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207 탑승형 로봇 [기간테스]의 몸체를 구성하는 초희귀 금속 '실버미슈릴'은 마법적인 금속으로, 기본적으로 매우 단단하지만 가공에 따라 추가적인 기능을 부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무결의 [트리슈라]는 그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형태변화' 기능을, 그리고 강하나의 [엘리자베스]의 경우에는- 화르륵.
강하나의 몸처럼 뛰어난 정령감 응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기간테스 [엘리자베스]가 그 붉은색 도장처럼 빨갛게 작열 하고 있었다.
쾅! 콰쾅!
[엘리자베스]와 정식 명칭 '자이언트 아이스 트롤', 속칭 '얼음트롤'이 서로 날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덩치도 큰 게 뭐 이렇게 빨라?'
강하나는 키가 20미터나 되는 주제에 속도가 너무 빨라 반응하기 조차 벅찬 얼음트롤을 상대하며 식은 땀을 흘렸다.
요즘 들어 등장하는 네임드 몬스터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기본적으로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그 속도와 인지능력이 헌터들의 스테이터스 성장치를 웃도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저 전문 무술인 같은 체계적인 전투 동작은 뭐란 말인가!
이 얼음트롤은 저 난폭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움직임의 불꽃트롤보다 절제되고 세련된 움직임으로 강하나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무결 씨 말대로 무공을 연마해두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무결은 자신을 비롯해 알고 지내는 헌터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무공을 익혀둘 것을 권해 왔다.
가면 갈수록 무공의 필요성을 느낄 거라면서.
그의 말이 들어맞고 있었다.
강하나도 무결의 권고대로 자신과 상성이 맞는 유니크 무공인 [오행신공]을 천신만고 끝에 얻어 익혔다.
아직 얻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킬 능력치가 많이 낮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정령술을 사용하는 것도 한층 수월해지고, 지금 저 얼음트롤의 번개처럼 빠른 움직임에도 반응하고 있었다.
세상을 한발 앞서 인식할 수 있는 인지능력.
그것이 강하나와 얼음트롤의 전투를 성립하게 하고 있었다.
후웅-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놈의 주먹이 [엘리자베스]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다.
정확히 강하나가 탄 곳을 노리는것이, 기간테스라는 탑승병기에 강하나가 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강하나는 체술을 발휘해 [엘리자베스]의 팔꿈치로 그 공격을 받아 냈다.
펑!
팔꿈치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극한의 냉기와 초고온의 열기가 맞닿으며 발생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한차례 놈과 맞붙고 나온 강하나의 [엘리자베스]의 팔꿈치가 얼어붙어 있었다.
'내 정령의 열기보다 저 녀석의 냉기가 더 강해.'
강하나가 얼어붙었다가 녹아내리는 [엘리자베스]의 팔꿈치와는 달리 멀쩡한 얼음트롤의 주먹을 노려보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열세였다.
[엘리자베스]를 이용해 능력을 증폭시키고 있었지만 속도에서도, 능력에서도 녀석을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특히 그녀에게는 아직 약점이 남아 있었다.
'이번엔 오른쪽! 기회다!'
그녀의 인지능력이 놈의 왼발의 움직임을 한발 앞서 포착했다. 카운터를 먹일 좋은 기회였다.
'발차기를 피하는 동시에 지지하는 다리를 걷어차 쓰러뜨려야겠어!'
그녀가 재빨리 [엘리자베스]를 조종해 놈의 발차기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으윽! 이놈의 팔이!'
오른팔의 의수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는 바람에 명령 입력이 늦어졌다.
보통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할, 미세한 동작의 딜레이.
그것이 이번 공방의 승패를 갈랐다.
쾅!!
얼음트롤의 돌려차기가 [엘리자베스]의 오른팔에 작렬했다.
미처 회피 동작을 전개하지 못한 강하나가 방어로 명령을 바꾸며 일어난 충돌.
그러나 급하게 동작을 변경시킨 탓에 자세가 불안정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연이어 들어오는 얼음트롤의 스트레이트를 그대로 어깨에 받아버렸다.
콰직.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그대로…… 놈의 손에 꿰뚫려 버렸다.
[엘리자베스]가 놈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으나.
콰콰콰콰- 꿰뚫린 어깨에서부터 엄청난 양의 얼음이 흘러나오며 순식간에 어깨를 비롯한 가슴부.
즉 강하나의 콕핏 전체를 얼려버렸다.
[엘리자베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 * *
"아악! 저놈, 막을 수 없어!"
