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진짜 이렇게 생겼네
쿠우우우웅......!
미노타우로스가 힘없이 넘어지고.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고유 스킬이 만들어 준 본능에 의존해 싸워온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의 전투는 달랐다.
내가 계산한 대로 움직였고, 내가 상상한 대로 해낸 것이었다.
상대가 악마가 아님에도.
오히려 상대가 악마가 아니었던 게 더 도움이 된 느낌이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악마였다면......
'로메인과의 경험에서 얻은 이 감각을 잃었을지도 모르겠군.'
이제야 조금 과도한 흥분을 조절하며 전투에 임하는 법을 배운 것만 같았다.
나도 성장을 한 모양이었다.
'가끔은 가벼운 대련 정도는 받아 줄 만하겠는데?'
이제야 왜 그렇게 다른 이들이 대련에 눈을 번뜩이는지, 미약하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간에 열심히 신화급 괴수를 쓰러뜨렸으니.
'보상은 챙겨야지!'
나는 쓰러진 미노타우로스를 지나, 자그마한 나무 상자 앞으로 향했다.
그것은 딱 상상 속의 보물 상자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실제로 봐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진짜 이렇게 생겼네......'
나는 그 앞에 서서, 자물쇠를 검으로 스윽 그었다.
챙그랑.
바닥에 녹슨 자물쇠가 떨어지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화아아악!
상자 안에서부터 밝은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여태 지하에 있어서 그런지 빛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강렬한 빛에, 손으로 빛을 슬쩍 가리고 눈을 찌푸리며 그 안을 쳐다보았다.
그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작은 보석 하나.
나는 그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일반 스킬 : 마나 버닝 (격투가 클래스 전용) - 남은 마나를 모조리 태워, 마법으로 인한 비물리적 정신 공격(디버프)으로부터 벗어난다.]
* * *
이름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듯.
격투가는 일반 공격 위주 물리 데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초근접 전투 클래스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몇 가지 단점이 존재했는데.
이름 값을 한다고 원거리 공격 수단이 전무한 게 첫 번째였고.
접근하기 직전까지 발생하는 엄청난 딜로스와 일방적인 피해가 그 두 번째 단점이었다.
그런데 후반부에 등장하는 악마나 신화급 괴수들은, 가면 갈수록 강력한 CC기를 들고 등장하는 게 문제였다.
'기껏 달라붙었는데 공포나 실명 같은 디버프에 걸리면 개노답이었지.'
특히 실명 쪽은 진짜 격투가에게 치명적이었다.
평타 기반의 클래스이다 보니 실명에 걸렸다 하면 아주 그냥 죽을 때까지 한 대도 못 때리는 상황까지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마나 버닝 스킬은, 그런 격투가에게 있어서 가뭄의 단비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스킬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차피 거의 필요 없는 마나를 써서 일순간 디버프를 풀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말이 주저리주저리 길지만, 어쨌든 간단하게 보자면 결국 비물리 계열 CC 면역기로 보면 간단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지금의 나에게도 매우 유용하였다.
'일단 지금 내가 가진 것들과는 전혀 중복되지 않기도 하고.'
그 점만으로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정신 계열 방어 수단이다?
이건 정말 너무나도 꿀맛 같은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언젠가는 결국 정신 계열 마법을 쓰는 놈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때를 위한 대비책으로는 이만한 게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파밍을 마치고.
다시 돌아보니.
디아즈가 바닥에 널브러진 미노타우로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대단......하시네요......"
* * *
나와 디아즈는 미궁에서 빠져나온 후 일단은 길라드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가벼운 재정비 이후, 인사를 나누고 다음 목적지인 연금술사가 있는 세인트 트라발로 향하기 위해.
우리 둘이 돌아왔을 때.
길라드의 사람들은 매우 불안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로메인은 우리가 돌아오자마자,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했다.
"조금 전, 심상치 않은 지진이 있었다. 무언가 끔찍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느껴졌는데......아무래도 위험할 수도 있으니 얼른 이곳을 떠나거라."
뉘앙스를 보아하니, 지하 미궁에서 내가 미노타우로스와 싸울 때 발생한 여파를 느낀 모양이었다.
저렇게 불안해하면서도 남부터 신경 쓰다니.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그러나 이번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 대한 설명을 디아즈가 대신해주었다.
"괜찮습니다, 사부님."
"그게 무슨......음? 보아하니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로메인은 뭔가 눈치를 채고 물어왔다.
그런 그를 보며 디아즈가 미소를 지었다.
"예."
"무슨 일인지 나도 좀 같이 알자꾸나."
"이곳 길라드 지하에......미궁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제 여쭤보았던 그 금지된 숲 속 쪽에서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지하......미궁? 허어. 이 땅에 몇십 년을 살았는데......"
로메인도 전혀 몰랐던 듯했다.
굉장히 당황스러워 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말이다.
디아즈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궁 안의 괴수와 전투가 있었습니다. 로한 님의 말씀에 따르면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름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자, 잠깐만. 미노타우로스?"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미노타우로스라면......인간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괴물이 맞느냐?"
"알고 계셨습니까?"
디아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메인이 순간 굳었다.
"......!"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디아즈를 쳐다보았다.
"시, 신화 속의 괴물......저주로 빚어진 피조물......!"
