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렇게 무너져서야 되겠습니까
[강한 성기사가 되어서, 아저씨를 찾아갈게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떠올린 디아즈.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가 그녀를 만난 이후 가장 큰 동요를 보인 것이었다.
요 며칠 간 보았던 그녀는, 반쯤 죽어있는 눈으로 터벅터벅 돌아다닐 뿐이었으니까.
"이럴 수가......"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이후로 디아즈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삶의 목표를 잃었던 사람이, 또 다른 목표를 찾은 것처럼.
'어......생각보다 반응이 큰데?'
물론 지금 내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데모 버전 플레이에서 나는 그녀를 몇 번이나 구했으니까.
시간 안에 구하지 못하면 죽는 엔딩도 있었지만, 나는 이상하리만치 디아즈 구조 퀘스트만은 완벽하게 깼었다.
비록 게임이라 할지라도 애가 죽는 꼴은 보기 싫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당연히 내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이 잘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그녀의 반응은 강했다.
'하긴. 원작의 스토리대로라면, 여기서 큰 상심을 하고 용병으로 돌아섰었지.'
레아노아의 죽음은, 디아즈 인생의 노선을 완전히 바꿀 정도의 큰 사건이었다.
아마도 더 이상 성기사라는 직업에 자신을 잃고, 염증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길 벗어나기 직전, 내가 나타나 그때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성기사가 된 이유였던 내가.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강한 성기사가 되었구나. 정말로."
거짓의 미소가 아니었다.
진심이었지.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물가물 했었다.
그게 대체 몇 년 전이었던가.
솔직히 그녀의 이름을 아는 척 하던 시점에도, 일단 저질러 놓고 나중에 이유를 붙여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물로 마주하다 보니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희한하게 그녀의 어릴 적 얼굴도, 실물처럼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처럼.
그래서 웃은 것이다.
그 자그마한 아이가, 이렇게 씩씩하게 잘 컸다는 게 놀라워서.
죽지 않고 버틴 게 기특해서.
디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고생해서 되었습니다. 성기사가......"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이젠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너무 무능하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성기사가 되어서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레아노아를 말하는 것이리라.
기운을 잃은 그녀를 보며 내가 되물었다.
"나도 무능해 보이는가?"
"예? 아뇨. 그런 생각은 전혀 한 적 없습니다. 로한 님은 앤드류 경조차......"
"그때. 그 마을에서. 대다수가 죽었다. 그들을 살리지 못한 내가 무능해 보이나?"
데모 버전에서, 나는 다른 이들도 살려보고자 몇 번이고 재도전을 했었다.
하지만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탓에 나는 결국 똑같은 결과만 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거기서 끝을 냈었는데......나는 이상하게 집착했던 것 같다.
당연히 될 리가 없는 걸 마음 한 켠에서는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나도 포기를 했다.
안 된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고, 지나간 건 지나간 것이다. 언제까지 그곳에 매몰 되어 있을 생각인가?"
"......"
"그리고. 그렇게 상심하라고 레아노아가 네게 권능을 넘겼을까?"
내 말에 디아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그, 그걸 어떻게......교구장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아차.
비밀로 하고 있었구나.
나는 순간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뭐......아는 방법이 있다."
"하긴. 로한 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모습이시기도 하고......제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겠죠."
알아서 납득을 해준 디아즈.
덕분에 나는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로한 님."
그녀는 조금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나를 불렀다.
"제가, 아직 자격이 있을까요? 검을 들고 악마와 맞설 자격이?"
있다마다.
그 고유 스킬을 가지고 조금만 더 성장하면, 웬만한 악마 놈들은 그냥 일격에 서걱서걱 썰고 다니는 괴물이 될 떡잎인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긴 설명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럴 땐 오히려 말이 많은 것보다, 간결한 게 효과가 있었다.
나름 회사 생활하면서 눈칫밥 먹은 세월이 있기에, 그 정도 처신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내 끄덕임을 본 디아즈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 그럼 로한 님을 믿어보......"
그녀의 말이 끝나기 직전.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쉿."
디아즈는 호흡까지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청각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미세한 진동과 소음이 흘러들어왔다.
무언가......진군을 하고 있는 듯한.
다급히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악마가 다가오는 냄새가 느껴졌다.
* * *
스트라운 수도원의 북쪽 문에서는 갑작스러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악마 놈들!"
"이 개자식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썩 물러가라!"
어둠을 틈타 느닷없이 이루어진 구울 떼의 습격.
다행히 잘 훈련된 스트라운 수도원의 성기사들은, 쉽게 쓸려버리지 않고 대응을 시작했다.
뿌우우우우!
나팔을 울려 수도원을 깨우고.
실제 상황임을 깨달은 성기사들은, 바로 전투 준비를 마친 채 곳곳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하나......
"케에에엑!"
"쿠륵!"
"캬아아아아아!"
구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신성력을 끌어올린 성기사들이 선전을 하고 있었지만, 셀 수 없는 구울 떼를 막는 것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밀고 들어온다!"
"뚫리면 끝이다! 버텨!"
"아악! 파, 팔이 뜯겼......커억!"
방어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그 순간.
"자자. 이 스트라운이 이렇게 무너져서야 되겠습니까?"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구장님!"
"물러서 주십시오, 교구장님! 몸을 보전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인트 교구장은 고개를 저었다.
