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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5화 (15/194)

15화. 지금 포기하면 다시 못 할 거 같아

알버트는 방금 전까지 로한에게 붙들려 있던 목을 쓰다듬었다.

'무슨 사람 악력이......'

아마 디아즈가 말려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모가지가 부러졌으리라.

사람의 팔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

알버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검 꼬락서니를 보건대, 절대 보통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맨 팔뚝으로 검을 막아 부러뜨리지 않았나.

'내 목도 이렇게 될 뻔했겠군.'

지금 반 토막 난 검을 보니,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일곱 기사단 중에서도 상위 기사들은 소국 전체와 전면전이 가능하다더니......개소린 줄 알았는데......'

솔직히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던 알버트였다.

한데 직접 그 일곱 기사단을 겪어보니, 아무래도 완전히 헛소리는 아닌듯싶었다.

자신 역시 다른 곳도 아니고 시포레오 대교구의 성기사단 수색 정찰대장이었다.

결코 허투루 볼 수준의 실력은 아니라고 어느 정도는 자신할 수준의 경지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진심으로 덤벼든 일곱 기사는, 아예 차원이 달랐었다.

위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자마자 대응을 시작했음에도 오히려 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아마 자신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을 따르고 있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의 기분일 터였다.

거대한 벽.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마주한 기분.

알버트는 로한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디아즈가 그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죽을 뻔했지."

"농담하실 기운이 있으신 걸 보니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하하......"

"한데, 이 지하에는 왜 계시는 겁니까? 산책 나오신 것 같지는 않은데."

디아즈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알버트를 따르는 성기사들.

그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출중한 자들이었다.

그녀가 아는 이들도 중간중간 보였고.

이 정도라면 시포레오 대교구에서도 핵심 부대라 칭할 만했다.

"최근 연쇄 실종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네."

"실종......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실은 아직 조사 중이라 우리도 딱히 아는 게 없어. 그래서 수색 정찰대가 파견된 거고."

"수색 정찰대가 나설 정도의 일이라는 뜻이긴 하군요."

"하하. 역시 디아즈의 그 관찰력은 대단하군. 맞아. 수색 정찰대가 나설 정도의 일이야. 아무래도 악마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악마......라 하셨습니까?

알버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래. 방금 전 말했던 실종 사건 말인데. 왕실 쪽에서도 조사를 했는데 아무래도 인간의 소행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더군. 물론 우리 쪽에서도 따로 조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결과가 같았어."

"시포레오 한가운데서 악마라니......심각한 일 아닙니까?"

"왜 아니겠나. 심각하지. 해서 민중들의 혼란이 최대한 없도록 조용히 진행 중이었네.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 악마가 나타났으니 다들 집을 버리고 도망가라, 라고 할 순 없으니 말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게 된 거지. 진짜 악마의 흔적이 있는지. 아니면 몬스터 같은 다른 무언가가 말썽을 일으킨 건지. 확실히 원인을 파악하라는 의미로."

물론 명목상으로는 단순한 정찰이지만, 대교구의 수색 정찰대가 나선 이상 이 임무 자체가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악마가 아니더라도 그 많은 실종 사건을 일으킨 상대가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

수색 정찰대 역시 어쩌면 목숨을 내놓고 정찰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앞에 보이는 로한이라는 거물급 기사가 자신들의 선봉에 서 주었다는 것이었다.

'신이 도우셨군.'

그 말 말고는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 * *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조용히 검은 천둥의 반지나 챙기러 온 것이었는데......

'더럽게 꼬이네.'

뒤로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따라붙을 줄은 생각도 못 한 까닭이었다.

몰래 움직이려 한 건데, 완전 대부대가 되어버렸다.

뒤에서 한참 이야기를 하던 디아즈가, 다시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들은 내용을 내게 전해주었다.

"해서. 지금 그들이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민했다.

'연쇄 실종 사건? 그런 내용은 기억에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시포레오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검은 천둥의 반지와는 다른 별개의 사건인가 본데? 나랑 상관없잖아? 저들이 알아서 잘 처리했으니, 말이 없었던 거겠지.'

악마 군단과의 전면전 때문에 고생한다는 내용은 있었어도.

지하 신전에서 실종 사건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 굳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곧 해결이 될 일이 아니겠나.

이곳 말고도 방방곡곡에서 다양한 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터질 것이었다.

그때마다 내가 나서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힘도 아직은 없었고.

내 볼 일이나 보고, 얼른 빠져나가자.

나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쭈욱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았다!'

나는 드디어 잊혀진 신전의 중심부에 다다를 수 있었다.

* * *

"시포레오의 지하에......이런 곳이 있었다니......"

반쯤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는 알버트를 뒤로 하고 나는 신전의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사방에 거미줄이 처져 있는 게, 오랜 세월 사람의 발자취가 없음을 대변해주었다.

나는 횃불로 그 거미줄들을 치우며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드디어 검은 천둥의 반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요 녀석!'

생뚱맞게 솟아 있는 허리 높이의 작은 진열대.

