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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7화 (17/194)

17화. 어딜 도망가

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가 제3의 눈을 통해 느껴졌다.

'젠장! 그 괴물 놈이 벌써 날뛰기 시작한 건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벌인 일이었으니.

사상자가 나온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해서 나는 더욱 전력을 다해 뜀박질을 해댔다.

그리고 점차 시포레오에 가까워지자.

이상한 안개가 눈에 들어왔다.

내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알버트가 소리쳤다.

"크라우스 경이 무언가와 대치 중인 모양입니다!"

"크라우스 경?"

"일곱 기사단의 일원입니다만, 아직 안 만나보셨습니까?"

대화를 하는 사이, 안개는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이제 슬슬 한 번의 도약으로 닿을 정도는 되었다.

나는 알버트에게 짧게 대답했다.

"지금 만나보면 되겠군."

그리고 앞으로 뛰어 왼팔로 바닥을 짚고.

힘껏 바닥을 밀었다.

파아앗!

이제 슬슬 거신병의 왼팔을 쓰는 데에 나름 노하우가 생긴 것 같았다.

내 몸이 부웅 날아오르고.

저 뒤로, 알버트의 넋 나간 표정이 잠깐 보인 것 같았다.

"헐......"

* * *

허공에서 나는, 제3의 눈에 최대한 집중을 했다.

크라우스가 만든 안개가 생각보다도 짙었던 탓이었다.

한 치 앞은커녕, 손을 뻗으면 내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래, 맞아. 크라우스 녀석 안개 능력자였지.'

시네마틱 영상에서 혼자 군단을 상대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순간에 공간을 안개로 뒤덮고,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 뒤 일방적으로 도륙하던 그 모습이.

'이 정도라면, 벌써 처리했을지도......'

라는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제3의 눈에, 크라우스로 보이는 자가 감지되었다.

그런데......그가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반면 마수로 보이는 괴생명체는, 그런 크라우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언제라도 달려들어 뜯어 먹을 듯이.

나는 왼팔을 뻗어 근처의 건물을 한 번 짚었다.

타앗.

그것으로 날아가던 방향을 마수 쪽으로 튼 것이다.

그러는 사이, 마수 놈이 바닥에 쓰러진 크라우스에게 달려들었다.

궤도를 정확히 수정한 나는, 마수의 정수리를 향해 추락하면서......

왼팔을 이용해 놈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쿠우우웅!

어깨까지 큰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주먹에 느낌이 있었다.

한 방 제대로 먹인 느낌이.

반대로 내 몸은 거뜬했다.

치명적인 충격은 이미 거신병의 왼팔이 전부 집어삼켰으니.

"케, 케엑......!"

내 주먹에 깔린 마수가, 요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발견한 크라우스의 눈이, 떨렸다.

"누, 누구......"

나는 그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았다. 잘 버텨주었어."

기감을 살려 주변을 스캔해봤지만, 부상으로 쓰러진 사람이나 죽은 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크라우스가 막아준 덕분이겠지.

몸이 저리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버티며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죄책감을 짊어질 일이 사라졌다.

물론 크라우스가 다친 건 조금 미안했지만.

"뒷일은......내가 마무리하지."

나는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리고는.

마수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찍었다.

콰아앙!

"켁!"

또 한 번 더.

콰아아아앙!

"끄에에에엑!"

놈의 비명이 좀 더 커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쿠우우우우웅!

이번에는 내 주먹이 그냥 맨바닥에 꽂혔다.

막타라고 생각했는데, 마수가 아직 도망칠 힘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저 멀리 도약한 채, 나를 견제하는 마수.

"크륵! 크르르르......!

놈은 일부러 안갯속으로 몸을 숨겼다.

지형지물까지 이용하다니.

악마와 달리 짐승에 가까운 마수치고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인 모양이었다.

'더럽게 못생긴 게, 어디서 대가리를 굴리네.'

하지만 놈은 틀린 계산을 한 것이었다.

나 역시 이 안개 속 상황이 그리 불편한 건 아니었기에.

한편 아직 완전히 회복을 못 한 크라우스가, 내게 소리쳤다.

"노, 놈은 안개가 통하지 않소! 조심하시......"

나는 한 글자로 대답했다.

"쉿."

"......"

보는 게 아니다.

듣고, 맡고, 그리고 느끼는 것이었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안개가 머금은 수분의 흔들림을.

제3의 눈을 가진 나조차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그런 미세한 변화들을 한 번에 전부.

그리고 그 어려운 걸 나는 해냈다.

저 마수 놈도 해내는 일을, 내가 못하는 건 조금 기분 나쁘니 말이다.

샤악!

어느 순간 마수는 안갯속에 숨어 내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뺨을 후려갈겼다.

쩌어어엉!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록테르 때는 너무 빨리 끝나서 재미가 없었는데, 이놈은 치는 맛이 좀 있네!'

* * *

사실 나는 짜증이 좀 올라온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악마와 관련된 놈들에게 느껴지는 역한 기운.

그게 기분을 망쳤다.

그리고 하나 더.

'검은 천둥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안 되는데......'

기껏 고생하며 얻은 검은 천둥의 반지가, 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다.

야만전사와 달리 팔리딘은, 갑옷을 쫙 차려입고 방패를 든 모습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팔라딘은 확실히 방어에 치중한 캐릭터였다.

컨셉에 걸맞게 공격 수단은 빈약한 편이었고.

그래서 아마 팔라딘에게만 검은 천둥의 반지를 준 게 아닐까.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이미 공격 수단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다다익선 아닌가.