"잊으셨습니까? 이 스트라운 교구의 모든 성직자들은 전부......성기사라는 것을! 저 역시 아직 성기사이지요."
하인트 교구장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태양과도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크르르르르!"
"캬아아아!"
"크륵! 크륵!"
주변의 어둠을 모두 집어삼켜 버리는 강렬한 빛.
그에 구울들이 짐승같은 괴성을 질러댔다.
다만 다가오기는 힘든지, 주춤주춤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인트 교구장의 바로 뒤로, 몬테드와.
일곱 기사단의 일원 앤드류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제 막 잠들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지긋지긋한 놈들. 어휴......"
그는 새로운 검을 어깨에 들쳐 맨 채, 눈을 비비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핏.
사라지는가 싶더니, 구울 떼 한가운데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참격은, 보통의 검사와는 달랐다.
휘둘러질 때마다 매캐한 탄 내가 일어나고.
펑! 퍼퍼펑!
벨 때마다 폭발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바로 앤드류의 고유 스킬, 폭염 베기였다.
"오오! 폭염의 기사!"
"하하하! 그래 싹 쓸어버리라고!"
"역시......평소에는 쓰잘데기 없어 보여도, 검술 하나는 발군이군."
앤드류의 분전에 성기사들 역시 손발을 맞추어 길을 뚫어 나갔다.
상황이 반전되자 성기사들 중 몇몇이 농담을 던졌다.
"내 욕하는 놈 다 기억해둘 거야!"
앤드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맞장구쳤다.
어릴 적, 몬테드의 밑에서 함께 지냈던 그들이기에 이렇게 한 몸 같은 연계가 가능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몬테드는 일갈을 내질렀다.
"아직 전투 중이다! 집중을 놓지 마라!"
"예!"
"알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결집이 된 스트라운 성기사들.
그들의 군세가, 구울 군단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하나, 언제나 그렇듯.
모든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외침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헤, 헬파이어 버스터! 헬파이어 버스터다!"
중급 악귀, 헬파이어 버스터.
5m에 달하는 거대한 그 몸체가, 나무 사이에서 달빛에 드러났다.
벌레처럼 여섯 개의 다리로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놈들은, 입에서 헬파이어 덩어리를 쏘아내는 악귀였다.
퍼엉......!
"오, 온다! 피해!"
"젠장할!"
"으아아아아아!"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진 헬파이어가, 성기사 진영을 덮쳤다.
화르르륵!
지옥의 불길이, 사방을 불태우며 지독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으악! 으아아아악!"
"케에에엑!"
"크룩!"
헬파이어는 피아 식별 따윈 없이, 구울이건 성기사건 모조리 태워버렸다.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절대 꺼지지 않으며.
그러나 구울들은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결국 몰아치는 구울 떼와 지옥의 불은, 성기사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캬아아아악!"
"크르르르!"
구울들의 진격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 * *
한 번 무너진 빈틈은, 거침없이 그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하인트 교구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겠구나.'
평소에는 웃는 표정만 짓던 그가, 인상을 쓰니 생각보다 무서운 얼굴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과거 이단 심판관 시절 그의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 일선에서 물러나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그 표정이 다시 슬금슬금 기어 올라온 것이다.
그만큼 지금 이 전선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다.
헬파이어에 휩쓸린 성기사들이, 뼈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했다.
심지어 근방에 있던 이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자그마한 불씨라도 닿은 이들은 하나같이 작렬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아아아아악!"
"사, 살려......아니, 죽여 줘......"
"개소리 하지 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인트 교구장은 자신의 무능함에 신물이 났다.
물론 그의 검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빛으로 휘감긴 대검을 휘두르며 구울들을 베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죽은 이들을 살릴 힘도 없었고, 부상자들을 구원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직 남아있는 이들을 지키는 것뿐.
"생존한 부상자들을 내 뒤로 데려오세요! 나를 선봉으로 다시 전선을 구축합니다! 내 뒤에서 응급처치부터 하세요!"
"예, 예!"
"아, 알겠습니다!"
성기사들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걸.
다만 교구장의 말이니 믿고 따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하인트 교구장의 새하얀 의복은, 구울들의 검붉은 피로 점점 더 붉게 물들어 갔다.
그런 그의 옆으로 몬테드가 따라붙었다.
"교구장님! 돕겠습니다!"
"그래요. 얼른 이 빌어먹을 구울 놈들을......"
그 순간.
저 멀리에 있던 앤드류가 다급히 외치는 게 들렸다.
"피하세요! 피해! 피하라고!"
하인트 교구장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아니, 말을 잊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그것은 몬테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앤드류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샌가 날아온 두 번째 헬파이어가 이미 지척에 있었던 것이다.
몬테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하. 젠장......"
하인트 교구장 역시 입 밖으로 욕지거리만 내뱉지 않았을 뿐.
같은 심정이었다.
저 지옥의 불덩어리를 막을 방법은......이제 없었다.
이 한 몸 내던지더라도,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성기사들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정말이지 무능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끝......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던 그때.
서걱!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들리더니, 헬파이어가 눈앞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하인트 교구장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좌우로 찢어지며 작렬하는 헬파이어의 섬광 중앙으로, 한 사람의 등이 보였다.
"로, 로한 경?......"
새로운 일곱 기사단의 기사, 로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