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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30화 (30/194)

30화. 하나

디아즈는 천천히 길라드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와 본 적이 있는가?"

"......예."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즈.

그녀는 내가 모르는, 자신의 과거를 살짝 들려주었다.

"어렸을 적, 로한 님께서 저를 구해주신 후. 저는 상페트 마을을 떠났습니다. 주변 마을의 몇몇 어른들이 저를 챙겨주셨지만......저는 강해져야겠다는 일념 하나뿐이었습니다. 해서 그분들의 보호 아래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상페트 마을은, 3년 후의 시점인 본편에서도 잠시 들러볼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완전히 폐허가 되어 남은 것은 없었다.

근처의 음산한 분위기를 더 강조시킬 뿐.

"그렇게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당연히 몇 번 죽을 고비도 있었고 말입니다."

디아즈는 시선을 하늘로 띄웠다.

"그러던 어느 날.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야생 늑대와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전의 고비들은 혼자서도 결국 넘겼지만, 그날만큼은 진짜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했죠. 과거, 악마들에게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던 그날처럼 말입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죽음에 직면했을 때......비슷한 또래였던 레아노아 경이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아.....그럼 정말 오래된 친구였겠구나.

아니, 친구가 아니라 가족일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디아즈의 입가에는, 과거를 기억하며 피어오른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레아노아도 이 길라드 출신이었습니다. 해서 저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길라드에 정착했습니다. 레아노아가 그랬죠. 너는 실력도 있고, 키도 비슷하니까 좋은 대련 상대가 될 거라고요. 순전히 대련용 친구였던 거죠. 후후."

어느덧 레아노아의 호칭 역시, 경에서 그저 레아노아로 변해 있었다.

"레아노아는 그때부터 이미 일곱 기사가 되겠다고 설쳤습니다. 조그마한 꼬맹이가 당돌하게도 말입니다. 저보다 고작 한 살 많을 뿐이었는데."

"결국 그 목표를 이루었군."

"예. 그녀는 해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같이 일곱 기사단을 꿈꿨는데......아무래도 쉽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곱 기사단의 곁이라도 지킬 수 있도록 성기사가 된 것이고 말입니다."

"성기사들 역시 절대 약하지 않다. 특히 너는, 내가 택한 사람이니, 자부심을 가져라."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딱히 위로가 아니었다.

항상 옆에 있어서 종종 잊어버리지만, 디아즈는 네임드 중에서도 네임드였다.

그래서 내가 굳이 나서서 챙긴 아군인 것이고.

"많은 계절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진짜 여행을 떠나도 될 만큼 성장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저희는 마침내 다른 성기사단을 향해 떠났고요. 그 후로는 처음 오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나라이기에 이 지역 역시 알 수는 있다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는 훨씬 긴 시간을 보낸 곳인 모양이었다.

"한데, 변한 게 없군요."

나 역시 시선을 돌려 길라드를 마주했다.

내가 아는 그 빈민가의 모습 그대로인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발트라스 왕국 자체가 가난한 나라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균적으로 따지면 아마 라데룬 왕국보다도 더 부유한 국가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빈부격차가 극심할 뿐.

연금술사와 마법사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 중 하나였기에.

이 발트라스 왕국은 대침공 이후에도 지역마다 편차가 컸던 걸로 기억한다.

재력과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부유층의 도시는 의외로 큰 피해 없이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가진 게 없는 자들이 모인 빈민가는 진작 악마 군단에 쓸렸거나, 소수만 겨우 살아남아 짐승과도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지역에 진입하면, 아포칼립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험악한 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어이.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누구야?"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딱 이런 느낌이었지.'

대답하기도 전에 한 대 맞을 것 같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와 디아즈가 돌아보았다.

* * *

"어디서 온 놈들이냐?"

한 명의 사내가, 어깨에는 둔기를 걸친 채 삐딱하게 서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물음에 디아즈가 대답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닌 거 같은데?"

"말장난 하는 걸로 보이나?"

"전혀. 오클리."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왜긴. 만난 적이 있으니까. 못 알아보겠나? 나 디아즈다."

"디아즈? 디아즈라면......설마......너, 설마? 그 디아즈!"

그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입을 떡 벌린 채 디아즈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디아즈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래. 맨날 너 두들겨 패던 그 디아즈다. 오클리."

