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이 대화는 없었던 걸로 하지
끼이익.
조바튼이 머무는 거처의 문이 열리고.
나는 발을 밀어 넣었다.
그곳은 촛불 하나 말고는 아무 불빛도 없는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나의 뒤로 디아즈와 양아치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럼에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디아즈는 내부를 스윽 훑어보고는 내게 말했다.
"숨을 곳도 보이지 않고......아무래도 도망친 모양입니다."
디아즈의 추측은 꽤나 신빙성 있었다.
활짝 열린 채 방치된 창문.
아직은 따뜻한, 먹다 만 스프.
여러 정황들이 그녀의 발언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디아즈는 밤탱이가 된 양아치들을 노려보았다.
"좀 더 추궁해서, 놈이 도망쳤을만한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히, 히익!"
"잠깐! 잠깐만요! 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미 그녀의 힘을 한 번 체감한 놈들은, 벌써 달달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멈춰 세웠다.
"아니. 필요 없다."
"......예?"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쓰읍.
그리고 천천히 내뱉는다.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날이 섰다.
마치 닿기만 해도 베어지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덩달아 다른 이들까지도 숨을 참았다.
'아직 여기......있다......!'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 후 다시 천천히 눈을 뜨고.
아무것도 없는 벽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 모두의 눈길이 움직였다.
동시에 나는 조바튼에 대한 기억을 꺼내었다.
[뒤통수 치는 새끼들 다 제끼고 쟁취한 힘이다! 감히 내게 그따위 애들 장난 같은 공격이 통할 줄 아느냐!]
'그런 대사가 있었지.'
별거 아닌 빌런의 대사였다.
하나 지금은 그 한마디가 주는 파급력이 엄청났다.
그 말을 바탕으로, 나의 생각이 점차 크게 뻗어 나갔다.
왜?
도대체 왜 저런 말을 내뱉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우연히 얻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고유 스킬은, 신의 권능이라 불리우는 능력이었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집단인 일곱 기사단조차 구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데 이런 허름한 집에서, 저런 물 같은 스프를 먹는 놈이 고유 스킬을 구했다고?
'절대.'
나는 내 시선이 박힌 벽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 뚜벅.
지금의 조바튼은, 감히 고유 스킬에 손을 뻗을 깜냥이 되는 인간이 아니었다.
벽 뒤에 숨은 채 덜덜 떨리는 호흡이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이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제3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분명히 뒤에 다른 세력이 있다.'
확신했다.
그리고 동시에 허리춤에서 깨끗한 단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오른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벽이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잘려나갔다.
그 안쪽에서, 조바튼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 헉!"
깜짝 놀란 조바튼이, 품속에 숨겨두고 있던 비수를 휘둘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습격.
디아즈조차 눈을 부릅떴다.
"로, 로한 님!"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
벽 뒤에서 품속을 꼼지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덕분이었다.
턱!
나의 손이 놈의 팔목을 잡았다.
다행히도 내 미간에 그 비수가 꽂히기 직전에 말이다.
'......뒤질 뻔했네......'
내 뒤에서 디아즈의 주먹이, 놈에게 빠르게 날아갔다.
* * *
한편, 로한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한 명은 오리턴의 시장 로펜서 남작이었고.
도시 외곽 뒷골목의 지배자 록테르였다.
로펜서 남작은 다리를 꼬며 등을 기대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매일 보고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또 저런 태도였다.
물어보면 대답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이 감히 귀족인 자신과 맞먹으려고 하는 태도.
하나 로펜서 남작은 숨을 골랐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직접 듣고 싶은데."
"어제까지 총 59명을 죽였습니다. 이제 봉인을 깨려면 7명 남았지요. 7명의 목숨만 더 바치면, 그 안에 잠든 권능이 손에 들어올 겁니다."
"잡음 나지 않게 조심해. 괜히 소란스러워지면......완전히 끽, 되는 수가 있으니까."
로펜서 남작이 살벌한 눈빛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록테르는 씨익 웃어 보였다.
