로 그 스스로가 기준이었다.
그렇기에 더 무서웠다.
'자기가 보기에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다 사형이었으니까.'
그리고 빌런이 된 그의 눈에는 내가 가진 여러 개의 권능들도 이상하게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내가 두 가지 이상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십중팔구 죽이려고 덤벼들겠지.'
지금의 그는 아직 그렇게 되기 전의 모습인듯싶었다.
"하인트 주교님의 후계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그런데 유독 하인트 주교라는 이름에 반응이 크네?
실은 유명한 사람이었던가?
원작에서는 딱히 조명되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나는 그냥 흔한 성직자 노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 참. 믿기 힘들긴 하군요."
"믿기 힘들다고 해서 사실이 거짓이 되지는 않지."
"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믿든 말든, 사실은 사실 그대로이니."
제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혹여 그가 내게 하인트 주교에 대해 물어볼까 봐, 이야기를 돌렸다.
"대충 예상은 간다만, 이 병력들은 묘지기 때문에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가 악마와 계약한 계약자라는 의혹이 있어서 말입니다. 한데, 안에서 나오시는 걸 보니 저도 궁금하군요. 어째서 저곳에서 나오시는지."
말은 나긋나긋하지만, 제프론의 눈빛은 매우 매서웠다.
굳이 나도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오늘 이 세인트 발라트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기분 나쁜 일이 생기더군. 버젓이 악마 놈이 도시를 활보하는 꼴을 보는 일 말이야."
"......"
거기에 힘을 좀 더 얹어 목소리를 키웠다.
여기서 괜한 의심이라도 샀다가는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처리하고 나오는 길이다! 이곳의 성기사들은 어디 있나? 왜 흑철의 기사단은 있는데 성기사 병력은 보이지 않는 거지? 타지에서 온 내가 처단하기 전에 도대체 이 도시의 성직자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오히려 내가 제프론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 약간 내가 띄운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물론 진짜 악마 계약자를 만나 짜증이 나기도 했고.
"제프론 이단 심문관. 신중히 대답하길 바란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 송구합니다. 실은 도시 곳곳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연달아 터지는 와중이라, 성기사들의 피로도가 극심한 상태입니다. 해서 경계에 부족함이......"
"그럼 다른 도시에서라도 보충을 했어야지! 아니면 다른 곳 어디에서라도! 그래서 악마 놈들의 씨를 말렸어야지!"
"......드릴 말씀이 없군요. 송구합니다."
으음. 너무 강하게 나갔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약간 걱정이 되었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화를 삭였다.
"오늘은 피곤하니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지. 내일 내가 찾아갈 테니, 그간 있었던 모든 사건들을 전부 정리해 뒀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나는 홱 하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그날 새벽.
세인트 트라발 시청.
흑철 기사단 단장실.
그곳에서는 흑철 기사단의 단장, 빈센트와 제프론이 마주 앉아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후. 제프론 이단 심문관님. 이거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 뭐, 로한인가 하는 사람도 같은 이단 심문관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하하."
"그런데 그렇게까지 화낼 건 없지 않습니까. 저희가 놀고 있던 것도 아니고."
"저는 솔직히,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에서 끝난 게 말입니다."
"......예?"
제프론은, 손으로는 자료를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
"빈센트 단장님께서는, 하인트 주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대단한 분이셨다고 듣긴 들었습니다만......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실은, 하인트 주교님께서는 차기 교황이 되실 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예. 그분께서 과거 이단 심문관으로서 활동하시며 처단한 악마의 숫자가 자그마치 수백에 달한다 합니다. 그러니 결코 자격이 모자라신 분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반대하는 분들도 사실 여럿 계십니다."
"반대라니......왜 그런 겁니까? 수백의 악마를 단죄하신 분이신데......"
"워낙에 불같은 분이시거든요."
빈센트 기사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격이 말입니까?"
"그렇지요."
"성격이 불같다고 반대를......"
"조금 과할 정도긴 하셨습니다. 하하. 그런 그분 앞에서 악마를 놓친다? 그건 그냥, 어후. 저도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인트 주교님은 저도 뵌 적이 있습니다만......그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 말입니다."
"하하. 물론 지금은 많이 유해지셨지만, 원래는 정말 무서우신 분이셨습니다. 호통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아.....신의 천벌이구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빈센트 기사단장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건 알겠습니다만, 그것과 지금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하인트 주교님께선 오랜 기간 후계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후계를 만났는데......제 생각엔 아마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고르신 것 같더군요."
"......확실히 불같긴 하더군요."
"그것도 전성기 시절 하인트 주교님에 비하면 로한 경도 많이 온순하신 편이지요."
"그, 그 정도입니까?"
"당시 하인트 주교님을 만났다면, 아마 빈센트 기사단장님도 저와 같은 의견일 겁니다."
"......"
제프론은 정리를 슬슬 마무리하고 있었다.
"사실 실제로 딱히 이단 심문관 사이에 상하 구별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외부에서 모르는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렇습니까?"
"제 선대이신 마이어스 추기경께서 이어오신 계보 역시 결코 힘이 없는 세력은 아닙니다만......그래도 로한 경의 계보에 비하자면 모자라지요."
"로한 경의 계보가, 어떻길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초대 교황의 검, 아십니까?"
"......!"
단 여섯 글자.