"하, 하하! 하하하! 야, 씨! 이게 몇 년 만이야? 그 왈가닥이 아주 못 알아보겠네!"

"실제로 못 알아봤지."

"하하하. 어떻게 알아보겠어? 이렇게 변했는데."

"아직도 여행객들 주머니 털고 다니나?"

"주머니 털긴. 위험하니까 나가라고 겁주는 거야. 일부러. 나도 이제 마음 잡고 살고 있다고."

"퍽이나."

"못 믿겠으면 사부님께 여쭤보던가."

'사부님? 디아즈도 사부님이 있었나?'

그 단어에 디아즈의 표정이 아련하게 변했다.

"사부님......잘 계시나?"

"뭐.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는 드릴 거지?"

디아즈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되겠느냐는 얼굴로.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부님! 사부님! 좀 나와 보세요!"

"뭘 또 호들갑이야?"

"반가운 녀석이 찾아왔거든요."

"오클리 또 무슨 개소리를......디아즈?......"

사부라 불린 이가, 판잣집에서 걸어 나왔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거구의 노인이 다리를 절며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눈에 익었다.

한편, 디아즈를 알아본 그 역시 잠시 얼어붙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디아즈 쪽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 허허......꿈인가 생신가 헷갈리는구나."

"진작 찾아왔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이렇게 잊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고맙구나."

둘의 대화가 한참 진행되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저 사부의 정체를.

'격투왕 로메인?'

격투가 클래스가 바로 로메인의 수제자였다.

'이거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그런데 디아즈도 로메인의 제자였을 줄이야.

항상 검을 쓰는 모습밖에 보지 못해서 전혀 예상을 못 했던 것이다.

'어쩐지. 전반적인 움직임 자체가 좋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인물에 당황과 감탄을 하는 사이.

로메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쪽은 누군가? 혹시......결혼 상대는 아니겠, 읍!"

디아즈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어 로메인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거의 속삭이듯 로메인에게 말을 했다.

입은 막았지만, 그녀의 귀가 빨개진 건 막지 못하였다.

"제가 여자라는 건 비밀입니다."

"뭐?......"

비밀이라니.

설마하니 여태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하긴, 딱히 안다고 한 적도 없긴 한데......

내 눈치를 슬쩍 본 로메인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흠. 그, 그럼 이 친구는 누군가?"

"아, 예. 이쪽도 성기사단의 일원이신 로한 경이십니다."

"성기사단?"

"예."

일단은 성기사라는 명함을 가장 앞으로 내밀고 다니는 우리였다.

일곱 기사단이라는 호칭을 전면에 앞세우니, 시포레오 때와 같은 피곤한 환영 행사가 따라다닌 까닭이었다.

조용히 움직이고 싶은 내게는 그리 마음에 드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렇구만. 아, 그런데 레아노아는? 그 녀석은 잘 지내고?"

"......"

로메인은 밝게 물었지만, 디아즈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에 로메인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있었느냐?"

"레아노아는, 죽었습니다."

"......어쩌다가?"

"악마와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저를 보호하다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얼굴을 한 디아즈에게.

로메인이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를 감싸 안았다.

토닥토닥.

"네 탓이라고 생각하느냐?"

"......"

"전혀 아니다. 자책하지 마라. 그 녀석, 일곱 기사단이 되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웠지. 그리고 결국 해냈고. 말은 안 했다만......그 길이 원래 그런 길이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길.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그런 건 없다, 디아즈.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이야. 네가 없었더라도 일어났을 일이고, 네가 아니고 다른 이였다고 해도 일어났을 일이란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하......"

진짜 부녀와 같은 모습에, 나도 한동안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 * *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디아즈가 진정이 된 후.

로메인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찌 되었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낼 수 있나. 음식이라도 좀 준비해주마."

"아닙니다. 다른 일정이 있는데, 로한 경께서 잠시 시간을 내주신 겁니다. 저희는 이만......"

나는 디아즈의 말을 툭 끊었다.

"당신에게 볼일이 있다. 로메인."

그에, 로메인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음? 이 노인네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당신에게 격투가로서의 인정을 받고 싶군."

"......?"

그는 물음표 가득한 모습이 되었다.

그럴만도 했다.

성기사라고 소개를 했는데 느닷없이 격투가라니.