"알다마다요. 시끄러워지지 않을 놈들만 잡아 죽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 저야 돈만 잘 챙겨주신다면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까? 거래 한두 번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래. 아, 하나 더."
"말씀하시지요."
"어제, 일곱 기사단 소속 기사 하나가 영지로 들어왔다."
"일곱 기사단 말입니까? 크라우스 경을 말씀하시는지요?"
로펜서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크라우스 경은 수도에 있고. 듣기로는 새로이 합류한 자라고 하더군. 로한이라고."
"로한?......예, 뭐. 한데 그 얘기는 왜 하시는 겁니까?"
"그자가 외곽을 들쑤실 작정인 모양이었다."
여태 여유만만하던 록테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시 외곽은, 비공식이기는 해도 로펜서 남작조차 인정하는 자신의 구역이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일곱 기사단 소속의 기사라니.
"이유가 뭐랍니까?"
로펜서 남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까진 모르겠네. 내게 통보를 한 것뿐이라.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나."
뻔히 보였다.
로펜서 남작의 속내가.
이참에 그 로한인가 하는 놈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좀 정리하겠다는 것이리라.
'뱀 같은 새끼.'
록테르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애들 단속 좀 하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시장님 신변도 멀쩡하지 않겠습니까?"
"......"
명백한 도발이었다.
로펜서 남작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록테르는 피식 웃었다.
"가보겠습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예를 갖추고 사라지는 록테르.
로펜서 남작의 입 주변이 파르르 흔들리고, 주먹을 꾹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록테르가 사라진 후 옆에 서 있던 집사에게 말했다.
"조바튼 놈. 아직 안 들키고 잘 버티고 있지?"
"예. 록테르의 신임을 확실히 얻은 상태입니다. 절대로 저희 쪽 사람이란 건 모를 겁니다."
"좋아......양피지의 봉인이 깨지는 순간, 바로 낚아채서 데려와. 분명히 록테르 놈. 제가 꿀꺽 삼키려고 눈독 들이고 있을 테니까."
"이미 그리 말을 전해 놓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무래도 이번에는 기운이 좋아. 그 로한인가 하는 놈도 알아서 외곽 도시를 들쑤셔주고 있고. 역시 하늘은 내 편인 것 같군."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로펜서 남작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다 끝나면, 록테르고 조바튼이고, 다 죽여."
"알겠습니다."
* * *
"허억!"
조바튼은 어느 순간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눈알을 굴렸다.
"대, 대체......"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건 작은 촛불 하나가 고작이었으니까.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들려주며, 그에게 다가갔다.
벽 뒤에 숨어서 덜덜 떨던 그 순간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라고.
예상대로 조바튼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가 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조바튼은 불안 가득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누, 누구신겁니까! 대체!"
"조바튼."
"......!"
내가 입을 다물자.
그가 내게 물어왔다.
"나, 나를 알고 있습니까?"
그가 기절한 동안, 나는 어떤 말로 그를 구워삶을지 열심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천천히 시뮬레이션 돌렸던 대화의 물꼬를 텄다.
"눈치는 꽤 빠른 것 같더군."
"......"
"내가 오는 기척만으로, 창문도 열어 놓고 도망친 척을 하는 것만 봐도 그래. 게다가 벽에 만들어 놓은 그 비밀 장소까지. 아주 흥미로웠어."
"어,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밖에서 본 것보다, 실내가 많이 좁더라고."
조바튼의 복잡한 심정이 얼굴을 통해 드러났다.
딱 내가 원했던 반응이었다.
"그런 장소까지 만들어 둔 걸 보면,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겠지?"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는가?"
"......"
"음.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를 했던 모양이군. 그냥 이 대화는 없었던 걸로 하지."
나는 바로 몸을 돌려버렸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붙잡아라......날 붙잡아!'
이대로 조바튼이 입을 다문다면, 내 시나리오도 꼬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을 열기 위해서는 필요한 도박이었다.