더 좋은 공격 수단을 굳이 추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에,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아오! 진짜. 이거 되기만 하면 대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 일 마음대로 안 되네.'

근데 정작 검은 천둥의 반지는 전혀 반응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걸 누구한테 토로할 수도 없고......혼자 분을 삭일 수밖에.

이 주먹질로 말이다.

콰아앙!

'어? 잠깐만?......'

그렇게 한참 두들겨 패다 보니,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거......팔라딘 클래스 아니면 못 쓰는 거야?'

헐.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기껏 팔 뻐근한 것도 참아가며 끄집어냈는데......

팔라딘이 아니면 무용지물이라니.

'그래......그거 아니면 안 써질 이유가 없지.'

문제는.

내가 팔라딘 클래스가 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일곱 기사단과 팔라딘은 협력 관계이기는 하나, 명백히 다른 집단이었다.

오죽하면 성기사단 쪽에게 일곱 기사단 중 한 명을 선택할 권한을 주었겠는가.

다 인간 세상 일이다 보니, 일종의 견제를 하기 위함이었다.

너무 큰 단독 세력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머지 다섯 왕국들도 같은 이유에서 한 자리씩 차지를 한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어느 왕국 출신이든 제일 센 일곱 명을 뽑았겠지.

다만 그 설정은 플레이어에게 그닥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에게도 그러했다.

조금 전까지는.

그런데 지금.

그 쓸데없이 디테일 했던 설정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일곱 기사단이면서 성기사?......그런 건 안된다고......'

내가 검은 천둥을 쓸 방법은......없었다.

상황이 파악되니 오히려 더 짜증이 치솟았다.

"으아아아아!"

나는 속에 있는 분노를 괴성과 함께 폭발시켰다.

콰앙! 쩌어어엉! 쿠당탕!

사정없이 휘두르는 왼팔 연타에, 마수의 얼굴이 점점 다 낡은 걸레 조각처럼 변했다.

심지어 몇 번은 도망치려고 펄쩍 뛰길래.

덥썩!

지금처럼 발모가지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우우웅!

"어딜 도망가!"

아직 내 분이 풀리려면 한참 더 남았다.

퍽! 퍼억! 퍽퍽퍽!

도망 가려한 괘씸죄를 붙여서 두 배로 타격을 올렸다.

"꾸에에엑!"

처음에는 꽤 날카롭던 괴성을 지르던 놈이, 지금은 돼지 멱따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도 뭐 희한하게 불쌍하다는 기분은 안 들었다.

"악마가! 말대꾸?"

빠바바바박!

괜히 심기만 건드려 매만 더 벌 뿐이었다.

저 멀리서,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만큼 악마를 증오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 * *

시포레오 대교구 내 대회의실.

그곳에는 대교구의 모든 주교급 이상 고위 성직자들이 회의를 한창 하는 중이었다.

"......그럼 이 안건에 대해서는 다들 이견이 없는 걸로 알겠소."

테베논 대주교는 상정된 안건의 만장일치를 확인하고는, 망치 모양의 의사봉을 들어 올렸다.

그것으로 안건의 가결을 알리기 위해 세 번 내려치려던 그 순간.

탕, 탕......

"기사단 주교님!"

사제 하나가 다급히 기사단 주교를 찾으며 대회의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원래라면 주교급 이상 고위 회의를 이렇게 방해하는 것은, 근신을 받을 정도로 불손한 행위였다.

그러나 테베논 대주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걸 느낀 까닭이었다.

"무슨 일이시오?"

"큰일 났습니다. 지금 시포레오 도심 한복판에, 마수가 나타났습니다!"

"마수?"

"예! 아마 지하의 괴소음을 일으킨 그 괴수인 걸로 보입니다!"

테베논 대주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어떤 종인지는 파악했소이까?"

"그게, 파악이 힘듭니다. 지금 막 부상을 입은 성기사들이 복귀를 했는데, 처음 보는 외형이었다고 합니다."

"성기사들이 복귀를 했다? 그럼 지금 현장에는 누가 있소?"

"다행히 일곱 기사단의 일원이신 크라우스 경이 놈을 막고 계십니다. 하지만 부상을 입으셔서 즉시 증원 병력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테베논 대주교는, 기사단 주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교님! 당장 병력을 이끄십시오!"

"알겠습니다!"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단 주교가, 회의장을 빠져나가면서 뒤에 이어질 회의들은 전부 흐지부지되어버렸다.

그런 사소한 안건들을 처리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곱 기사단 소속인 크라우스가 지원을 요청할 정도라면......

"고대종 마수인가?"

테베논 대주교의 중얼거림에, 다른 주교들이 흔들렸다.

"서, 설마요. 고대종이 여태 이 시포레오의 지하에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요. 어디서 이리 흘러들어왔을 수도 있고."

"허어. 고대종이라면, 대주교님. 당장 왕실에도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테베논 대주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은 생각이오. 내 당장 왕실로 움직일 것이외다. 전령을 먼저 준비시켜주시오! 상황을 알리는 게 급선무이니!"

"알겠습니다. 연락책을 바로 출발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기사단 주교님에게도 알려주시오. 상대가 고대종일지도 모른다고."

"예. 그건 제가 가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회의가 진행될 수 없다고 판단한 테베논 대주교는.

의사봉으로 회의의 종료를 알렸다.

"이것으로 주교급 회의를 종료하겠소. 처음 상정한 안건, '로한 경의 이단 심문관 임명의 건' 만은 가결 통과하도록 하고, 나머지 안건은 이후 다시 진행하겠소!"

탕, 탕, 탕!

그 순간.

로한의 손에 끼워진 반지에.

파스슷!

검은 천둥이 일렁였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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