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주둥이 다물어라
나와 레바르센은, 오두막의 안에 숨겨져 있던 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을 넘어서자 긴 복도가 우리를 맞이했다.
'이거, 여기선 적이랑 마주치면 꼼짝없이 전면전이겠네.'
한 명이 겨우 드나들 법한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히도 어느 정도 들어가자, 다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런데......
"지하......묘지?"
이곳은 마치 고대 로마의 카타콤과 비슷한 형태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지하 무덤.
묘지 아래에 또 묘지가 있다니.
도대체 이 장소에 얼마나 많은 유골이 모여 있단 말인가.
레바르센 역시 이런 곳이 존재하는 건 몰랐던 모양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는 말문이 턱 막힌 탓에 아무런 대화 없이 천천히 전진할 뿐이었다.
유적지와 같은 형태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장관 같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서 든 생각은, 도대체 이런 곳에서 뭘 꾸미고 있다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었다.
'이거 만약......언데드 군단이라도 일으킨다면......'
상상을 하던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의 물량이라면 웬만한 국가 하나쯤은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게임에서 보는 스켈레톤 언데드 군단은, 트레일러의 한 파트의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적에 불과했다.
중후반부 시점에서 등장해, 엄청난 대군으로 밀어붙이지만.
플레이어를 비롯한 중간계 최강자 연합군에 패퇴를 당하고, 유저에게는 스킬을 마구 난사하며 쓸어버릴 수 있는 반쯤 허수아비 같은 놈들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일 때의 이야기이고.
눈앞에 실제로 그 군단이 될 재료들이 들어오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원작에서도 결국 막아내기는 하지만 남은 도시는 폐허가 되고 끝이 났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승리를 해도 남는 게 한 줌 잿더미뿐인.
더불어.
내 예상대로 원작에서 저지 못 했던 세인트 트라발의 '놈들'이 바로 지금 저들이라면......
'여기서 한 번 시간을 벌 수도 있겠지.'
2년 반 남짓 남은 시간.
거기에 여유를 약간 부여할 수도 있을 터였다.
악마 아포칼립스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보다는, 멀쩡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일이 커지기 전에 막는 것.
그것이 지금 나의 목표였다.
* * *
"로한......님?"
한편.
숙소를 잡고 돌아온 디아즈는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로한과 레바르센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신 거지?"
어디 가 있겠다고 말을 해줬던가?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나만 빼놓고 어딜 간 거야?......'
그녀는 서운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예쁘게 가라앉은 노을.
아름다운 전경.
그리고 사방의 연인들.
'서, 설마......아니겠지?'
그녀는 주먹을 꼬옥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길라드를 떠나기 직전 로메인이 해준 주의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얼굴도 아름다운 편인데 행동도 시원시원한 여인이구만. 딱 보여. 여우겠어, 여우. 방심하면, 낚여채인다? 하하!]
왜 지금 그 말이 떠오른 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걸까?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에 당혹스러운 그녀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발을 옮겼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로, 로한 님? 로한 니이임!"
* * *
지하 묘지는 마치 미로와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자칫했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일 정도로.
그도 그럴게.
내부는 더럽게 어두운 환경이면서도 또 거의 비슷비슷하게 생긴 길들이 사방으로 뻗어져 있는 형태였다.
지금은 분명 전진을 하고 있는데도 조금 전 본 길을 또 걷고 있다고 착각이 들 만큼.
그럼에도 레바르센은 날카로운 특유의 감과 방향 감각으로 길을 찾아내고 있었다.
몇 번 정도 같은 곳을 돌기는 하고, 막다른 길에 닿기도 했지만......
"음. 이 패턴이라면......이번에는 이쪽이야."
그녀의 정확도는 몇 번의 실패를 거치며 엄청난 속도로 정확도를 높여가는 중이었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절대 해내지 못할 속도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의 길잡이 방향은 옳은 방향이었다.
'점점 냄새가 강해진다......!'
나 역시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으니.
확실히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 걷는 것만으로, 악마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갈림길을 헤쳐나가기를 몇 시간.
우리는 이 카타콤의 가장 중심부에 들어섰다.
그런데 놀랍게도......그곳은 지하라고 믿기 힘들 만큼의 넓은 지형이 존재했다.
"우와......"
레바르센 역시 꽤 놀랐는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공간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해골.
그것은 다름 아닌, 거인의 것이었다.
'엄청 크네......'
가까이서 마주했었던 미노타우로스도 꽤나 컸는데......
저 거인의 유골은 그 미노타우로스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사이즈였다.
'대체 여긴 뭐야?......'
그냥 지하 무덤은 아닌 건가?
이곳은 나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원작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지역이었고.
게임에서 한 번 본 곳도 현실로 마주하면 기분이 묘한데.
원작에서조차 본 적 없던 곳을 직접 현실로 먼저 마주하니 그 웅장함에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관광을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우린 놀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시선을 떼고, 길을 살폈다.
여기에도 우리가 쫓던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데, 여기서부터는 레바르센도 꽤나 당황을 했다.
