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덜컹, 덜커덩!
쿠션감 하나 없이 거칠게 흔들리는 몸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으음......출근하는 중이었나?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흔들려? 무슨......'
이런 기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잠이 솔솔 오는 이 흔들림......꼭 두돈반 트럭 같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생각에, 스스로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군용 트럭이라니.
떠올리기만 해도 열 받는 소름 돋는 기억에 잠이 달아났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게 뭐야......'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건 사방으로 펼쳐진 뿌연 안개였다.
그리고 안개 사이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수목들.
내가 눈을 뜬 곳은, 숲길을 지나가고 있는 이상한 마차 위였다.
마차 위에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다들 세상 어두운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들 있었다.
이건 차라리 재입대하는 꿈이 나을 지경이었다.
'돌겠네. 자다가 납치라도 당한 거야?'
모르긴 몰라도 내 자취방과는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눈을 뜨기 전, 마지막 기억들을 되살려보았다.
분명히 퇴근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와. 파워 오브 갓? 이거 진짜 재밌었는데.]
옛 추억에 잠겨 오래간만에 레전드였었던 게임을 꺼내고 설치를 했었다.
한때 피시방 전체를 점령했던 그 게임을.
꽤 옛날 게임인데 놀랍게도 설치가 되어서 캐릭터 선택 화면까지 잘 넘어갔었다.
'그래. 거기서부터 뭔가 이상했는데.'
게임이 켜지고 캐릭터 선택창에 들어가니, 분명히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이상한 신 캐릭터가 보인 것이다.
호기심에 또 그걸 클릭했는데, 확실히 처음 보는 패시브를 가진 캐릭터였던 게 떠올랐다.
[패시브 : 악마를 증오하는 자 - 악마를 증오하는 자는, 사악한 족속들의 냄새조차 역겨워하며 놈들을 남김없이 도륙하리라.
그 증오로 말미암아 신의 기쁨을 사게 될지니, 그 대가로 셀 수 없는 신의 권한을 손에 쥘 것이로다!]
'재밌어 보여서 선택까지 했지. 맞아, 그랬어.'
추억의 게임 속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필드를 휘저을 생각에 나는 꽤 흥분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그 이후 플레이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대로 컴퓨터가 멈춰버린 것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나서......'
그래.
소름 돋는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마우스와 키보드가 전혀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고.
나는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눌러 컴퓨터를 강제로 꺼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전히 모니터에서는 신 캐릭터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캐릭터가 모니터에서 튀어나와 나를 집어삼켰던 것 같은......
"......"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너무 놀라서 기절했던 걸까?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계속 기절해 있었다니.
그래도 아예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일단은 옆 사람한테 물어라도 보자.'
나는 내 옆에 앉은 사내에게 얼굴을 돌렸다.
내 옆의 사내는, 굉장히 말 걸기 껄끄럽게 생긴 사람이었다.
얼굴을 뒤덮은 문신과 흉터들까지.
딱 봐도 한 성깔 할 것처럼 생긴 인간이었다.
하나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어이."
긴장한 건가?
나도 모르게 반말이 툭 튀어나왔다.
당황할 틈도 없이 상대방이 반응을 해왔다.
"뭐? 어이? 딱 봐도 군대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 놈이, 어이? 지금 그거, 나한테 지껄인 거냐?"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괴팍한 인간이 분명했다.
근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군대 밥이라니?
나는 이상함을 느끼며 대꾸를 해냈다.
"그래."
"이 새끼가 초면부터......하. 아니다. 어차피 뒤질 말단끼리 뭐 하겠냐. 운 좋은 줄 알아라 새끼야. 안 그래도 심란하니까, 그냥 조용히 가자, 응?"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익숙하지 않은 말투가 자꾸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한데 희한하게 익숙하지 않으며 동시에 익숙했다.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물론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코앞에서 눈을 부라리는 괴팍스러운 인간과, 납치당한 지금 상황이 더 급했다.
"뭐? 복무하게 될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고? 무슨 이런 폐급......아, 아니다. 그만 여물고 좀 가자. 어? 어차피 뒤질 건데 뭐가 그리 궁금해?"
