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렇게 될 운명이니까
"저희가 들어온 입구는 다시 막아뒀습니다."
"잘했다."
디아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추적은 따돌릴 수 있을 터였다.
문을 베어 놨으니, 문으로 탈출했겠거니 생각하겠지.
우리는 천천히 이 의문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동굴과 같은 형상.
얼핏 보면 그저 자연적으로 발생한 곳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오갓 유저였던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이거......유적지 패턴이다.'
얼핏얼핏 인위적인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래 파오갓 세계는 유독 지하 유적지가 많이 보였다.
고대의 시대가 존재했던 설정이었던가, 여튼 그랬다.
더불어 워낙 잘 숨겨둔 탓에, 심지어는 게임 발매 이후 7년이 지난 후에 발견된 곳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7년 만에 발견된 곳에, 별 희귀 아이템은 없었지만.'
어쨌든.
이곳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아니, 애초에 플레이어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인가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현실이 되어버린 덕에 들어온 곳일지도......
일단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검은 천둥의 반지를 얻었던 당시엔 가본 곳이라 겁이 없었지만, 이곳은 초행길이었으니 아무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그래도 원래의 미래 흐름대로라면 저 롬하디 남작도 혼자 탈출했을 정도니까.'
뭐 별일이야 있겠는가.
실제로 우리는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어떠한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확실히 인공적인 느낌이 팍팍 들었다.
이번에도 디아즈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열겠습니다."
"음."
쿠구구구구......
꽤 묵직한 철문이었다.
디아즈는 거의 쓰러질 듯, 몸을 앞으로 크게 기울여 문을 밀어야 했다.
그 순간.
팟, 팟, 팟!
놀랍게도 저절로 방 내부에 있던 촛불들이 켜지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롬하디 남작이 깜짝 놀랐다.
"오오......!"
고도의 마법이었다.
당연히 작금의 시대에도 마법사는 존재하였다.
흔치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마저도 수준은 오히려 고대의 시대에 뒤처지고 있었다.
지금도 마법은 굉장히 신비로운 영역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마법은, 지금의 것보다 조금 더 원초적이고 동시에 조금 더 자연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었다.
'기록만 남아 있었지. 마법 자체는 다 없어지고.'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고대 마법들은 그 운용법이 대부분 소실되어 있었다.
마치 트레저 헌터처럼 고대의 마법에 대한 것들만 쫓는 사람들까지 따로 있을 정도로, 고대 마법은 희미해져 있던 것이다.
때문에 이런 공간도 굉장히 희귀하다 할 수 있었다.
롬하디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조차도 기대감이 올라올 정도였으니까.
'이거......잘하면 대박 칠 수도?......'
* * *
촛불이 사방을 밝히자, 내부의 모습이 조금 더 훤하게 들어왔다.
그런데......정작 눈에 들어온 그곳의 풍경은 생각보다 휑했다.
'엥? 이게 뭐야.'
꽝인 건가?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를 스쳤다.
이미 털린 모습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와서 드는 생각인데.
롬하디 남작도 이 길을 통해 감옥 탈출만 해내고, 뭔가 얻은 건 없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흠. 그냥 나가는 길일 뿐인 건가.'
근데 웃긴 건, 딱히 나가는 길도 보이지 않았다.
둥근 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막다른 길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돌아가 봤자 감옥이고.'
중간에 다른 갈림길 따위는 없었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다른 길이 있다는 건데......
그때였다.
롬하디 남작이 나를 부른 것은.
"로한 경! 여기 무언가 있소만. 한 번 보시겠소?"
나는 벽을 매만지다가, 롬하디 남작 쪽으로 걸어갔다.
소리를 들은 디아즈도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우리는 롬하디 남작의 옆에 모여,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다른 벽과는 달리 그쪽에는 그림 같은 게 그려져 있었다.
'반원의 돔 안......이 그림은 사람인가? 사람 그림 옆에는......뭐지 이건?'
그 밑으로 글씨가 쓰여있었는데.
"고대 언어 같소. 읽을 수가 없구려."
롬하디 남작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디아즈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디아즈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대 언어는 교단 내에서도 몇몇 분들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마저도 읽는 게 아니라 해석인지라 정확한 내용을 알기도 어렵지요. 지금 무슨 내용인지 알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이 원형의 투기장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명예를 쟁취하라. 전사여. 발을 들인 이상 승리가 없다면 벗어날 수 없으리라. 석판에 손을 뻗어라. 그리고 적을 맞이하라. 승리를 거머쥔 그대에게는 작은 선물을 내어주리니."