그 여섯 글자가 주는 무게감은, 흑철 기사단장 빈센트조차 얼어붙게 만들었다.
"설마 그럼......"
"예. 알고 계시는 그분입니다."
"하, 하하......"
"보통 그 계보를 따르는 이들은, 비슷한 성격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
"그러니 끝까지 집중하십시다. 내일이 되면 이 모든 자료를 로한 경께서 직접 확인할 겁니다. 저는 책 잡히고 싶지는 않군요."
"한데, 이 정보로 뭔가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저희가 여기 매달린 지 벌써 반년째이지 않습니까. 이 정보들로 저희도 여태껏 추적을 했지만, 그럼에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는데......"
"글쎄요. 저도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왠지 로한 경이라면 뭔가 해낼 것 같습니다. 단지 감이지만."
"그렇......습니까?"
"아마도, 라고 생각 중입니다. 하하하."
제프론은 짧게 웃고는, 한숨과 함께 뒷말을 이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예. 말씀하십시오."
"정말 만약에. 이 답도 없는, 미궁 같은 사건을 로한 경께서 해결해 내신다면......"
"그게 쉽겠습니까?"
빈센트 기사단장은,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하나 이상하게도 제프론은 로한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래도 만약, 로한 경께서 답을 낸다면. 저는 그분을 존경해마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저도 존경은 하겠지요."
빈센트 기사단장은 웃어넘겼지만.
사실 제프론의 심정은 조금 달랐다.
'교황님보다 더 존경하게 될 거라는 말은, 차마 쉽게 내뱉기 힘들군요.'
하지만 제프론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빈센트 기사단장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었다.
"자, 자. 얼른 마무리 지읍시다."
"예, 이단 심문관님."
그들은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나는 약속대로 다음 날, 제프론을 찾아갔다.
"악마에 대한 내용은 이게 전부인가?"
"예. 애석하게도 꽤나 용의주도한 녀석인 듯싶습니다. 일단은 귀족들 사이에서 요사스러운 소문이 돌고 있는 게 첫 번째입니다. 어떤 방면이든 원하는 능력을 키워준다고 하는데......원인이 파악되질 않는군요. 악마의 힘이 아닌가 추측 중에 있습니다."
묘지기가 말했던, 잠재력을 풀어주고 영혼을 뺏어가는 그 계약서를 말하는 건가?
"그리고 두 번째는 역시 최근 망령이 나타난다는 보고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여러 묘지들에서 계속 관측이 되는 것 같은데. 일단은 이건 후순위로 밀려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첫 번째......"
나는 제프론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귀족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한쪽 구석으로 싸악 치웠다.
"첫 번째 건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예?"
"두 번째 놈이 원흉이다."
"그, 그걸 어떻게......"
옆에서 듣던 빈센트 기사단장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반년을 추적한 건데.......하루 만에?......"
제프론은 고개를 들이밀며 물어왔다.
"어찌 알아내신 겁니까?"
"묘지기에게 물었다."
"묘지기라면......어제 그......."
"맞다."
"그걸......순순히 말을 했습니까?"
나는 눈동자만 스윽 치켜 올려 대답했다.
"제깟 놈이 감히? 말 안 하면?"
"그, 그렇지요?......"
"한데, 그자가 악마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사실 그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저희가 놈의 꼬리를 잡는데 들인 시간만 거의 두 달은 족히 들어서 말입니다.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앞으로......"
"그냥 딱 보고 알았다."
"......"
말을 하던 제프론이, 그대로 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딱 보고 알았느냐는 표정인데.
나도 설명해 줄 방법이 없었다.
그냥 악마의 냄새가 났는데 어찌 악마인 걸 알아냈느냐 물으면 그냥 악마의 냄새가 나서 악마라 생각한 것인데......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할까.
"......대단하시군요."
"두 번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아, 예. 그러시죠. 이쪽에 일단 성기사들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여러 영혼들이 뒤섞인 이상한 망령이 돌아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음?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빼박 호라이크던이네. 굳이 묘지기 놈한테 듣지 않았어도 알아냈겠어.'
하지만 제프론과 빈센트 기사단장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잇는 얼굴이었다.
"은으로 된 무기를 준비시켜라. 은제 검. 은 가루."
"혹시, 지금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신 겁니까?"
헤매고 있는 것 같으니, 나는 바로 답을 알려주었다.
"호라이크던. 고위 리치다."
"......이, 이것만으로 알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것 외에 더 필요한 게 있나?"
내 말에, 제프론과 빈센트 기사단장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잠시 조용히 있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제프론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자기네들끼리 무슨 소리를 속닥속닥 거렸다.
"제 말이 맞았군요. 빈센트 기사단장."
"하, 하하......그러게 말입니다. 진짜 해낼 줄이야......"
제프론은 나를 돌아보며 물어왔다.
"은제 검, 은 가루탄으로 병력을 무장시키겠습니다. 경께서는 특별히 필요한 장비가 있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호라이크던을 상대할 힘은, 이미 충분했으니까.
대충 팔에 번개를 살짝 두르며 보여주는 걸로 납득을 시키기로 했다.
파지지직!
"필요 없다."
제프론이 나를 엄청나게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역시......교황의 검......!"
음?
'교황의 검은 또 뭐래? 그나저나 눈빛 되게 부담스럽네......'
사람 마음이란, 참 알기 어려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