나 같아도 이해가 안 될 것이었다.

"허허. 이 노인네가 소싯적에 주먹질을 좀 하고 다녔기로서니, 내게 인정을 받는다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자베론. 그놈을 주먹으로 때려잡은 자의 인정이라면, 충분하지."

"......"

로메인이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어떻게 알고 있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일반적으론 아는 게 더 이상하거든."

자베론은 격투가 클래스 스토리로 진행하게 되면 알게 되는 이름이었다.

악마 중에서도 상위 악마로서.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홀로 돌아다니며 인간계를 유린했다, 라고 알려진 악마였다.

물론 본편에서도 이미 로메인에게 죽어서 이름만 등장할 뿐이었지만.

'저 다리도 그때 자베론에게 당했다고 그랬지.'

그러면서 플레이어 격투가에게 항상 악마와 싸울 땐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게 떠올랐다.

여하튼.

맨손 격투를 하는 인간 중에서는, 로메인만한 괴물은 없다고 보는 게 현명했다.

그런 그가 인정을 해준다면 충분히 격투가 클래스가 손에 들어오지 않을까.

내 결론은 그것이었다.

로메인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먼저 오클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봐.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모르겠는데, 사부님께 그런 말을 올리려면 일단 나부터......"

굳이 원한다면, 먼저 상대해주는 게 맞겠지.

나는 가볍게 왼팔을 뻗었고.

툭, 털썩.

오클리는 바닥에 편히 누웠다.

그 모습을 정면에서 지켜본 로메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재능이......없지는 않구만.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 내 인정을 받긴 모자란데."

"눕혀야 할 자들이 더 있는가?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는데."

"하하! 자신만만하군. 기세가 레아노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함세. 내가 돌멩이를 딱 열 개만 던지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번뜩였다.

'이거 격투가 튜토리얼이랑 똑같다......!'

그리고 이다음에 이어질 말도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그 중 일곱 개를 피하면 인정한다고......'

"그 중 여덟 개를 잡아내면 인정하겠네."

잉?

이거......내가 아는 거랑 조금 맥락이 다르긴 한데.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닐듯싶었다.

내가 수락을 하려고 하자.

디아즈가 나섰다.

"그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사부님의 돌멩이를 여덟 개나 잡아내라니. 레아노아도 일곱 개를 피해내는 게 전부였는데......"

이게 난이도가 그 정도였던가?

'그럼 격투가 캐릭터가 대단하긴 했나 보네.'

격투가 튜토리얼에서도 잡지는 않았지만, 피해 내는 건 열 개 모두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긴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건 패턴이 정해져 있거든.'

그리고 그 패턴은 이미 내 머릿속에 잘 입력되어 있었다.

처음 두 가지 위치만 잘 파악해도, 전부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어디로 올지 알고 막는 꼴이니까.

나는 손을 뻗어 말리는 디아즈를 막아 세웠다.

"하하. 자신만만 한데? 근데 나도 나름 명성이 있는지라, 그냥 보증을 서 줄 수는 없지 않겠나. 내기를 하나 하지. 실패한다면, 자네는 뭘 걸겠나."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검은빛 검신이 그 서늘한 자태를 뽐내었다.

"이걸 걸지. 검명은 라스갈론이다. 값어치는 확실한 녀석이지."

로메인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라스갈론을 응시했다.

"내 비록 검은 잘 모르네만......나쁘진 않군."

"조건은 그게 전부인가?"

"아, 한 가지를 빼먹었군. 한 손으로만, 일세. 이래도 하겠나?"

"좋다."

어차피 왼손 아니면, 막을 수도 없을 터.

상관 없는 제안이었다.

하나 그 제안을 들은 디아즈가 눈을 부릅떴다.

"로한 님! 이건 아무래도......"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

그 모습을 본 로메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발 끝으로 툭, 돌멩이를 튕겨 올렸다.

"바로 시작할까?"

"얼마든지."

"그럼 가겠네!"

파앗!

순간 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의 속도로 날아든 돌멩이.

나는 제3의 눈과 거신병의 왼팔을 믿고.

그리고 내 기억을 믿고 손을 뻗었다.

텁!

됐다!

예상대로 손에 잘 들어온 돌멩이를 보며, 나는 카운트를 세었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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