사나워 보이는 옆자리의 사내는 거기까지만 말을 하고는, 등을 돌려 앉았다.
그런데 어차피 뒤진다니?
아무래도 이거, 진짜 위험한 곳에 납치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물어봐도 대답해 줄 거 같지도 않고......
그때, 맞은 편에 앉은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이상한 청년이군. 이 마차 위에 타고 있으면서 어디로 배치되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내 시선이 정면의 노인에게 돌아갔다.
노인은 옆자리의 사내와 달리, 머리까지 정돈된 말끔한 모습이었다.
지금 보니 화려하진 않아도 옷 자체가 고위 관리자 같은 느낌도 들었고.
"......"
"허허. 진짜 모르는 모양일세? 이 마차 종착지는 후안 요새일세. 설마 후안 요새도 모르진 않겠지."
나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것이 노인에게는 곧 대답이 된 모양이었다.
"후안 요새는 알고 있나 보구만."
알다마다.
너무나 잘 알다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납득이 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후안 요새는 다름 아니라......
'파워 오브 갓에 나오는 지역이잖아......'
내가 아는 세상에는 실존하지 않는 곳이었다.
* * *
후안 요새.
속칭 해골성.
후안 요새에 그러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으로 배치되는 병사들이 전부 얼마 못 가 죽어나가기 때문이었다.
제작자 중에 어떤 놈이 쓸데없이, 후안 요새에 배치된 신참 하급 기사들의 전장에서 평균 수명은 고작 16분이라는 개 같은 설정을 넣어두었다는 것도 떠올랐다.
'후안 요새라니......그럼 뭐야? 여기가 지금 파오갓 세계라고? 허......'
게다가 진짜 재입대까지 하는 상황이라니.
'이런 개꿈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네.'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내가 아무리 재입대하는 꿈을 자주 꿨다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납치 정도가 아니라 한 차원 위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건, 타당한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조금은 다른 앉은키의 눈높이.
가만히 보면 손의 모양도 달랐다.
'후안 요새라는 이름에다가 달라진 체급까지.......설마 그 신캐가 튀어나왔던 게 꿈이 아니라고?......그렇다면......이제야 앞뒤가 맞아.'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끼워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신캐가 된 것이다.
'그래. 모든 튜토리얼을 다 기억하고 있는데......이런 상황은 없었단 말이지. 내가 모르는 튜토리얼은......신캐 뿐이다.'
한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후안 요새에 배치된 병사들의 평균 수명이 짧다느니 하는 건, 전부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플레이어가 마주하는 후안 요새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러고 보니 거기는 사냥터였는데? 잠깐만......이거 어떻게 된 거야?'
후안 요새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언데드들이 득실득실한 곳이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후안 요새가 언데드에게 점령되기 전이라고? 흠......'
하지만 길게 고민할 시간은 내게 없었다.
일단 후안 요새 안으로 들어가 부대에 배치가 되면,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뿐.
'그래. 이 고민은 일단 도망가고 나서 해도 충분하니까.'
사고 한 번 안 치고 만기 전역에 예비군까지 마친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여긴 내 나라도 아니고.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을 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보기도 하고.
다리를 들썩거려 보기도 했다.
당장 통증이 느껴지거나 불편한 곳은 없었다.
오히려 굉장히 힘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건강하다고 체감한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하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영웅이 될 운명을 가진 자들이었다.
당연히 예전의 나보다는 훨씬 강할 터였다.
체감상, 영화 속 슈퍼히어로인 박쥐맨의 노템 버전 정도의 체력은 되지 않을까.
그 정도의 무술 실력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하드웨어는 업그레이드되었는데, 몸을 컨트롤 할 소프트웨어는 원래의 나 그대로였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역시 보는 눈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소란이라도 일어서 이목이 쏠리면 몰라도......
당장 혼자서 자력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 같았다.
그때.
내 눈에 맞은 편에 앉은 노인의 손등이 이상하리만치 확 들어왔다.