"로, 로한 님? 설마 지금 이걸 읽으신......"
디아즈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나도 자각을 했다.
어?......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래의 문장을 읽었던 것이다.
'왜 이게......'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저절로 읽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 글자들이 자동으로 이해가 되었다.
솔직히 나도 지금 놀라는 중이었다.
한편, 내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롬하디 남작은 글이 적힌 돌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나는 잠깐 고민을 했다.
작은 선물......
이거 설마하니, 그게 아닐까.
'은빛의 창?'
이제야 생각이 났다.
롬하디 남작이 사용하던 그 스킬.
은빛의 창은 고유 스킬은 아니었다.
일반 스킬의 범주에 들어가는 녀석이었지.
그러나 일반 스킬 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놈들이 있었는데.
특히 고대의 마법을 기반으로 창조된 스킬들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은빛의 창이었다.
스킬 자체는 매우 간단했다.
랜서 클래스의 기술로서, 창에 은빛의 아우라를 씌워주는 것이었다.
은 속성이 추가되어 악마 계열 몬스터들에게 추가 데미지를 먹히는 방식이었는데......
'롬하디는 저걸로 은빛 창부대를 창설하고 대침공 때 레제타를 지켜낸 영웅이 되었지.'
꽤나 그 효과가 쏠쏠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순간 탐이 났다.
물론 은빛의 창은 고유 스킬이 아니고 일반 스킬이기에, 재능만 있다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욕심을 냈느냐고?
'최초의 계승자 보너스......그거 아까운데......'
일반 스킬은 크게 두 가지 루트로 획득할 수 있었다.
해당 스킬을 이미 배운 사람이나 NPC에게 배우는 방법.
아니면 지금처럼 유적지나 고대 서적을 통해 최초로 습득하는 방법.
NPC가 가진 스킬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배울 수가 있었는데, 문제는 유저가 최초 계승자가 되는 경우였다.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겼던 당시에는, 귀한 일반 스킬이 발견되면 최초 발견자만이 각종 보너스와 함께 해당 스킬을 전수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꽤 재미있던 시스템으로 기억한다.
최초 발견자만 스킬을 전수할 수 있으니, 자신의 길드 내에서만 스킬을 공유하기도 했고.
길드전이라도 벌어지면, 각자 길드의 대표 스킬을 뿌려가며 화려한 그림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고급 스킬 최초 계승자들은 나름 대우도 받고 경험치 보너스도 받아, 다들 길드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최초 계승자 유저들 참 부러워했지.'
어쨌든.
지금 저 석판이 스위치인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다면 석판에 손을 대는 순간, 그 사람이 은빛의 창 최초 계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욕심을 버리기로 하였다.
'저걸 내가 가져가면......레제타가 멸망할지도......'
나는 저걸 얻더라도 레제타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럼 초기 계승자가 사라지는 것이니, 스킬 전수도 이루어지지 않을거고.
자연스럽게 은빛 창부대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결과는 하나였다.
레제타의 종말.
그건 좀 찜찜했다.
그리고 내가 창을 주력 무기로 쓰는 랜서 계열도 아니고.
파오갓의 레벨 시스템은 일반적인 레벨 시스템과 조금 달랐다.
특정 무기를 오래 사용하면, 그 계열의 경험치가 오르는.
무기 숙련도 시스템이었다.
나는 이미 검을 주력으로 쓰고 있으니 검 숙련도가 올라가는 중일 테고.
더군다나 '검'으로 공간을 베는 고유 스킬도 가지고 있는 판국에, 검을 버리기도 아까웠다.
해서 나는.
나름 큰 용기를 내었다.
"롬하디 남작. 그 석판에 손을 올려라."
* * *
"설마 이거......스킬인 것이오?"
내 눈치를 보던 롬하디 남작이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계승자에 대한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호히 거절을 했다.
"그럴 순 없소. 이건 내가 얻을 게 아니오. 로한 경께서 이리 이끌어주었는데, 어찌 내게 이걸 가지라 말씀하시는 거요?"
"그래야 하니까."
"무슨 말이오?"
미래에 네가 이곳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그런 말을 하면 과연 믿을까?
쉽게 그러진 않을 거 같았다.
차라리 조금 신비주의 컨셉으로 밀어붙이는 게 편할듯싶었다.
