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당장 검을 거두어라
악의 영혼조차 녹여버리는 창이라.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화염 속성이 들어간 건가 정도였는데.'
물론 황금의 창은 내 유일한 원거리 공격 수단이었던지라, 만족스럽기는 했었다.
다만 그 이름값에 비해서는 조금 성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느끼는 중이었다.
'보통 클래스도 아니고 신화 클래스 전용인데 말이야.'
그래.
신화 클래스.
원작에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딱 들어도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명칭이지 않는가.
그런데 황금의 창은 그 이름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물론 내 마음대로 소멸도 되고 생성도 되고. 거기다가 상대는 잡을 수도 없고."
좋긴 좋지.
좋긴 좋은데......아.
딱 2퍼센트 모자란 느낌.
그래서 뭔가 불만이 속 안에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막상 망령형 언데드와 맞닥뜨릴 상황에 닥치니.
이게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닌듯싶었다.
'생각이 짧았어. 원작에서도 망령형 몬스터에게 직접 데미지를 입히는 스킬은 드물어서, 생각도 못 했네.'
만약 내 생각대로 황금의 창이 정말 망령형 몬스터에게 카운터를 날릴 수 있는 스킬이라면?
'이건 진짜 물건일지도 모른다!'
속으로 감탄을 하는 동안.
레바르센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묘지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분명히 정신 지배 흑마법을 쓸 수 있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무슨 대답을 해주길 기다리는 건가?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쓸 수 있는 것 같더군."
분명히 그 뜨뜻미지근한 기운.
아마 그게 상대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흑마법인 것 같았다.
느낌적인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감지되었으니까.
그런데, 사실대로 말을 해줬는데도 레바르센은 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쓸 수......있다고?"
"그래. 마법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
"왜?"
"아니. 앞뒤가 안 맞지 않아? 놈이 흑마법을 썼다면서?"
"그렇다고 조금 전에도 대답한 것 같은데?"
"근데 왜 안 걸렸냐고. 당신은."
"안 통하니까. 나한테는"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정확하게 설명을 해줬음에도 레바르센은 입을 뻐금거렸다.
"......아니......그게 왜 안 통하느냐고요......"
뭐,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싶었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설 뿐이었다.
* * *
레바르센의 주도로, 우리는 이 제단이 있는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딱히 건질만한 것은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꼼꼼한 놈들이네. 꼬리가 잡히질 않아."
답답한지 레바르센조차도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동감하는 바였다.
이렇게 털어도 나오는 게 없을 줄이야.
"일단 올라가지. 여기선 더 얻을 게 없다."
"그래. 그러자고."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묘지기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잠깐."
거의 출구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기척을 감지하고, 레바르센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데?"
"밖에 누군가 있다. 숫자가 적지 않군."
"밖에? 설마......악마 군단인가?"
나도 그런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워봤지만.
그건 아닌듯했다.
아무런 악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마는 아니다."
"그럼......뭐지?"
레바르센의 표정이 나와 마찬가지로 굳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낼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결국 나가서 직접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미리 대책을 세워두는 것밖에 없었다.
여긴 길이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상황을 보고, 공격을 받으면 즉시 둘로 갈라지도록 하지."
"그게 좋겠어. 그렇게 하자고. 공격이 시작되면, 내가 선두로 나가서 시선을 끌게."
"부탁하지."
둘로 쪼개지면 쫓아오는 적도 반으로 줄게 될 터.
레바르센이 먼저 나갈 테니, 그럼 실질적으로는 그녀에게 더 많은 추적자가 붙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레바르센이라면 잘 빠져나가겠지 싶었다.
그녀가 누구던가.
'스토리대로 쭉 진행되면, 최강의 암살자가 될 사람이니까.'
그녀의 고유 스킬은 존재감 자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고유 스킬 : 감지 방해]
상대의 감각에 혼란을 주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게 만드는, 도적 클래스의 고유 스킬이었다.
원작에서는 주로 암살 공격을 하는 데에 사용이 되었는데, 존재감을 지우고 뒤를 급습해 치명타를 먹이고 전투를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정말 딱 도적이라는 클래스에 적합한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나도 한 번 당해봤지.'
레제타의 지하 감옥에서 말이다.
'생명에 직접 위협이 되는 공격은 아니라, 제3의 눈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3의 눈이 있는 나조차 다른 곳에 신경을 쓰면, 놓칠 정도였다.
그러니 보통의 사람들을 상대로 쓴다면, 어둠 속에서는 거의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다 보는 게 옳았다.
심지어 그 상대가, 꽤 예민한 능력자일지라도 효과는 있었다.
때문에 레바르센이 선두로 나서서 먼저 어그로를 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걱정이지.
'그래도 일단 창을 던져 놓고, 왼팔로 어떻게든 길을 뚫으면......'
되긴 되지 않을까.
각오를 다지고.
우리는 천천히 출구를 향했다.
* * *
밖은 이미 해가 완전히 사라져, 어둠에 잠식이 된 상태였다.