"길이 너무 많은데......"
동서남북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펼쳐져 있었던 까닭이었다.
다만, 다행히 악마의 냄새가 가까워진 덕분에.
오히려 내가 길을 찾아내었다.
"이쪽이다."
"......"
"못 믿겠나?"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신기해서. 여러모로."
"다 신기했으면, 출발하지."
"아, 응."
새로 진입한 길은 다른 갈래가 없는 외길이었다.
때문에 거기서부터는 길을 찾아 헤맬 일은 없었다.
쭈욱 전진을 한 끝에......
"잠깐."
내가 레바르센을 멈춰 세웠다.
멀리서부터 작은 목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레바르센 역시 귀를 쫑긋 세우더니 들은 모양이었다.
끄덕.
그녀는 말없이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우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목소리의 방향으로 다가갔다.
* * *
길의 끝.
그곳에는, 사방에 깔린 촛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알 수 없는 단상이 하나 펼쳐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각종 짐승들의 잘린 머리들이 한가득 있었다.
돼지, 사슴, 염소......
누가보더라도 제정신인 사람이 만든 것 같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제단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는 자가 있었다.
레바르센이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묘지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이해했다는 걸 알렸다.
그런데......
'한 놈은 어디 갔지?'
원래 내가 쫓았던 것은 묘지기가 아니라,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한데 그놈이 보이질 않았다.
놈을 찾으려 눈을 돌리던 그때.
묘지기가 입을 열었다.
"거기. 초대한 적 없는 손님들. 내 얘기를 좀 들어주겠나?"
우리가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굳이 더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앞으로 나서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들어야 할 것이, 그대의 유언인가?"
"유언이라......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걸까?"
"악마의 힘에 손을 댄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다."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아를렘 교단의 이단 심문관으로서."
이단 심문관이라는 말을 듣자.
묘지기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단 심문관이라......이단 심문관이라......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들이셨구만, 그래."
그는 꿇었던 무릎을 세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저 선량한 시민일 뿐일세. 묘지기를 한다고 해서 악마는 아니란 말이지."
"그건 내가 밝혀내면 될 일이니 신경 꺼라."
"이것 참. 막무가내로구만. 뭐, 놀랍지도 않아. 자네 같은 사람이 처음은 아니라서 말일세."
"......"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저놈이 악마와 계약을 한 인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뜻일까?
"별 시답잖은 이유를 들이밀며 나를 악마로 몰아간 자들이 꽤 있었어. 근데......"
갑자기 묘지기의 눈빛이 싸악 변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그 놈들 다 없어졌어."
놈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걸렸다.
"왠줄 알아? 하도 나보고 자꾸 악마다, 악마다 그러니까 사람 돌겠더라고. 그래서 진짜 악마가 되었거든! 크하하하하!"
묘지기는 광소를 터트리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악마가 되니 편하더군! 이런 능력도 생겼지 뭐야?"
그가 팔을 부웅 휘두르자.
사방에서 이상한 나무 덩굴 같은 것들이 내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을 휘감았다.
레바르센 역시 똑같은 꼴이 되었다.
"크윽!"
꽈아아악!
꽤 단단한 나무뿌리였다.
마법이라도 건 걸까?
내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묘지기가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아까 내가 말했지? 나를 악마로 몰던 놈들. 지금은 다 없어졌다고. 왜 그런지 알려줄까? 내가 놈들의 정신을 조물조물 주물러서 박살을 내놨거든! 크하하하하! 사람 꼭두각시 만드는 게 엄청 재밌단 말이야? 너도 내 꼭두각시로 만들어 줄게. 이단 심문관 꼭두각시라니! 너무 좋잖아!"
그리고 내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앞의 놈은 독을 품고 폭발하더니......이번에는 정신 조종인가? 가지가지 하는군.'
걱정은 없었다.
다만 내 속내를 모르고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레바르센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로하아아안!"
무언가 뜨뜻미지근한 기운이 머리를 스치는 것 같았다.
나는 잠깐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레바르센은 절망하였고.
"아......!"
묘지기는 환호성을 질렀다.
"워후! 됐다! 크하하하하! 교단에 들어갈 수 있는 심복이라니! 하하하하! 이름이 로한인가? 그래, 로한. 고개를 들어보라!"
나는 그 신호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
"크흐흐흐. 좋아, 최고야! 이제부터 내가 네 주인님이시다! 크하하하하"
그는 이제 안심을 하고는 바로 내 코앞에 섰다.
그리고는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렸다.
"일단 첫 번째 명령은......그래. 저 옆에 있는 여인을 죽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고."
나는 고개를 뒤로 훅 젖혔다.
그 뜬금없는 행동에 묘지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리고는 놈이 반응할 새도 없이 힘껏 머리를 당겨 박치기를 날렸다.
빠아아아악!
"커헉!"
묘지기는 당황한 얼굴로 코를 붙잡았다.
놈의 손가락 사이로 코피가 흘러나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애석하게도 나에겐 그따위 정신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입 냄새 난다. 주둥이 다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