"다들 물러나서 2차 저지선을 형성한다! 일단 도망쳐!!"
불꽃트롤, 정식 명칭 '자이언트 파이어 트롤'을 막고 있던 방어선이 뚫렸다.
헌터들이 방어선 재구축을 위해 자리를 이탈하고 있었다.
사방이 불교에서 말하는 초열지옥(焦熱地獄)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젠장.'
한서후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를 비롯해 수많은 헌터가 놈을 사냥하기 위해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놈의 다리를 잘라 냈지만, 놈은 포효 한 번 하더니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꽃들을 흡수해 다시 다리를 재생해 버렸다.
그때 헌터들은 깨달았다.
저 열기를 어떻게 하지 않고는 놈을 잡을 방법이 없음을.
그 순간부터 수많은 마법사와 초능력자들이 저 불과 열기를 제압 하고자 온갖 시도를 다해봤다.
불을 꺼뜨리기 위해 수백의 마법사가 대규모 물 마법을 시전해 보았고, 불을 불로서 제압하기 위해 한 정령사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불의 환수를 소환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소용이 없었다.
물은 저놈의 열기에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고, 불의 환수는 놈에게 제압당한 후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놈은 손조차 대지 않고 불의 환수를 온몸으로 '흡수'해 버렸다.
'이래서야 두억시니 때하고 다를 게 없잖아.'
비록 그때보다 파괴의 규모가 덜 하긴 했지만 막을 수 없는 재해란 점에서는 똑같았다.
한서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며 놈에게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놈은 신나게 날뛰며 온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강하나 씨는 괜찮으려나.'
그는 반대쪽 트롤을 맡으러 간 강하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간테스]를 타고 있다지만 여기 모인 수많은 헌터의 전력보다 그녀가 강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보스가 빨리 와야 할 텐데.'
놈은 헌터들이 떠나가자 기고만장해져서는 더욱더 열기를 피워 올렸다.
온 사방이 불타오르며 서울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이대로라면 놈을 설령 쓰러뜨린다 해도 화재(火災)를 제압하기까지 엄청난 2차 피해가 발생할 것 같았다.
'인류…… 어떻게 되려나.'
한국에서 단 세 개 남은 도시 중 서울이 이렇게 처참하게 뚫렸다.
서울보다 방비가 덜한 대구와 부산은 과연 얼마나 버틸까?
세계에 남은 도시들은 언제까지 몬스터를 막을 수 있을까?
이미 전 세계의 영토는 95% 이상이 몬스터들의 것이었다.
5%도 되지 않는 영토로 몰리고 몰린 인간들을, 왜 몬스터들은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죽이려 하는 걸까?
한서후는 꼭 지금 눈앞에서 불타고 있는 저 서울이, 그리고 포효하고 있는 불꽃트롤의 모습이 인류와 몬스터들의 미래를 나타내는 것만 같아 암담했다.
무참히 유린당하고 죽어가는 인류.
기세가 등등해 날뛰는 몬스터들.
남은 미래가 오직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불을…… 제발 누가 좀 꺼줘.'
한서후의 눈이 분노로 인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화르르르.
온 도시를 불태우던 불길이.
무질서하게 날뛰던 불길이.
갑작스럽게 특별한 질서를 갖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춤을 추던 불꽃들의 꼬리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한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온 도시의 불꽃이, 스스로가 태우고 있던 물체를 벗어나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곧 허공에는 도깨비불같이 스스로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해졌다.
"설마 도깨비인가?"
한서후는 얼굴을 굳혔다.
지금 이 상황에 예전 두억시니나 거구귀 같은 도깨비류의 몬스터들이 나타난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지상에서 떠오른 불꽃들은 마치 연기처럼 날아 한 방향으로 날아 갔다.
덕분에 지상은 갑작스럽게 불길이 진화되어 버렸다.
"……뭐지?"
갑작스러운 현상에 어리둥절한 한서후가 그 불꽃들을 따라 달려 갔다.
그리고 곧 얼마 안 있어 그 이상 현상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어디선가 본 듯한 녀석이, 엄청난 양의 불길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인간의 허리까지도 안 올 것 같은 작은 몸집.
납작한 팔다리.
그리고 뾰족 튀어나온 부리.
"어스…… 팽귄?"
벌써 몇 년도 전, 첫 재앙형 던전 [베히모스의 꿈]에서 보았던 팽귄이 분명했다.