어느새 나는 촛불의 반경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에 걸쳤고......
"자, 잠깐만요!"
그때, 조바튼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렇지!'
속으로는 환호를 외치며, 무신경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맞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도 눈치채고 있다고요......날 죽이려고 한다는 걸."
나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어쩌란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누굴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조바튼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미치겠어요. 이제 한계에요.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요. 이렇게 피 말리는 생활을 8년째 하고 있다고요."
"그렇게 술술 다 말해도 괜찮나?"
"조금 전에 말씀하셨죠? 저보고 눈치 빠르다고."
"그래."
"이것도 이미 눈치챘어요."
조바튼은 자신의 팔목을 묶은 밧줄을 들어 보였다.
스르륵.
그가 별 발버둥을 치지도 않았는데, 밧줄이 훌러덩 벗겨졌다.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일부러 저렇게 해둔 것이었으니까.
조바튼이 저걸 눈치채는 것까지도 내 시나리오였다.
예상대로 조바튼은 눈치를 채 주었다.
"당신이 정말 절 어찌할 생각이었다면......이렇게 해두진 않았겠죠. 저도 하나만 물어볼게요."
"말하라."
"당신은......절 살려 줄 힘이 있는 사람입니까?"
조바튼의 그 불안한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그리고 나는.
품에서 내 신분을 증명할 인장을 꺼내었다.
"글쎄. 네가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자를 원하는지 몰라서 말이지. 이 정도라도 모자란가?"
내가 꺼낸 인장을 본 조바튼의 호흡이, 잠시 멈추었다.
"이, 일곱 기사단......! 당신이?......"
조바튼의 시선이 빠르게 나와 디아즈를 왔다 갔다 거렸다.
"정녕 악마조차 덜덜 떤다는 그 일곱 기사단이 맞으신 겁니까?"
나는 대답 없이 인장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이외에 더 무슨 대답이 필요할까.
조바튼은 그것을 보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일을 내게 전부 고발하기 시작하였다.
"절 좀 도와주십시오! 로펜서 남작! 오리턴의 시장, 로펜서 남작이 몇 개월 전 오래된 고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양피지 하나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게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한 번 입을 여니, 그는 더 이상 감출 것 없이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로펜서 남작은 그 양피지에서 뭔가 특별함을 느꼈는지 조사를 시작했고, 그것이 권능이 봉인된 양피지란 걸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양피지에는 강한 봉인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악한 봉인이!"
이렇게 된 것이었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쩐지......조바튼 혼자서 벌인 일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큰 거 같더라니.
시장 놈도 연관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조바튼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66명의 산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로펜서 남작은, 암흑가의 우두머리 록테르와 접촉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적당한 돈을 쥐여주고, 산제물을 찾아오라고 말이죠."
"그래서? 네가 그 산제물을 찾는 연락책인가?"
"아닙니다. 저는 원래 로펜서 남작의 사람인데, 록테르의 세력이 커질 당시부터 그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저를 위장 잠입시킨 겁니다. 지난 8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피를 말리면서......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록테르에게 나름 신뢰받는 위치가 되었고요. 처음에는 3년만 버티라더니, 그다음은 5년. 또 7년.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겁니다."
이놈도 그간 꽤나 고생이 많았던 듯 보였다.
조바튼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하긴, 8년이나 스파이로 산다는 게 어디 쉽겠는가?
다만 그건 그거고.
내가 궁금한 건 다른 쪽이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조바튼은, 분에 찬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개같이 굴렀습니다. 8년을! 한데 이제 와서는 저를 못 믿겠다면서 죽이려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시발 새끼들......"
"이해가 되지 않는군. 갑자기 널 왜 죽이려고 하는 거지?"
"제가 완전히 록테르 쪽으로 돌아선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더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권능이 엮이다 보니 로펜서 남작도 불안했겠지요. 그도 그럴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록테르의 신뢰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조바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 양피지......지금 제 손에 있습니다!"
빙고.
나도 모르게 내 입꼬리가 싸악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