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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4화 (4/194)

4화. 좋은 검이군

나는 천천히 스트라운 수도원을 둘러보았다.

굉장히 고즈넉해 보이는 수도원이었다.

평화롭고, 조용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스트라운 수도원은, 이것과 달랐다.

사방에 해골이 굴러다니고, 벽에는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느 하나 성한 건물도 남아있지 않은 채, 박살이 난 모습뿐이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자각할 때쯤.

몬테드가 한마디를 하고 자리를 비웠다.

"피곤하시겠지만, 일단은 먼저 하실 일이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함께 할 부관을 고르는 것이지요. 로한 님을 모실만한 기사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로한 님의 부관이 될 것이니, 함께 할만한 사람의 기준을 생각해두시기 바랍니다."

나는 몬테드가 오는 길에 해준 설명을 떠올렸다.

'일곱 기사단과 아를렘 교단의 성기사단은 별개의 집단이지만, 일곱 기사단의 부관은 성기사들 중에서 뽑는다고 했지?'

가우론에게 몬테드가 있듯, 나를 도울 부관을 지금 바로 결정할 모양이었다.

"일단은 가볍게 샤워 정도 하고 잠깐 휴식하시지요. 그동안 저는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하지."

몬테드는 잠깐 사라지더니 수도승 하나를 달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수도승에게 나를 부탁했다.

나는 수도승을 따라 작은 빈방 하나로 안내를 받았다.

"편히 쉬십시오."

"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딱 내 원룸 방만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방의 크기 같은 건 전혀 상관없었다.

몇날 며칠을 노숙했던가.

이 정도 구색만 갖추어져도 감지덕지할 수준이었다.

"일단 좀 씻자......후우."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내 얼굴을 마주했다.

뭐 근데......나쁘지는 않았다.

"잘 생겼네. 후훗."

대충 씻고 나오니 이미 몬테드는 준비를 마친 채 대기 중이었다.

"가시지요."

"음."

하여간 이 세계는 정신없이 사람 굴리는 데 뭐가 있는 듯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나는 다시 다음 스케줄로 향하였다.

몬테드를 따라 들어선 수도원의 내부.

외부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화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웅장한 기분이 드는, 묘한 곳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몬테드의 등에 대고 물었다.

"일곱 기사단의 다른 기사들도 모두 여기 있나?"

"아닙니다. 교단 출신 일곱 기사인 앤드류 경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모두, 평시에는 조국에서 머무십니다."

"그렇군."

좋은 소식이었다.

괜히 신입이랍시고 관심을 가져주면 부담스러울 테니까.

그렇게 걷던 중, 몬테드가 작은 방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나는 눈앞에 나란히 선 세 명의 성기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몬테드는 그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나같이 실력이 검증된 이들입니다."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중년의 기사.

그리고 딱 봐도 위압감이 들 정도로 큰 거구의 기사.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젊은 기사 하나가 있었다.

마지막 기사는 최근 부상을 입었었는지,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쓱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아직 기사들은 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장 덩치가 큰 두 번째 기사였다.

"몬테드 님. 부르셔서 오기는 했지만......무슨 일입니까?"

반걸음 걸어 나오면서 물어왔는데, 손바닥이 무슨 솥뚜껑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 갑옷을 입혀두면 최소 두 배는 더 커 보일 것 같았다.

그런 그가 나서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몬테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를 갖추거라. 이 분이 바로 새로이 일곱 기사에 오르실 로한 님이시다."

"흠."

"지, 지금 뭐라고 하신......여태 한 번도 존재 한 적 없던, 일곱 기사단의 일곱 번째 기사라고......"

"......!"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는 셋이었다.

다만 놀라는 것은 매한가지인듯했다.

나도 여기 서 있는 내가 놀라운데, 저들이라고 다르겠는가.

"뭐라고 했는지는 들었잖느냐. 물론 교구장님께도 이미 말씀 올려두었다."

"바, 바로 허가하신 겁니까?"