"그렇게 될 운명이니까."
"......운명?......"
효과는 확실했다.
단 한 마디에 롬하디 남작이 입을 딱 다물었으니.
나는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를 재촉했다.
"여기서 하루종일 있을 생각인가?"
"......"
그는 천천히 석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멈칫.
또 멈추는 게 아닌가.
'아 좀 빨리하지 좀.'
한국인이라 그런가.
벌써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속을 모르는지, 롬하디 남작은 질문을 하나 더 했다.
"근데 여기......투기장인 것 같은데 설마 이걸 만지면 저 그림의 괴물 같은 게 나오는 거 아니오?"
왜 모르겠나.
이미 밑의 글귀도 다 읽었고, 이런 비슷한 장면도 원작에서 몇 번이나 봤는데.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짓을 했다.
"알고 있으니까 얼른 좀 올려."
"아, 알겠소......"
그러는 사이 나는 검을 뽑아들었고.
자연스럽게 디아즈도 전투를 준비했다.
롬하디 남작이 손을 올리자.
투기장이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쿠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천정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땅을 울리며 착지한 거대한 그것은......골렘이었다.
골렘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냅다 오른팔을 내질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주먹에는 주먹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음,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왼팔을 앞으로 뻗었다.
쩌어어엉!
두 주먹이 마주치는 소리에, 롬하디 남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마 그의 생각보다 훨씬 스케일이 컸던 모양이었다.
반면 나는 옆구리가 신경 쓰였다.
이번에도 찌릿한 게 느껴졌다.
시포레오의 전투가 아직 회복 덜 된 것인 모양이었다.
왼팔 빼고는 체력 좀 좋은 보통의 사람이었으니까.
'확실히. 체력 보강은 필수네. 그리고......아직 많이 약해.'
다시 한 번 자각을 하며, 나는 뛰어올라 골렘의 주먹을 타고 내달렸다.
놈의 팔의 중간쯤 도착하자.
골렘도 반응을 하고 날 떨쳐내려 왼팔을 휘둘렀다.
이미 제3의 눈으로 공격 궤도를 간파한 나는 가볍게 그걸 피해내고.
샥!
펄쩍 뛰어올랐다.
골렘의 머리를 세로로 잘랐다.
서걱.
공간 자체와 함께 일격에 두 동강이 난 골렘의 머리.
머리 안에 있던 마법이 풀림과 동시에.
우르르......
골렘은 힘없이 무너졌다.
나는 가뿐히 바닥에 착지를 하고.
착.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보고 넋이 반쯤 나간 롬하디 남작이 보였다.
"이, 이럴 수가......!"
으쓱하는 기분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갈 뻔했지만, 체면이 있으니 좀 참았다.
이정도야 뭐.
이젠 쉽지.
그리고.
화아아아악!
골렘으로부터 은빛의 작은 별 같은 게 떠오르더니.
슈우우우웅......
점차 롬하디 남작에게 모였다.
그 후 빛들은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샤아아아.
잠깐 롬하디 남작이 은빛으로 빛나는 것 같다가 이내 빛은 사그라들었다.
원래의 역사대로, 롬하디 남작이 은빛의 창 스킬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다 보았다.
"고맙소! 로한 경! 내 명예를 걸고,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으리다!"
나는 작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래. 잘 된 거다. 욕심부리지 말자.
나는 검을 갈무리하며, 몸을 돌리......다 말고 멈췄다.
분명 골렘은 쓰러뜨렸는데, 이상하게 제3의 눈이 반응을 하는 까닭이었다.
'이상한데?'
해서 나는 발로 돌무더기를 슬쩍 치워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안에는.
'이, 이건?......'
나는 롬하디 남작이 조금 전 지었던 그 표정이 되었다.
돌무더기 아래에 깔린 저것을 보인 것이다.
'......황금의 창?'
골렘의 핵이었던 것이 내 검에 쪼개지고.
그 안에 있던 석판인듯하였다.
석판에는 황금의 창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문장이 더 있었다.
[욕심을 버리고, 은빛의 창을 포기한 전사여. 그대는 진정한 힘을 가질 준비가 되었도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악!
은빛의 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은빛의 창이 마치 밤하늘의 작은 별들 같았다면.
이번 것은 마치 태양 그 자체 같았다.
그 빛 무리는.
감탄할 새도 없이 내게 날아 들어와.
슈우웅!
내 안에 스며들었다.
사르르르......!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