저벅.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
내 뒤로는 곧장 레바르센이 달라붙어 있었다.
여차하면 먼저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천천히 상황을 살폈다.
창문 바깥으로 횃불들이 불을 비추고 있었다.
'숫자가......생각보다 더 많은데?'
그것 외에도 횃불을 보고 몇 가지 간단한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일단 처음 느꼈던 대로, 악마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짐승이나 몬스터가 횃불을 들고 있을 리는 없으니.
'인간......인가?'
나는 숨겨진 문에서 빠져나와, 슬쩍 바깥을 살폈다.
아직 실내까지 진입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내 신호에 따라, 레바르센도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때.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묘지기 몬터스는 당장 밖으로 나와 흑철 기사단의 명에 따르라!"
흑철 기사단?
저들의 이름이 흑철 기사단인가?
레바르센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반응을 했다.
"흑철 놈들이라고? 이거 골치인데......"
"아는 자들인가?"
"알다마다. 설마, 흑철 기사단 몰라?"
"모른다."
전혀 기억에 없었다.
세인트 발라트는, 원작에서는 이미 폐허가 된 곳이었다.
생존자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해서 나는 잠자코 그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검은 갑옷을 입고 다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자비가 없기로 더 유명한 놈들이야. 솔레온 백작의 직속 부대지. 솔레온 백작의 말이라면 지옥불에도 뛰어들 놈들인데......묘지기 놈을 잡으러 온 것 같네."
"그럼 우리랑 상관없는 것 아닌가? 조금만 조사해보면, 다 알게 될 텐데."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니까 걱정하는 거야. 저놈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없는 죄도 만드는 놈들이라서 말이지. 공격하지 않는 걸 보니, 묘지기를 생포할 생각인가 본데, 우리가 죽여버렸잖아."
없는 죄를 만들다니.
"......그건 좀 골치군."
레바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의 무슨......이단 심문관급의 성직자나 일곱 기사단쯤 되는 인물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무죄다, 라고 말해주지 않는 한 소용 없을 거야."
음?
이단 심문관 말은 통하는 건가?
그러면 너무 쉬운데?
레바르센은 신발을 고쳐 신으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 플랜대로 가자고. 내가 먼저 시선을 끌 테니, 각자 알아서 도주하기. 문제없지?"
잠깐 생각을 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첫 번째 플랜은 폐기다."
"......? 갑자기 또 왜?"
"정면 돌파한다."
"흑철 기사단, 그리 만만한 놈들 아니야. 그리고 괜한 사상자 낼 필요 뭐 있어? 그냥 탈출하는 걸로......"
나는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정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내가 이단 심문관이랑 좀 친분이 있거든."
"......뭐?......대체 너 정체가......"
레바르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콰앙!
흑철 기사단이 들이닥쳤다.
"투항하라! 무기를 모두 버리고, 얌전히 바닥에 엎드려!"
창! 차차창!
세기도 힘들 정도의 많은 칼날들이 내게 겨누어졌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아를렘 교단의 성스러운 이단 심문관, 로한이다. 당장 검을 거두어라!"
* * *
나의 외침에, 기사들이 주춤주춤 당황을 했다.
"이단 심문관이라고 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뭐,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하지만 무기를 바로 내리진 않았다.
뭐,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상한 놈이 하나 튀어나와서, 자기가 이단 심문관이라는데 어떻게 바로 믿겠나.
믿는 놈이 더 이상한 거지.
내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또 앞으로 나섰다.
"그쪽이, 이단 심문관이시라고?"
나는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이번에는 나도 아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반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적발의 머리칼을 뒤로 바짝 넘긴 성직자.
"이거 놀랍군요. 본인은 제프론. 이곳 발트라스 왕국의 수도, 올드리온의 이단 심문관이오."
스스로 추락한 천사이자, 천계 최상위권의 무력을 가진 가우리엘조차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사상 최악의 이단 심문관의 등장이었다.
그는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혼자......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레바르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나서 바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엄청 빠르네.'
괜히 그녀에 대해 설명하긴 귀찮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다."
"그렇군요. 혹 증표는 있습니까?"
나는 품에서 이단 심문관의 자격을 증명하는 인장을 꺼내어 보였다.
약간 암행어사의 느낌으로.
그걸 확인한 제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포레오 대교구라. 한동안 그쪽에서 지지하는 이단 심문관이 없었는데......귀하가 그 자리를 차지하신 분이시군요."
한데.
내 인장을 자세히 살펴보던 제프론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하, 하인트 주교님의 서임을 받으셨다고?......"
뭐지?
시포레오에서는 별 반응이 없던 그가, 하인트 주교의 이름에 크게 당황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하인트 주교를 알고 있나?
제프론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하인트 교주와 연결고리가 있다는 건 모르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맞는 말이긴 하니까, 나는 긍정하였다.
그러자.
"실례가 많았습니다. 경!"
놀랍게도 그 공포스러운 제프론의 태도가 갑자기 깍듯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