그들의 대화 맥락을 보니, 일곱 기사라는 게 이렇게 후다닥 정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봐도 이건 너무 빠르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래. 바로 허가를 내리셨다. 가우론 님의 추천이다."

그제서야 여태 조용하던 중년 기사가 입을 열었다.

"가우론 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때문에 교구장님께서도 인정을 하신 거고."

"음. 그렇게 많은 실력자들도 전부 마땅찮아 하시던 가우론 님이셨는데......"

이제 기사들의 시선이 몬테드에게서 내게로 돌아갔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런 결정을 했느냐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다는 게 옳은 소리겠지.

'쟤, 쟤가 왜 여기 있어?......"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 때문이었다.

* * *

최대한 눈동자의 움직임을 숨기려 조심히 움직이느라 세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자리에 서 있는 부상당한 기사.

'왜 남장을......?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일단은 모르는 척해야겠지?'

남자인 척하고 있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스름의 사냥개라는 별명을 가진 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앞으로 가지게 될 사람이었지.

그녀는 파오갓에서 중반부 이후, 악마 사냥꾼으로 등장하는 자였다.

'이름이......디아즈였던가? 과거 성기사였다는 설정을 본 거 같긴 한데. 여기였을 줄이야......'

그녀는 악마 사냥꾼들 중에서도 네임드 캐릭터였는데, 네임드인 만큼 강력함을 자랑하는 자였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던 자이기도 했었고.

그녀는 어떤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고르든, 항상 적으로 만나게 된다.

중반부에 들어서자마자 디아즈와 이벤트 전투가 발생하는데, 그게 문제였다.

적당히 세야지 세도 너무 세니까.

덕분에 거기서 막힌 유저들의 불만도 상당했던 걸로 기억한다.

대신 몇몇 챕터에서는 아군으로 움직이기도 하는데, 그러면 또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는 인물이기도 했었다.

디아즈의 강함은 그녀가 가진 고유 스킬에서 나왔다.

그녀의 고유 스킬은.

'자비 없는 공격자.'

이름 그대로 자비가 없는 고유 스킬이었는데.

파오갓에 구현된 능력은 체력 비례 데미지를 먹이는 능력이었다.

그러니 플레이어가 제아무리 발악을 해도 상대가 어려웠던 것이고.

또한 동시에 그 고유 스킬 때문에 후반부에 가더라도 공격력 하나만큼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성기사 시절, 악마에게 살해당한 주군에게 물려받은 능력이라 그랬지?'

추측건대, 그 성기사 시절이 바로 지금인듯했고, 주군이 죽은 것 역시 아직 얼마 지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주군이 죽었으니 내게 배정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저 상처들과 퀭하니 죽은 눈빛도 그 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천재를 끌어 올 기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절호의 찬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작 공간 베기 하나로는 불안 요소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디아즈가 뒤를 봐준다면?

그건 아예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목숨 하나 정도는 보너스로 생기는 걸 테니까.

'안 되면 말고.'

그리고 만약 그녀가 거절한다면, 아쉽지만 다른 부관을 뽑으면 될 일이었다.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도전.

나는 넋이 반쯤 나간 그녀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아직 정식으로 소개받지도 않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디아즈. 너로 정했다."

내 부름에 디아즈가 화들짝 놀랐다.

"제, 제 이름을 어떻게?......"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몬테드를 쳐다보았다.

이름을 알려줬느냐는 물음이 담긴 표정으로.

하지만 몬테드는, 자신도 신기하다는 듯 갸웃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금 디아즈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다면, 알려 주마. 단, 내 부관이 된다면 말이지."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아오. 내가 진짜. 이럴 줄 알았다니까?"

* * *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내는, 몬테드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몬테드 님. 아니, 이러시는 게 어딨느냐고요. 부관 선발 신청은 제가 먼저 했잖아요."

금발의 단발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잘생긴 얼굴이 그 머리 스타일을 멋들어지게 꾸며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얼굴빨이구나 싶을 정도였다.

