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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35화 (35/194)

35화. 직업을 잘못 고른 거 같은데

세인트 트라발은 생각보다 큰 도시였다.

앞서 방문했던 곳들이 작은 도시이거나 혹은 빈민가였던 탓인지 더욱 크게 느껴진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레바르센을 통해서, 지금 세인트 트라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레바르센과 나는 적당한 곳에서 여행자인 척 음료로 목을 축이며 앉아 있었다.

"얼마 전, 결사대의 연락책으로부터 정보 하나가 들어왔어. 세인트 트라발의 상류층에서 악마의 물건이 나돈다는 얘기였지."

"악마의 물건?"

"정확히 어떤 형태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드러났는데, 무력을 강화하거나 머리가 급격히 좋아진다거나. 혹하기 좋은 효과를 가졌다는 거였지."

"원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겠군."

"맞아. 수요가 많은 게 오히려 더 문제였어. 그래서 추적이 난항에 빠졌지. 이 발트라스 왕국은 완전히 능력 우선 주의인 게 컸어. 약하면 도태되고, 멍청하면 잡아먹히는 그런 도시 말이야."

그 경쟁적인 풍조 덕분에 발트라스 왕국이 크게 발전한 거라고 하긴 했다.

실제로 연금술사들 역시도 발트라스 왕국만큼 발전한 국가를 찾기도 어려웠고.

그러나 언제나 부작용은 있는 법.

강한 경쟁 사회였기에,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항상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악마의 힘이 쉽게 퍼진 모양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남들보다 우월해지려는 자들이 많은 거지. 그게 얼마나 큰 위험인지도 모른 채 말이야."

나는 레바르센의 말을 들으며 세인트 트라발을 둘러보았다.

겉으로는 다른 도시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으나,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도시 아래 깔린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 의문의 물건을 추적하기 시작했었어. 형체도 모르고, 정확히 어떤 힘이 있는지도 모르니 막막했는데, 우연찮게 모덴 자작이라는 이름을 알아내게 되었어. 세인트 트라발에서는 더 이상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어서 나는 오리턴으로 향한 거야."

"그리고 붙잡혔나?"

"뭐, 잡혔다기보단 일부러 들어간 거지. 다만 생각보다 지하 감옥이 잘 만들어져서 당황하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그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거구나.

약간의 의문점이 해소가 되었다.

"그래도 아예 소득이 없진 않았어. 이런 걸 찾아냈거든."

레바르센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어 보였다.

"놈들의 힘이, 세뇌와 비슷하다는 정보를 얻었어. 아마 세뇌를 시켜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마법인 모양이더라고."

그런데 그게 묘하게 눈에 익었다.

나는 레바르센이 설명을 하는 와중에도, 그 서신에 눈을 고정시킨 채였다.

'저거......분명히 어디서 봤는데......아!'

나 역시 품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었다.

놀랍게도 두 서신의 봉투 형태가 완벽히 똑같았던 것이다.

레바르센 역시 그걸 깨달았는지, 표정이 예사롭지 않게 변하며 내게 물었다.

"똑같잖아? 이건......어디서 찾은 거야?"

"길라드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수상한 놈을 잡았다. 그놈에게서 찾아낸 것이다."

"수상한 놈? 그럼 그놈은?"

"죽었다. 사로잡히기 직전에 혼자 가루로 변해버리더군."

"음. 뭔지 알겠어. 나도 그런 비슷한 걸 본 적이 있거든."

내 편지를 받아든 레바르센은 그걸 유심히 살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나?"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사 중이었어. 여기서 막힌 거지. 이 편지지의 주인을 찾던 와중에 습격을 당한 거고. 해서 도망친 거야. 길라드로. 길라드는 일단 숨으면 찾기 힘들거든."

"날 찾아온 게 아니었군."

레바르센이 긍정을 했다.

"당신이 거기 있다는 걸 알고는 있긴 했지만......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니까?"

하긴.

날 믿고 찾아왔다면, 처음 대화를 나눌 때 그렇게 의심을 했을 리가 없겠지.

아마도 레바르센은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그 집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음, 가만. 그럼 원래의 스토리대로 흘러갔단 건가?'

내가 없었어도 레바르센은 로메인의 집에 몸을 숨겼고.

아마도 로메인은 포션을 써서 그녀를 살렸겠지.

어차피 그 포션은 레바르센에게 사용될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만 그 은혜를 베푼 게 로메인이 아니라 내가 된 것뿐이네.'

그러면 오히려 이득이긴 했다.

원래 그녀에게 쓰였을 포션 쓰고, 호감은 내가 얻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던 때.

레바르센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누군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말한 게 바로 저자야. 서신의 출처를 캐내기 위해 저놈을 쫓던 와중에 갑자기 습격을 당했어."

나 역시 티를 내지 않고 눈동자만 살짝 돌렸다.

그런데 아마 레바르센이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도 알아차렸을 것 같긴 했다.

"악마의 하수인이 맞군."

냄새가 남달랐기에, 쉽게 알아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레바르센은 깜짝 놀랐다.

"역시 맞는 건가......아니, 근데. 왜 아는 건데?"

나는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련이 부족하군. 잡담은 이쯤하고, 일단 놈부터 쫓아가 보자고."

레바르센이 멍한 얼굴로 따라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수련으로 그게......가능하다고? 그냥 얼굴만 보고 알아내는 게?......"

