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휘하 기사였겠지
나는 디아즈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았다.
"그래도 같은 기사단의 일원이신데, 얼굴 한 번쯤은 비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부상으로 인해 대교구의 치료실 신세를 지고 있는 크라우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앤드류 때처럼 괜히 트집을 잡힐까 약간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안 갔다가 나중에 저쪽에서 찾아오면, 그게 더 당황스럽겠지?'
차라리 내가 선빵을 치는 게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크라우스는 모르는 것 같지만, 어쨌든 내가 그 마수 놈을 풀어주어 다친 것이기도 했고.
"그래. 얼굴만 살짝 비추지."
"예."
그렇게 도착한 치료실의 앞.
디아즈가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개인실.
그곳의 넓은 침상 위에, 크라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문이 열리자 그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 우리 뉴페이스 기사님 아니신가?"
"......"
크라우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상체를 세웠다.
"일어날 필요 없다."
"어허이. 그래도 우리 새 기사님 오셨는데 그럴 수야 있나. 하하하! 아이고. 웃으면 아픈데."
나는 그의 복부를 쳐다보았다.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몸 상태는?"
"조금 뻐근하긴 한데. 이건 나이 들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괜찮나 보군. 그럼 이만 가보겠다."
"에이. 뭘 벌써 가려고 그러나? 여기 과일도 많은데 좀 먹고 가."
이 인간.
생각보다 넉살이 상당히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의 옆에 놓여진 의자에 털썩 앉았다.
"디아즈 경? 거기 과일 좀 가져다주겠소? 부탁 좀 하리다."
"예."
디아즈가 바구니를 들고 오자, 크라우스는 안에서 오렌지를 하나 꺼냈다.
"이게 아주 달더라고. 이런 맛있는 오렌지를 먹어 본 게 얼마나 오랜지! 푸하하하! 아이고. 옆구리야......"
자기 아재 개그에 자기가 웃더니, 혼자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에이. 이거 꽤나 잘 먹히는 농담인데 말이야."
"부관이나 휘하 기사였겠지."
"......어떻게 알았나?"
모르는 게 더 신기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잘 싸우더군."
본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표정이 싹 바뀌어 진지해진 크라우스였다.
확실히 기사는 기사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자네의 그 번개를 다루는 능력......경이로울 지경이던데. 스트라운에서 받은 권능인가?"
나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내 권능을 속여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직 그 누구도 내가 스트라운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모르고 있을 터였다.
차라리 뭔가 이렇게 던져 놓는 게 더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었다.
"크으. 역시 그랬구만. 내 능력이야, 봤다시피 안개를 다루는 힘일세. 이번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지만."
"충분히 잘 싸웠다. 상성이 좋지 않았을 뿐."
"말을 이쁘게 하는 재주가 있군! 하하! 아오. 자꾸 까먹네."
그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일곱 기사단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타성에 찌들어 있었어. 후. 나이도 나이인지라, 이제부턴 슬슬 운동을 좀 해야 될 것 같군."
"......"
크라우스는 내 말을 빈말이라고 느낀 것 같았다.
'빈말 아닌데.'
진심으로 이번에는 단지 상성이 나빴을 뿐.
크라우스는 충분히 강자의 반열에 들어서는 인물이었다.
대규모 악마 군대와 혼자서 그렇게 싸워낼 수 있는 인간이 흔할 리가 있겠나.
그래도 뭐, 정진한다니.
나로서는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언젠가 대침공이 일어날 때 그가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할 말은 다 한 것 같군. 난 이만 가보겠다.
나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 참. 사람 차갑기는. 어쨌든,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 목숨을 구해준 값, 기회가 되면 갚도록 하지."
"그러던가."
"시포레오를 떠날 생각인가? 내 마음 같아서는 그냥 여기 머물러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가끔 대련도 하고."
대련?
더더욱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일이 많아서."
"그렇구만. 역시 일곱 번째 멤버라 그런지, 할 일이 많은가 보군. 알겠네. 바쁜 사람 붙잡는 것도 여기까지만 해야지. 부디 몸조심 하시게."
"그러지."
"아, 그리고."
나는 치료실을 나가다 말고 잠깐 멈추었다.
"검 말이야. 그거 스트라운의 창고에 있던 거 아닌가?"
"아마도."
"에헤이. 좀 좋은 걸로 바꿔 보는 게 어떻겠나?"
음. 확실히.
공간 베기 고유 스킬은, 검이 없으면 쓸 수가 없는 기술이었다.
만에 하나 검이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소중한 공격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크라우스가 말을 보태었다.
"레제타 쪽에 들러서 가룬이라는 자를 만나 봐. 내 이름을 대면, 잘 해줄 거니까. 하하!"
'가룬?......어딘가 익숙한 이름......아!'
간만에 그의 별명이 떠올랐다.
'대장장이 망령 가룬.'
본편에서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대장장이 망령이었다.
* * *
"이 자가......그 고서에 나오는 악귀의 대공, 아크비톤이라는 말이오?......
테베톤 대주교는, 어두운 표정으로 바싹 타버린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괴물이 바로 이 시포레오의 지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름 돋는 괴소음을 만들면서.
테베논 대주교는 사제들에게 물었다.
"확실한가?"
"예. 몇 번이나 검증을 끝냈습니다. 특히 고대 서적에는 도검이 들지 않는 피부에 대한 묘사가 있었는데, 그 부분이 크라우스 경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크라우스 경 쯤 되는 인물이 검을 다루지 못할 리도 없고. 그의 검이 날이 무뎌졌을 리도 없겠군."