약간 날티 나보이는 게 조금 흠이기는 했지만.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지금 공백인 자리가 있기는 해도, 말도 없이 갑자기 새로운 기사라니. 너무 한 거 아니에요?"

하나 몬테드는 이런 일을 자주 겪었는지, 너무나 침착하게 굴었다.

"일곱 기사단의 기사 임명권에 불만을 표시할 권한은, 앤드류 경에게는 없습니다."

"나 그래도 일곱 기사단 일원인데......"

"그래도 없습니다."

완전 단호하기 그지없는 몬테드.

그에 앤드류는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

"너무하네 진짜. 에휴. 어쨌든, 그래도 부관 선발 건은 내가 먼저 신청 올렸어요. 잭이 죽은 후로 나도 계속 부관 없이 움직이고 있다고요."

얼굴은 몬테드를 향하고 있었지만, 앤드류의 눈은 나를 향했다.

"디아즈는 내 부관으로 이미 결정했어요."

"결정된 바 없습니다."

"엥?"

"일곱 기사 분들과 달리 부관들은 전부 성기사들입니다. 성기사의 거취는 당연히 교구장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고."

"아, 아니. 교구장님께서 그때 분명히......"

"교구장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고."

"......"

대화할 틈이 없어서 몰랐는데, 몬테드 이 사람 말빨이 장난 아니었다.

앤드류의 입이 결국 완전히 다물어졌으니.

그는 잠시 나를 째려보더니.

"가우론 님이 직접 뽑은 인재라고?......"

무언가 섬광이 번뜩이며, 공기를 찢을 듯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칼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쏴아아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동공 바로 앞에 칼끝이 겨누어져 있었다.

살짝만 흔들려도 눈이 찔릴 것만 같았다.

나는 얼어붙은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와 씨......깜짝이야!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네......!'

긴장을 놓았으면 지렸으리라.

언제 검을 뽑았는지, 보지도 못했다.

뽑는 것도 못 봤는데 눈앞에 떡하니 겨눠져 있었다.

이게 일곱 기사단의 수준인가?

차원이 달라도 아예 다른 경지였다.

이거 작정하고 찔렀으면 그대로 사망이다, 라는 걸 체감한 탓이었다.

'여기 온 거......틀린 선택일지도 모르겠는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새로운 고유 스킬과, 새로운 부관이 지척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을 내지른 앤드류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

뭔가 놀란 것 같은데......왜 저래?

한편,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몬테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앤드류 경!"

처음으로 분노가 섞인 목소리를 내지른 몬테드였다.

그 외침에 나까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그러다 쟤가 놀라서 내 눈 찌르면 어쩌려고.'

다행히도 앤드류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내 눈앞에 세워져 있었다.

앤드류는 그제서야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하. 몬테드 님도 참. 그냥 친목을 위한 인사 가지고 뭐 그렇게 화를 내세요?"

"무례가 도를 지나치지 않았습니까! 이 분은 가우론 님과 저의 손님이란 말입니다!"

"알겠다고요. 알겠어요."

앤드류가 검을 회수하려 하자, 나도 조금은 의사 표현을 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또 이런 꼴 당할라.'

나는 재빠르게 이가 다 빠진 단검을 허리춤에서 뽑아들었다.

그러자, 검을 물리려다 멈춰선 앤드류.

나는 단검으로 앤드류의 검을 툭툭 쳤다.

공간 베기를 몰래 실어서.

내 단검이 순간적으로, 앤드류의 검날을 절반 넘게 파고들었다.

스으윽.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내게 집중하느라 보지 못한 듯했다.

나는 조금도 쫄지 않았던 것처럼 무심하게 한 마디 해주었다.

"좋은 검이군."

그리고는 방을 나갔다.

내 뒤로, 균열의 소음이 들려왔다.

뚜둑.

반 넘게 잘린 앤드류의 검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챙그랑......!

날이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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