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72
"오빠, 무결 오빠!"
"애니야, 무슨 일이야?"
무결이 갑자기 회의실로 쳐들어온 애니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꿈이…… 꿈이 안 좋아요!"
그 말에 무결이 얼굴을 굳혔다.
애니의 능력은 [위험을 보는 자].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왜, 무슨 일인데?!"
"서후 오빠 쪽 느낌이 안 좋아요!"
"서후 씨가?"
"네, 꼭 오빠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애니가 무결을 직시하며 말했다.
[암운 속의 빛].
위험을 회피하게 해주는 애니의 또 다른 능력이었다.
그녀가 무결더러 가야 한다고 했으면,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뜻이었다.
"알았어. 준비하고 갈게."
한서후가 있는 위치는 무결이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무결이 내준 과제를 처리하는 중이었으니까.
"형, 이따 봐."
"그래, 얼른 갔다 와라."
무결이 회의실을 급히 나섰다.
* * * 떨어지는 폭포 밑에서 한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머리 꼭대기부터 어깨를 거쳐 온몸으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폭포 속의 남자, 한서후는 그렇게 한 시간여 동안 폭포 밑에서 꼼짝도 않고 집중하고 있었다.
무결이 그에게 건네준 정신방어 스킬 [명경지수]를 수련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는 한 시간여 동안 천천히 자연과 하나가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앞으로 펼쳐진 호수 속에서 물고리 한 마리가 퐁당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번쩍.
새하얀 빛이 세상을 갈랐다.
그리고 물고기가 반 토막이 나서 호수에 떨어졌다.
스르륵, 감겨 있던 한서후의 눈이 뜨였다.
"……후우, 아직 멀고도 멀었구나."
한서후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평정을 물고기가 깨뜨리자 마자, 몸이 저절로 반응해 물고기를 베어 버렸다.
[천살성]이란 스킬 때문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오래갔다. 스킬 레벨도 좀 올랐으려나?"
[명경지수]란 스킬의 레벨이 오를 수록 [천살성]이 진정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정말 대단한 발검술이오."
한서후가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거적때기 같은 도복을 걸친 남자가 호숫가에서 자신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한서후가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근데 폭포수 밑에서 물을 맞고 있는 당신을 발견해, 그만 호기심이 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대가 언제 까지 폭포 물을 맞고 있는지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낡은 도복의 과객이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런 뛰어난 발검술을 견식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실례지만 어느 문파의 고인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림 계열 각성자들이 모인 곳을 종종 '문파'라고 칭하고는 했다.
한서후는 폭포수에서 일어나 걸어나오며 고개를 저었다.
"소속된 문파는 없습니다. 단지 은사 한 분과 은인 한 분의 덕을 입어 심신을 수련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도복 차림의 남자는 한서후가 내공으로 물기를 증발시키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저와 검을 한번 나누어보지 않겠습니까?"
"검을요? 대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난데없는 제안이었지만 한서후는 그 제안이 썩 괜찮게 들렸다.
마침 며칠 동안 수련만 하느라 좀이 쑤셨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도복 남자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의 검은 평범한 청강검이었다.
던전속에 등장하는 도사들이 흔히 쓰고는 하는 철검.
"도우의 검을 견식했는데 저만 가만있는 것도 실례겠지요."
그의 검이 움직였다.
그가 검무를 출 때마다 한서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검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저게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싶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강과 약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의 검은 부드러웠다.
무엇도 베지 못할 것처럼 가날파 보였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남자가 짧은 검무를 마치자 이번엔 한서후가 박수를 쳤다.
"놀라운 검술이로군요.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한서후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 할 따름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대련을 나눌 마음이 드십니까?"
"저야 영광이지요. 이쪽에서 먼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하, 다행이군요. 그럼 저 공터로 가시지요."
한서후는 이 '다행이군요'의 의미를 이때까진 알지 못했다.
둘은 호숫가 옆에 있는 공터로 움직여서로 대치하고 섰다.
"그런데 도사님이신가요?"
한서후가 남자를 보고 물었다.
'도우'라는 말투로 보아 그런 것 같았다.
"한때는 그랬습니다만, 지금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남자가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자세한 건 대련이 끝나고 얘기하도록 하죠."
"그거 괜찮은 얘기로군요."
"그럼 가겠습니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한서후였다.
파앗- 그의 검이 뽑혀 나오며 일직선으로 남자를 찔러 들어갔다.
스르릉- 부드럽게 움직인 남자의 청강검이 한서후의 철검을 비껴냈다.
한서후는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며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카이와 같은 무공의 천재인 한서후의 머릿속에서 남자의 무공에 대한 묘리가 실시간으로 분석되고 있었다.