디아즈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메인의 반응이 예상보다도 강렬했던 탓이었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그는 나와 디아즈를 정신없이 번갈아 보더니.
"잘 도망쳤......아니. 잠깐만. 전투를 치렀다고? 도망을 쳤다가 아니라?"
"예?......예."
디아즈는 여전히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긴 했다.
미노타우로스가 강하긴 하지만, 결국 원작에서도 이기고 지나가는 놈이었는데 말이다.
"그걸 너희 둘이서......고작 둘이서 해치웠단 말이냐?"
"아, 아니요. 실은 로한 님 혼자 하셨습니다. 저는 거의 서 있기만......"
"......미친!"
로메인의 입에서, 거친 칭찬이 튀어나왔다.
* * *
나와 디아즈는 로메인의 안내에 따라 그의 집 안에 자리를 했다.
그는 차를 한 잔씩 내어주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자베론. 그 악마 놈 말일세. 굉장히 강한 놈이었다네. 평생 패배라고는 몰랐던 내게, 처음으로 벽이란 걸 느끼게 한 놈이었지. 놈에게 당한 다리가 아직도 욱씬거리는 것 같으니."
로메인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놈이 팔이 세 개더라고. 근데 또 원래는 네 개였어. 하나를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말이야."
나도 그의 얘기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자베론은 사실 원작에 등장하지는 않는 악마였다.
그래서 놈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냥 로메인 인간 자체가 강하다 보니, 덩달아 놈도 어련히 세겠거니 하는 정도?
그래서 실제로 유저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다.
'설정상 자베론이 센가, 아니면 군단장급 악마가 센가.'
던져지기만 하면 게시판이 활활 타오르는 그런 떡밥 말이다.
자베론은 게임에 등장하질 않아 능력치 수치도 존재하질 않으니,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능한 게 이 논쟁의 원인이었다.
그 떡밥의 힌트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죽기 직전에 그러더군. 미노타우로스 놈에게 팔 하나만 잃지 않았어도, 날 이겼을 거라고."
"그럴 수가......"
로메인의 말에, 디아즈가 입을 쩍 벌릴 정도로 놀랐다.
그런 미노타우로스를 내가 잡아냈으니.
한편, 나는 그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오호라.'
이거 떡밥이 조금 풀리겠는데?
'미노타우로스가 자베론과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더 센 건가? 음, 잠깐만. 미노타우로스 놈. 분명히 눈 하나가 애꾸였는데......그게 자베론에게 당한 건가 본데?'
서로 하나씩 주고받은 건가.
그 말은, 풀파워 자베론이 순수 전력으로는 미노타우로스보다 높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알기로 자베론은 격투가 형태의 악마였다.
근데 격투가는 또 미노타우로스에게 약간 패널티가 있긴 있었으니.
미노타우로스 놈의 소가죽은 물리 타격에 추가 방어 효과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상성 차이 때문에 자베론이 더 강했어도, 비슷하게 싸운 거로군.'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을 했다.
그럼 네 팔을 다 가진 풀파워 자베론은, 진짜 로메인을 이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리를 하자면 로메인과 미노타우로스가 비슷할 것이고.
풀파워 자메론과 군단장급 악마들은 더 위라는 뜻이었다.
'자베론이 대단한 놈이긴 했나 보네.'
군단장급이 거의 자베론과 비슷하거나 우위에 있다는 의견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말인즉, 앞으로 만날 놈들은 더 골치라는 뜻이었다.
'후우......빨리 강해져야 한다. 더, 더.'
결론은 결국 그러했다.
살아남으려면, 아직도 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
미노타우로스를 잡는 것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갈 길이 멀구만.'
그러나 사람이 강해지는 데에는 분명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더 중요해졌다.
'시간을 벌려면, 대침공을 늦춰야 한다......!'
결국, 또 쉴 틈 없이 세인트 트라발로 향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데......
악마의 하수인에게서 나온 그 편지는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
'그리고 지하 미궁 열쇠는 또 왜......격투가 시나리오에서는 미노타우로스가 나오긴 하는데, 도적 시나리오에서는 미노타우로스가 아예 등장도 안 한단 말이지. 당연히 지하 미궁 열쇠도 나타나지도 않고.'
지금은 레바르센이 멀쩡히 존재하는 도적 시나리오였다.
그러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결론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다. 아직은 정보가 너무 부족해......일단은 내 할 일부터 하자.'
어차피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한정적이었다.
힘을 비축하고, 또 비축하고.
그리고 가능하다면......시간을 더 벌어서 더 많이 힘을 비축하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름의 결단을 내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정해가려던 그때.
똑, 똑......똑.
뭔가 박자도 엉망이고 굉장히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디아즈의 시선은 당연히 집주인인 로메인에게로 향했다.
하나 로메인 역시 바깥의 인기척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는 의자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쩔뚝거리며 문 앞에 섰다.
끼이익.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 밖에는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당신, 역시 여기 있었군......로한."
목소리의 주인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도적 레바르센.
그녀였던 것이다.
'쟤가 여길 왜?'
한데, 레바르센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여기저기 핏자국도 보이고, 옷은 찢어진데다가, 어디서 크게 뒹굴었는지 온통 흙투성인 게 아닌가.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여기에 온 이유를 당장 듣지는 못했다.
풀썩.
나를 본 직후.
레바르센은 그대로 기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