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9화 (9/194)

9화. 혼자서 싸우고 또 싸워왔을 겁니다

게임에서야 이기면 장땡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승리했다 하더라도, 희생자들이 있는 한 순수한 기쁨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는 형제 같은 동료를 잃었고, 누군가는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기사였기에, 목 놓아 우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수도원 전체의 분위기가 차분해지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때문에 하인트 교구장은, 직접 수도원 이곳저곳을 손보며 몸을 움직였다.

수장인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수도원 전체의 회복력이 더더욱 더뎌질 것이기에.

그런 그의 옆으로 몬테드가 다가왔다.

"교구장님. 좀 쉬셔도 됩니다."

"아. 몬테드 경. 아니요. 그럴 수야 없지요. 아직 이렇게 생생한데. 하하!"

"......"

몬테드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어떤 심정으로 하인트 교구장이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는지.

아마 자신이 부족한 탓에 죽어나간 성기사들에 대한 죄책감이 가장 컸을 터였다.

죽어 간 그들을 대신해 자신이 나서겠다.

그런 속내이리라.

나이가 드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씁쓸한 눈빛이 된 그에게, 하인트 교구장은 말을 슬쩍 돌렸다.

"몬테드 경은 이제 떠나십니까?"

"예. 가우론 님께서 아직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셨습니다. 저도 합류해서 보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미 예정보다도 늦은 상황입니다. 빨리 움직여야 할듯합니다."

"그럼요. 그래야지요. 맞는 말이지만, 몬테드 경이야말로 몸 상태는 좀 어때요?"

몬테드는 몇 군데 구울의 손톱에 할퀴어진 상처가 있었다.

그가 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규모 전장에서 일말의 피해도 입지 않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가벼운 상처입니다. 형제들이 회복약도 챙겨주어 문제는 없을 겁니다."

몬테드가 자신의 옆구리에 붙은 작은 가방을 두드렸다.

"다행이네요. 알겠어요. 그럼 얼른 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저, 근데 교구장님."

"네?"

"어제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어제? 무슨 말을 했던가요?"

"로한 경에 관한......"

"아. 그게 왜요?"

"진심이신 겁니까?"

몬테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하인트 교구장이 별거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

"진심이지요? 어제 그 사달을 같이 겪었잖아요? 로한 경이 그 정도 자격이 없지 않다는 건 느꼈을 테고. 아니면 제가 너무 과한 일을 저지른다 생각하시나요? 저, 그 정도 권한은 있는 사람입니다. 하하."

"권한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자칫 너무 성급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로한 경을 이단 심문관으로 들이는 것은."

하인트 교구장은 일을 하느라 구부정했던 자세를 펴며 일어섰다.

"아이고. 이제 나이가 드니, 이런 것도 오래는 못하겠네요."

"교구장님."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제가 이제 나이가 들었어요. 더는......이단 심문관의 일을 하기 힘들다는 말이에요."

"......"

하인트 교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몬테드 경의 우려. 본 교구장도 잘 알고 있어요. 그를 지켜 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나름 심혈을 기울여 내린 판단인 겁니다."

그 순간, 짧지만 하인트 교구장의 눈빛이 변했다.

과거 이단 심문관으로 활약하던 그때의 그 눈빛으로.

"악마에 대한 증오심. 분노, 응징에 대한 집착. 그걸 느꼈어요. 이단 심문관에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것들이지요."

몬테드는 등골이 살짝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로한 경은 그 모든 걸 이미 가지고 있더군요. 거기에 가공할만한 실력까지. 이단 심문관을 못할 이유가 뭐겠어요?"

"하지만, 일곱 기사단에 교단 이단 심문관까지. 그 두 권력을 동시에 손에 쥔 자는, 여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잖습니까."

이단 심문관은, 악마에 관한 일에 한해서는 그야말로 귀족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귀족은 물론이요, 세력이 강대한 귀족이라 할지라도 이단 심문관에게 잘못 걸리면 꽤나 골머리를 앓아야 할 정도로.

게다가 일곱 기사단을 함께 운영하는 대륙의 다섯 왕국은 전부 아를렘 교단을 따르고 있었다.

그말은 곧, 그 다섯 왕국 어디에서건 이단 심문관의 힘은 빛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일곱 기사단이라는 명성만으로도 이미 어디를 가든 극빈 대접을 받을진대, 이단 심문관까지?

그 두 직책을 겸임한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여태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으리란 법은 없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직 미심쩍어하는 몬테드에게, 하인트 교구장이 한 마디를 더 보태었다.

"몬테드 경. 어제 로한 경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야......실력이 좋구나, 라는 건 알았습니다."

"그래요. 실력이 참으로 좋더군요. 악마들의 공격 패턴이나, 습관. 그리고 헬파이어 버스터 같이 대형 악귀들을 상대하는 법도 잘 알고 말입니다."

"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 혼전 상황에서도 로한은 단 한 번의 공격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헬파이어 버스터를 가르던 그 일격.

다수의 구울을 한 번에 베는 것과는 다르게, 그 정도 대형 악귀를 단칼에 베려면 정확히 약점을 알아야 했다.

악마의 신체 구조까지 꿰고 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미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울컥하는 걸 느꼈습니다."

"어떤 점 때문에......"