* * *

어느덧 해는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그 디아즈라는 친구에게 알리지 않아도 괜찮아?"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디아즈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숙소를 구한다고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불러올 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딱히 걱정할 건 없었다.

"그녀도 충분히 실력자다."

"흠. 신뢰가 대단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디아즈보다는 우리 쪽이 더 위험한 상황이지."

"그건 그래. 게다가 지금 너무 대책 없이 쫓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이러다가 매복 당했다고 아까 말하지 않았었나?"

레바르센의 걱정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나는 제3의 눈에 온 전력을 집중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딱히 내 레이더망에 걸리는 움직임은 없었다.

게다가 악마라면 그전에 냄새도 날 테고.

"아직까지는 매복은 없군."

"으음. 그새 내가 돌아왔을 거라고는 예상 못 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만큼 레바르센의 상처는 깊긴 했으니까.

덕분에 우리는 조용히 놈의 뒤를 잘 밟을 수 있었다.

그렇게 따라서 따라서 도착한 곳은......

"묘지?"

여기저기를 빙빙 돌더니 결국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큰 규모의 공동묘지였다.

나는 레바르센을 쳐다보았다.

하나 그녀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도 여기까지 쫓아 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

우리는 별수 없이 조금 뒤를 밟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하수인은 계속해서 깊게 들어갔다.

그 끝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자그마한 오두막이었다.

레바르센이 내게 알려주었다.

"저긴......묘지기의 거처인데......"

"뭔가 짚이는 게 있나?"

"아니. 실은, 저 묘지기. 다른 곳에서 살인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 증거가 없어서 풀려나고 이곳에서 묘지기를 한다는 정보가 있긴 했는데......"

악마의 하수인을 뒤쫓아 오니 나온 게, 살인마 묘지기라......

뭔가 낌새가 이상하긴 했다.

"조금 더 접근해 봐야겠군."

"음."

숨을 죽이고 천천히 그 오두막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점차 가까워질수록 신경이 곤두섰다.

마침내 우리는 그 오두막의 창 아래에 몸을 딱 붙였다.

나는 내부로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 것 같긴 한데......자세히 들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저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그때.

고요......

갑자기 모든 소리가 일순간 사라졌다.

레바르센 역시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내부를 살폈다.

그런데, 정말로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내 얼굴을 살피던 레바르센 역시 머리를 들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당연히 그녀의 눈에도 누가 보일 리는 없었다.

여기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금은 물러설지.

아니면 내부로 아예 들어가 보던지.

딱히 준비를 하지 않고 왔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무기는 잘 챙겨 온 상태긴 했다.

굳이 따지자면 디아즈가 없는 정도?

'두 놈이면......디아즈가 없어도 막을 수 있긴 하겠지.'

대신 지금 내 옆에는 레바르센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물러설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잘 막으면......대침공이 미뤄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상하리만치 확신이 들었다.

제3의 눈이 만들어 주는 감일까?

잘 모르겠다만, 지금 이 타이밍을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빠질 거면 지금 빠져라. 나는 들어갈 생각이다."

* * *

끼이익.

나는 조심히 문을 열고 오두막 내부로 들어섰다.

그런 나의 뒤로 레바르센이 따라 들어왔다.

내가 들어갈 거라는 말을 들은 레바르센은, 그 말이 안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며 미소를 지었었다.

그렇게 실내로 발을 들인 우리는.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기척도 없네. 우리가 들어온 저 문 말고는 다른 문도 없는데."

창문마저도 조금 전 나와 레바르센이 있던 그곳이 유일했다.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답은 이 안에 있을 터였다.

사실 나는 어디서부터 뒤져봐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레바르센의 클래스는 도적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눈빛부터가 벌써 달랐다.

전문 분야에서 활약을 하는 모습은 역시 멋짐이 폭발하는 건가.

'하필 그게 도둑질이라 문제긴 한데......'

도둑질 보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줄이야.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이 참 찰떡같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그냥 날도둑질이 아니라, 어딘가의 천사 소녀처럼 좋은 일 하자고 하는 거니까.'

레바르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때.

그녀가 등을 보인 채로 물어왔다.

"왜? 뭐 할 말 있어?"

......대단하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건가?

어떻게 알았지?

제3의 눈이 아니라면, 순수 감각만으로는 아마 절대 레바르센을 따라가진 못했겠다 싶었다.

괜히 뻘쭘해진 나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충 훑어보던 내 시야에, 뭔가 이상한 게 하나 들어왔다.

'이거......영화같은데서 많이 봤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탠드형 옷걸이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레바르센을 불렀다.

"여기. 좀 이상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내 목소리에, 그녀가 슬쩍 돌아봤다.

"뭐 좀 찾았어?"

레바르센이 내게 다가왔고.

나는, 스탠드형 옷걸이를 가리켰다.

"여기. 좀 이상하지 않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내 물음에 레바르센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나는 이해하질 못한듯한 표정이었다.

"이 가지에만 유독 칠이 벗겨진 것 같아서 말이지."

나는 그 가지를 슬쩍 잡아당겼다.

그러자 다음 순간.

덜컹! 드드드......

지금까지는 없던 문이, 벽에 나타난 것이다.

그 광경을 본 레바르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는 꽤나 놀랐는지, 나와 숨겨진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고른 거 같은데......성기사가 아니라 도적이 더......"

"뭐라고?"

"아, 아냐. 못 들었으면 말고."

"싱겁기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새로이 생긴 문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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