그리고 그 진열대의 위에 바로 희귀 아이템인 검은 천둥의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보던 녀석이 실제로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말이 희귀 등급이라고는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희귀 등급은 약간 아쉬울 때가 있었다.

다만 검은 천둥의 반지는 달랐다.

판매 불가와 귀속 그리고 팔라딘 클래스만 쓸 수 있는 고유 특성까지 붙은 탓에, 검은 천둥의 반지는 탈 희귀 급의 위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고.

'다른 클래스는 아예 이 신전 자체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착용해 볼 기회도 없긴 했는데......'

이 모든 게 현실이 된 지금은, 잊혀진 신전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의구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 내 추측이 증명된 것이었다.

팔라딘이 아님에도 이곳에 실제로 들어 옴으로서.

'그러니 분명 착용할 수도 있겠지!'

게임에서야 팔라딘이 지팡이를 착용할 수 없지만, 현실이 된 지금에는 그런 제약 따위 없었으니까.

내가 가만히 진열대 앞에 서자.

나의 뒤를 따르던 이들도 어느새 다들 도착을 해, 진열대를 둥글게 감싸고 섰다.

그때.

갑자기 알버트가 검은 천둥의 반지를 향해 손을 뻗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물러서!"

신전 내부를 울릴 정도의 큰 소리에, 알버트가 화들짝 튀어 오르며 물러섰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아, 아니. 가로채려 한 것은 아니오. 당연히 경이 찾은 물건인데 내가 탐내겠소?"

내가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보았다.

"당연히 내가 찾은 물건이니, 당연히 내 것이지. 다만 그것 때문에 내가 소리쳤다고 생각하나?"

"무, 무슨 뜻이오?"

나는 그의 횃불을 뺏듯이 낚아채고는, 검은 천둥의 반지 위로 던졌다.

그러자.

쩌저정!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천둥이 횃불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랬다.

검은 천둥의 반지 주변으로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검은 천둥으로 이루어진 베리어가 처져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알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네가 저 횃불처럼 되었을 것이다."

"......!"

이제서야 알버트는, 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고, 고맙소. 목숨을 빚졌군."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데 이래서야 꺼내지도 못하겠군. 막대기를 집어넣어 봤자, 밀어내기도 전에 타버릴 것 아니오?"

나도 알고 있었다.

원래 이 검은 천둥의 반지는 지금 타이밍에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저 베리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시간상 한참 후의 이벤트성 퀘스트를 클리어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건 랜덤 성으로 발생하는 퀘스트라, 어떤 회차에서는 아예 퀘스트 시작 자체도 안되기도 했었다.

'나도 이번 생에는 퀘스트가 발생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만큼 검은 천둥의 반지는 효과가 확실한 아이템이었다.

다만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생각했었다.

애초에 그 랜덤 퀘스트가 발생되는 시점은, 대악마 군단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였다.

나는 당장 내 몸 하나 건사할 힘이 필요한 상황이니,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검은 천둥의 반지는 생각도 안 했었는데.

'어차피 들르게 된 김에 와 본 거지. 그리고......하필 또 이걸 얻게 되었으니까.'

나는 내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아니, 분명히!

확신했다.

거신병의 왼팔이라면, 검은 천둥 장막을 맨손으로 뚫고 반지를 쟁취할 수 있으리라고!

이렇게 자신하는 이유?

물론 있었다.

팔라딘으로 플레이를 하면, 가장 골치 아픈 파트가 있었다.

그게 바로 암흑가의 왕 조바튼과의 일전이었다.

거신병의 왼팔을 가진 조바튼.

그에게는 이 검은 천둥조차도 통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전혀!

그 골치를 썩게 만든 힘이, 지금은 내 손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천천히 베리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옆에서 놀란 알버트가 나를 말리려 했다.

"이보시오! 로한 경! 지금 무슨......!"

하지만 디아즈는 나를 믿는지 그런 알버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는 있었지만, 입술을 꾹 씹어 다물었다.

덕분에 나는 집중을 하고 검은 천둥의 반지에 다가갔다.

파치지지지지지직!

검은 천둥이 만든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격렬히 저항하는 베리어에 모두가 마른 침을 삼켰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게임에서 조바튼은 데미지를 안 먹던데, 생각보다 손이 쩌릿쩌릿하기는 했던 탓이다.

'우으으윽!'

그래도 내 왼팔은 전기 통구이가 되지 않았다.

확실히 예상대로 거신병의 왼팔은, 전격 공격에도 충분한 저항이 가능했다.

'조금만 더......!'

이제 내 팔은 거의 팔꿈치까지 깊숙이 베리어 안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검은 천둥은 더욱 강하게 일어나며, 손이 떨리게 만들었다.

'지금 포기하면 다시 못 할 거 같아.'

단 한 번에 꺼낸다!

그런 각오로 나는 마지막 도약을 했다.

"흐읍!"

파치칙! 파치지지지직!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 전격의 폭풍 속에서.......

턱!

'잡았다!'

검은 천둥의 반지를 손에 넣었다.

그런데 내가 반지를 꺼내는 그 순간.

쿠구구구궁......!

신전 전체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꺄아아아아악!"

소름 돋는 악귀의 목소리가 지하 전체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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