"어제 악마와 처음 싸우는 사람이, 그런 실력을 가질 리 만무하지요.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가 무어겠습니까?"

몬테드가 하인트 교구장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많은 전투를 치러왔다는 뜻이겠군요."

"그렇지요. 그럴 수밖에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제와 같은 검은 밤. 로한 경은 혼자서 싸우고 또 싸워왔을 겁니다."

"그럴 수가......"

"예. 바로 그겁니다. 누구도 대우해주지 않고, 그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았을 겁니다. 단지 싸울 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덕분에 편히 발 뻗고 잤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림자 속에서 홀로......긴 세월을 버텼겠군요."

"그는 권능도 크게 욕심내지 않았고, 재물에 눈을 반짝이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악을 처단할 뿐!"

몬테드는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리할 수 있었을까?......'

글쎄.

확답할 수 없었다.

로한은, 얼마나 긴 세월을, 얼마나 이를 악물고 버텨왔을까?

차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깊은 속내에, 혀가 내둘러 질정도였다.

"영웅이란 게, 별거겠어요? 그가 영웅입니다, 몬테드 경.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만약 로한 경 같은 사람이 영웅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교단의 위기일 겁니다. 로한 경이 받지 못하는 대접을 감히 다른 누가 받는단 말입니까? 신께서 그를 굽어보실지언정,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에게 보답을 해야 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결국 몬테드 역시 하인트 교구장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후후. 그럴 수 있어요. 이단 심문관으로 긴 세월을,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싸워온 나였기에, 겨우 로한 경 인생의 장막을 살짝 들춰 보았을 정도니까요."

"그렇군요."

"때문에 저는 확신합니다. 그에게는 충분히 자격이 있노라고."

몬테드 역시 긍정했다.

"이제야 왜 가우론 님이 그를 지목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하하. 역시 가우론 님의 높은 안목은 따라가기 힘들지요?"

"옆에서 모시면서도 자주 깜짝깜짝 놀랍니다."

"이제는 디아즈도 그런 일이 잦겠네요."

"예. 로한 경의 옆에 있으면......그럴 것 같습니다."

몬테드는 조금 더 로한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힘들었다.

어서 가우론에게 합류해야 했으니까.

"저는 이만 출발해보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그는 스트라운 수도원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뵙지요. 로한 경.'

이곳으로 그를 데려올 때와, 지금의 마음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 * *

나는 귀를 후비적거렸다.

"누가 내 얘기 하나?......"

체력과 고유 스킬을 한 번에 너무 막 쓴 탓인지, 나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야 겨우 눈을 떴다.

흥분 상태로 날뛴 덕에 온 몸에 알까지 배긴 상태였다.

"으그그그그!"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지옥이었다.

그래도 안 죽은 게 어딘가.

바깥에서는 여전히 죽은 성기사들에 대한 추모가 이어지고 있었다.

"후......"

생에 처음으로 겪은 대규모 전투였다.

그런 것치고는 제법 잘해낸 편이라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래. 이게 어디야.'

나름대로는 전투뿐만 아니라, 목숨이 위험했던 성기사도 몇몇 구하기도 했다.

덕분에 처음과는 달리 성기사들이 나를 보는 눈빛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뭐,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오늘 떠나기로 했으니까.'

어제 격한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나는 예정을 변경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급해졌다.

'어제는 내가 아니었어도 막기는 막았을 거야. 피해는 좀 컸을지라도.'

이 스트라운 수도원은, 그렇게 빨리 무너지지 않았었다.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하기 직전에 무너졌지.

나도 그 시점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좀 굴려봤는데, 덕분에 대략적인 시간 감각은 잡을 수 있었다.

'디아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미 악마 사냥꾼으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어.'

그리고 그것은 3년 만에 이룩한 업적이라는 첨언도 있었다.

당장 이번 일이 터지고 악마 사냥꾼으로 전향했다고 치면......

'3년 남았다.'

3년이 지나면 진짜 큰 전쟁이 한 번 터진다는 소리였다.

파오갓의 스토리가 시작되던 그 대침공이.

그때 살아남으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3년이 남았다면, 유적지보다는 오리턴으로 먼저 가야겠어.'

유적지에 있는 고유 스킬은 아직 더 잠들어 있을 시간이 있었다.

반면에 라데룬 왕국 쪽에 있는 고유 스킬은, 곧 주인이 생길 녀석이었다.

'내가 먼저 가로챈다.'

조금 아슬아슬해 보여도 분명 시간상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몇 번이고 이미 계산을 끝낸 내용이었다.

나는 나름 자신 있게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오리턴에 잠들어 있는 고유 스킬은, 포기하기 꽤나 아까운 상급 고유 스킬이기도 했다.

별 거 아닌 조바튼이라는 빌런을 네임드로 만들 정도의 가치를 지닌 능력이었으니까.

안되더라도 시도는 해볼 가치가 충분했다.

간단히 앞으로의 움직임을 고민하던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뻐근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그 앞에 디아즈가 보였다.

"로한 님. 말씀하신 준비, 끝냈습니다."

"음. 고생했다."

나는 근육통을 티 내지 않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녀 역시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아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았다.

나는 돌아서서 몇 개 없는 짐을 챙기고 문을 나섰다.

이제 이 스트라운을 떠나 오리턴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