캉! 스릉!
계속해서 검과 검이 붙었다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서후 쪽이 조금 밀렸다.
남자의 실력이 한서후를 조금 웃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서후는 어떻게든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렸다.
챙! 챙!
시간이 갈수록 한서후가 검을 막아 내는 것이 수월해졌다.
한서후의 머릿속에서 남자의 검로 (劍路)가 분석되며 남자의 검을 막아낼 만한 수법이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기야- 스르름!
한서후의 검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엇!"
남자가 깜짝 놀라며 검을 물렸다.
"이, 이건……!"
남자는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자신의 검을 튕겨낸 한서후의 검을 보며 경악을 토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한서후의 검을 흘려내는데 썼던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음, 도사님의 수법이 너무 인상 깊어 흉내내본 건데, 혹시 실례였을까요?"
한서후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아, 아니……."
당황하던 남자가 이내 당황을 가라 앉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생전 대련을 하며 다른 사람의 무공을 베끼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도우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분 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르쳐 드린 것도 아니고, 도우의 능력으로 알아낸 수법이니 괜찮습니다. 이곳은 무림도 아니니 딱히 쓴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빙긋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한서후도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다시 가실까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다시 달려 들었다.
대련은 한 시간이 넘어두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헉, 헉……."
두 사람 모두 땀을 흘리며 제자리에 대자로 뻗었다.
"하하, 하하하하!"
남자가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서후가 그 난데없는 웃음에 의아 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하하! 이런 곳에서 이렇게 검이 맞는 상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늘의 뜻이 참 기묘하군요."
대련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적잖이 감탄했다.
남자는 한서후의 천재성에, 한서후는 남자의 기묘하고 뛰어난 수법에. 서로의 무공이 모두 방어 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대련은 쉽게 끝이 나지 않았다.
반면 뜻밖에도 서로의 무공은 비슷한 면이 많아 보고 배울 것이 많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스승 삼아 단기간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남자는 그를 두고 '검이 맞다'고 표현한 것이다.
한서후도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렇게 된 것, 술이나 같이 한잔 하실까요?"
"오, 술이 있습니까?"
남자가 반색하며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련에 쓰려고 가져온 거긴 합니다만, 지금은 마셔도 아까울 것 같지가 않군요."
술을 마시면 이성이 가라앉음으로써 [천살성]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진다.
때때로 그런 상태로 하는 수련이 있기 때문에 술을 가져온 거였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을 것 같군.'
지금은 술을 먹는다 해서 술에 [천살성]이 살아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기분이 좋으면 [천살성]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자, 받으시지요."
한서후가 한 손에 막걸리 한 병을 들고, 다른 한 병을 남자에게 건넸다.
"건배!"
두 사람의 막걸리 병이 부딪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입을 소매가 소매로 입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크으~ 맛있는 술이군요."
"입맛에 맞으시니 다행입니다."
한서후가 싱긋 웃었다.
"도우는 참 신기합니다. 보아하니 명사의 지도 아래 검을 배운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검식이 자유로 우십니까?"
"명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약한 노인네한테 검술을 배우긴 했습니다. 그분이 제 은사시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쏴아아아- 폭포수 물이 시끄럽게 떨어져 내렸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한서후는 오랜만에 기분이 참 좋았다.
그동안 사람 만날 일도 없이 수련에만 정진하느라 많이 외로웠던 터였다.
가끔 무결이 들러서 말동무가 되어 주고, 그가 갔다 오라는 던전을 갔다 오는 게 그나마 한서후의 유희거리였다.
그런데 무결이 요즘 바빠서 혼자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자니 힘이 들던 차였는데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는지 모르겠다.
한서후는 그저 눈앞에 갑자기 나타 난 이 사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순간.
"그럼 다시 대련하실까요?"
도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또요?"
한서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요. 마침 몸도 다시 풀렸겠다. 시작하시죠."
그렇게 두 사람은 또 다시 검을 나누었다.
한동안 검을 나누다, 또 다시 제자리에 드러누웠다.
아까 술도 마섰겠다, 이번엔 그다지 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말없이 드러누워 있다 일어난 한서후는 남자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뵙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어두워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일 말입니까?"
같이 드러누워 있던 남자 또한 부스스 일어나며 말했다.
"예, 내일도 이곳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제가 도사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고요."
그렇게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아, 그렇군요. 아쉽네요……."
한서후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어딜 가려고 그러십니까."
"네? 지금 집에 간다고……."
한서후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남자가 다시 칼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저와 대련하셔야지요."
한서후는 그제야 뭔가가 잘못 돌아 간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