녀석은 그 작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불꽃트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불길을 빨아들이고 있었는데, 뭔가 만족스러운지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몇몇 헌터가 어스 펭귄을 발견하고 몬스터로 오인해, 공격하려 했다.
"잠깐만요!!"
하지만 한서후가 재빨리 어스 펭귄의 앞을 가로막으며 헌터들을 막았다.
"이 녀석, 우리 편입니다."
그렇게 말한 한서후가 뒤를 돌아 보며 물었다.
"그렇지?"
어스 팽귄이 한서후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크오오오!"
불꽃트롤이 포효하며 불길의 통제권을 되찾고자 했다.
갑자기 나타난 웬 녀석에게 자신의 양식(?)을 빼앗길 순 없었던 것이다.
어스 팽귄에게 날아가던 불꽃이 주춤해졌다.
하지만.
"끼잉!"
어스 팽귄이 포효했다.
그 소리를 들은 한서후는 순간 상황에 맞지 않게 생각했다.
'귀, 귀엽잖아?!'
비록 그 포효는 불꽃트롤의 포효 소리에 묻힐 만큼 작고 귀여웠지만, 포효의 영향력만큼은 불꽃트롤의 것을 능가했다.
주춤하던 불길이 다시 어스 팽귄에게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서후가 눈을 빛냈다.
'저놈, 재생할 때는 꼭 불꽃을 흡수했어. 그런데 지금은 저 어스 펭귄이 불길을 모두 통제하고 있어. 그렇다면……?'
한서후는 어스 팽귄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스 팽귄도 한서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한 인간과 한 몬스터의 마음이 통했다.
한서후는 어스 팽귄이 자신에게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조져 버려.'
씨익.
한서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한서후. 저 불꽃트롤을 공략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공략대의 통신채널에 한서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전명 '꼬맹이', 지금 브리핑하겠습니다."
* * * 몇 분 전.
급히 서울로 날아가던 무결은 [트리슈라] 안에서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뭐? 꼬맹이가 깨어났다고?"
-그래, 네 방 청소하시던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셨어. 언제, 어떻게 네 방까지 찾아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아무튼 처음에는 몬스터인 줄 알고 우리 측 헌터들이 출동했는데…….
"했는데?"
-모조리 녀석에게 쫓겨나 버렸어.
"쫓겨났다고?"
-그래, 쫓겨났어. 순식간에 땅바닥이 튀어나오더니 집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집 밖으로 던져 버렸지 뭐냐.
"하하하하! 녀석, 아직도 땅 다루는 능력만큼은 일품이네."
무결이 꼬맹이가 뛰어난 마수로 각성했음을 깨닫고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나도 나중에 그 녀석이 네가 말한 그 '어스 팽귄'임을 알고 접근 금지령을 내렸어. 그리고 내가 직접 다가가 보려 했는데, 마찬가지로 쫓겨나고 말았다. 보아하니 네 방에 죽치고 앉아 널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야.
"음, 그래? 알았어. 형, 내가 직접 한번 꼬맹이 봐볼 테니 잠깐 끊어 봐."
-알았어.
무결은 당장 자신의 방에 연결된 컴퓨터의 캠을 틀었다.
그 즉시 발견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부드러운 갈색 털의 팽귄을.
무결이 미소 지으며 컴퓨터 화면에 자신의 얼굴을 띄웠다.
"꼬맹아."
-끼잉?
화면 속의 팽귄이 갑작스럽게 들려온 무결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무결의 얼굴을 보며 소리 질렀다.
-끼잉!!
꼬맹이는 침대에서 벌떡 뛰어내려 뒤뚱뒤뚱 뛰어 무결의 컴퓨터 화면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돌진 했다.
무결을 안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콰당탕.
당연히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어스 팽귄이 컴퓨터 모니터와 함께 뒹굴고 말았다.
"하하하하."
모니터가 박살 났지만, 무결은 집안에 설치된 TV에 다시 자신의 모습을 띄웠다.
"꼬맹아, 나 아직 도착하려면 좀 걸린다. 이건 나 아니니까 또 와서 박지 말고."
그 말에 다시 TV로 돌진하려던 꼬맹이가 멈춰 섰다.
그 모습을 본 무결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하자."
그는 이미 [하늘의 눈]으로 꼬맹이를 들여다본 후였다.
대마수로 재탄생한 꼬맹이의 몬스터 등급은- 15급이었다.
* * * [엘리자베스]의 콕핏 속.
새하얀 얼음에 갇힌 강하나의 팔이…….
조금씩 돋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