'저 문신......분명......'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어느샌가 노인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이보게, 젊은이. 이걸 아는 모양인데?"
"......"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고요히 노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나는 저 문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침묵을 유지하는 내게,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겐가? 그럼 어쩔 수 없지......강제로 듣는 수밖에."
그 순간이었다.
안개 저 앞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은.
"으아아악!"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앞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피 냄새가 바람에 실려오는 것 같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마부석의 병사가, 칼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그는 검을 세워 들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의 위로 머리 하나가 날아왔다.
쿵! 데구르르......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전 마부석에 앉아 있던 병사임을.
노인은 혀를 찼다.
"쯧. 아무래도 지금 대화하긴 조금 바쁘겠구먼. 잠시 미뤄야겠어."
다음 순간.
쿠아아아아!
섬뜩한 기운을 담은 강풍이, 마차를 집어삼켰다.
* * *
눈을 뜨고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
그 사이에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일이 연달아 터졌다.
게임 속에......재입대에......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엄청난 강풍에, 마차가 통째로 공중에 부웅 떠올라서는 뒤집힌 채 날아가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재빠르게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뒤집어진 채로 바닥에 추락한다면, 부대에 들어가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기에.
온 힘을 다해 튕겨 나가지 않도록 마차를 붙잡았다.
다행히도 내 악력은, 나를 날아가지 않게 할 정도는 되었다.
곧 마차가 추락하고.
콰당탕! 콰가가가가각!
바닥을 쓸었다.
얼굴을 향해 모래 알갱이와 작은 돌멩이들이 연신 날아들었다.
"흐읍!"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나는 버텼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섰다.
그제서야 나는 온전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엉망진창이 되어 뒤집어진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마차가 뒤집어진 탓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을 더듬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목이 부러진 채 축 늘어진, 성질 고약하던 사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미 죽은 듯 보였다.
그런 그의 품에서.
툭.
볼품없는 작은 단검 하나가 떨어졌다.
이는 나갈 대로 나갔고, 크기도 고작해야 한 뼘 정도였다.
그럼에도 내 눈에는 그 단검이 너무나 소중해 보였다.
단검은 아슬아슬한 거리에 있었다.
나는 어깨가 빠져라 힘껏 손을 뻗었다.
내 손에 단검이 닿았다.
'이 앞에 있는 곳이 진짜 후안 요새가 맞다면......'
짧은 시간 동안 얻은 모든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갔다.
코앞에 시체를 두고도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지금 내가 정신줄을 놓는다면......죽는 건 나였다.
'그리고 악마를 증오하는 자의 패시브가 진짜 내 것이 된 거라면......!'
나는 기절하기 직전, 패시브 아래에 쓰여있던 이 몸의 고유 스킬을 떠올렸다.
[고유 스킬 : 공간 베기 - 검을 이용해 공간 그 자체를 베어 버린다.]
'공간 베기! 그 권능 역시 내 것이어야지!'
나는 지체 없이 단검을 비틀어 쥐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공간 베기를 쓰면 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스윽!
내 몸을 짓누르는 마차의 부서진 판자를 베었다.
이 보잘것없는 단검으로 나무를 베었음에도, 베어지는 느낌조차 없을 정도로 가벼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마차를 날려버리고, 마부를 죽인 놈의 발소리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기에.
예상대로 놈은 마차의 바닥면을 부수고 들어왔다.
콰지직!
뿔이 돋은 해골의 형상을 한 악마가 그 끔찍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크하하하하. 이럴 줄 알았다. 역한 생기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내 코를 속일 순 없지. 역겨운 냄새가 나더라니!"
나는 나도 놀랄 정도의 싸늘한 눈빛으로 놈을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을 했는지는 나 역시 알지 못했다.
다만 더러운 악마 놈을 보고 있자니, 차마 고운 눈을 할 수가 없었다.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분노에 내 이가 갈렸다.
"역겨운 건 네놈이다"
차갑게 식은 짧은 말과 함께.
나의 손이 가로 그어졌다.
스윽......!
"어어? 억......!"
또다시 공간이 베어지고.
털썩.
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