"그렇습니다. 그 외에 이런 기묘한 생김새에 대한 기록이나, 보여준 역량으로 보아 확실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테베논 대주교에게 펼쳐진 책을 보여주었다.
그 장에는 아크비톤이라고 이름이 쓰여진 그림이 하나 보였다.
"지금 보시면, 서적 속 이 그림과 달리 약간 수척한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군."
"아마 꽤 오랜 세월 봉인이 되어 굶주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많이 약해지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무시무시한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쨌든, 최근 모종의 이유로 지하의 봉인이 파손되었고. 이 자의 손이 나올 정도로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멍을 통해 이 괴물 놈이 사람들을 납치해 실종 사건이 발생한 거고?"
"예. 맞습니다."
"짧은 시간에 용케도 상세히 알아내었군. 고생들 하셨소."
테베논 대주교의 칭찬에, 선임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실은......지하 봉인 균열에 관한 건은 저희가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 시오?"
"로한 경께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지하에서 수색 정찰단 알버트 경과 만나셨다 전해 들었습니다."
어쩐지.
이런 어려운 사건에, 너무 빠른 결론을 찾아낸 것 같았다.
물론 사제들 역시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원래 악마가 얽힌 일은 그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테베논 대주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로한 경이 거긴 왜......"
"아마 지하의 괴소음과 실종 사건에 대해 독자적으로 알아보러 가신 게 아니겠느냐고 알버트 경이 조심스럽게 추측을 했습니다."
"이것 참. 들으면 들을수록 로한 경의 정의감은 대단하군. 해서, 로한 경은 봉인과 균열을 어떻게 알아낸 것이라 하시었소?"
"그게 좀 믿기지 않는데......보고 바로 알아내셨다고......"
"......"
정말이지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여태 공석이던 자리를 채운 일곱 번째 기사라 그런 것일까?
보통의 사람과는 그 결이 다르다 느껴질 정도였다.
테베논 대주교는, 궁금해졌다.
과연 저 로한이라는 사람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인지.
"이 아크비톤......아니. 입에 담기도 싫군. 로한 경이 없었다 치고, 이 괴물이 만약 날뛰었다면......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었을 거라 추측하는가?"
여태 막힘 없이 대답하던 사제들이었지만, 그 질문만큼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볼 뿐.
그에 선임 사제가 조심스럽게 나서서 답을 하였다.
"고서에 따르면, 놈의 원래 직위는 고위 악마. 그중에서도 귀족급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악마 군단장급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크라우스 경도 전투 중간에 아이를 구하다가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으니......최소 시포레오의 절반 정도는 폐허가 되었을 겁니다. 대응이 더 느렸을 경우, 시포레오가 초토화되고, 수도 이전까지도 고민해야 했을 거라 예상이 됩니다."
테베논 대주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왕실에 할 말이 없겠군."
교단이 이만큼 강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각 왕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지원의 배경은 저런 악마로부터 지켜준다는 명분이었고.
이번의 경우엔, 교단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작정하고 쏘아붙인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만약 아크비톤이 큰 피해를 일으켰다면, 교단 총회의에서의 질책도 피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아니. 그런 질책을 듣기 전에 벌써 죽었을 테지.'
이 도시 전체가, 로한 경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었다.
* * *
다음 날, 시포레오 대교구의 대회의장.
주교급 회의.
그곳에서 나는, 내가 어떻게 검은 천둥의 반지를 쓸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테베논 대주교를 통해서 말이다.
"우리 시포레오 대교구 주교회에서는, 시포레오를 대표하는 이단 심문관으로 로한 경을 선택하였소."
'이래서 이게 써진 거구나.'
나는 왼손 검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만일 경께서 이단 심문관의 지위를 내려놓고자 한다면,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오. 지금 당장도 물론이고. 경께서는, 이단 심문관의 지위를 품어주시겠소?"
물어 뭣하겠는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성기사의 직위를 얻을까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저절로 굴러들어오다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좋소. 이제 그대, 로한은 우리 시포레오 대교구의 가족이자, 아를렘 교단의 일원으로. 누구든 그대에게 이빨을 들이민다면 우리가 함께 맞설 것이니. 그대, 로한. 두려워 말고 악과 맞서시오."
그것으로 나는 이단 심문관이라는 특별직을 얻게 되었다.
그 외에 소소한 수확도 있었다.
'팔라딘 클래스는......안보이네.'
어디에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팔라딘 클래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말은 곧.
'그 캐릭터가 얻을 아이템을 내가 가로채도......문제가 없단 말이지.'
덕분에 나는 편하게 다음 행선지를 고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느낀 체력적 한계.
그걸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웬만한 특수부대 출신 군인이나 운동선수에 버금가는 체력을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서 상급일 뿐이었다.
'악마는 달라도 뭐가 달라. 원작에서는 본 적도 없는 잡몹 하나 잡는데 이렇게 고생을 하니......'
이번에 시포레오에서의 전투에서 나는,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스스로가 너무 약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은 까닭이었다.
주변에서 워낙 대단하다 치켜세워주니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너무 자만했어.'
크라우스가 그렇듯, 나도 더 정진을 해야 했다.
실력도 체력도.
그 중 체력 방면을 해결할 방법이......팔라딘 클래스의 사이드 미션에 존재했던 게 떠올랐다.
'불사조의 꽃. 지금쯤이면 이미 채취했겠어.'
만약 팔라딘이 존재했다면 내가 피해 갔겠지만.
아니란 걸 확인한 이상 내버려 둘 이유는 없었다.
나는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걸 느끼며, 그날 바로 시포레오를 떠났다.
그리고......
숲 속의 어느 작은 오두막.
[소소한 약초상]
그 간판이 걸린 건물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