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70
"하여 이한철 헌터님께 한 가지 제의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무결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그러나 무결이 포커페이스를 유지 하자 눈을 빛냈다.
'만만찮은 실력자군.'
그는 자신의 능력이 무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주 높은 수준의 정신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그는 보란 듯이 [호감 페로몬]을 후우 불어 날려 보내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대담하기도 하고.'
감히 미국 앞에서 이렇게 빳빳하게 나오는 헌터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정말 이 정도의 대가를 지불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일까?'
사실 그는 무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이한철이란 이 사람이 반드시 포섭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
'1급 포섭 대상'.
상부로부터 내려온 무결에 대한 정보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다만 이것만으로도 그를 포섭해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미국의 정보부가 파악한 거라면의 심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미국의 제안을 들려주는 역할일 뿐.'
그래서 그는 이 이한철이란 헌터에게 자신이 가져온 제안을 꺼내놓았다.
"저희는 이한철 헌터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아주 좋은 조건으로 헌터님을 미국으로 모셔가고 싶습니다."
이미 내용을 짐작하고 있던 무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음 조건을 듣고도 그럴 수 있을까?'
루카스 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미국행을 받아들이신다면 저희는 헌터님께 일단 1억 달러를 곧 바로 지급할 예정입니다."
루카스는 경악으로 굳어지는 무결의 얼굴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
"……."
"1 억이라……."
"……?"
루카스의 예상과는 다르게, 무결은 곤란한 표정으로 볼만 긁적일 뿐이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별로 생각 없습니다."
"예……?"
루카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무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니, 1억 달러입니다. 원이 아니라 달러요."
"압니다만, 그래도 싫습니다."
설령 1억 달러가 아니라 100억 달러를 준다 해도 무결은 미국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돈은 이미 평생 사치를 부려도 충분할 만큼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돈을 가지고도 살 수 없는 최고의 파트너는 미국이 아닌 한국에 있었다.
그 최고의 파트너는 바로 은하그룹.
무결이 한국을 떠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원하는 대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 합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잠시만요. 조건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중국 헌협의 협회장까지 맡은 걸 감안해서 저희 미국도 최고 대우의……."
"더 말씀해 주셔도 제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중국 헌터 협회에서도 직책을 맡게 되었다 보니 좀 바빠서, 이만."
무결은 그렇게 얘기하고 그를 지나쳐 가버렸다.
"……다 들어보지도 않고."
루카스 딘이 그런 무결의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루카스가 제시한 1억 달러.
그것을 듣는 순간 무결은 생각했다.
'내가 재앙형 던전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후려치려 그러는군.'
재앙형 던전의 '월드'는 군사적, 산업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월드'는 한 사람에게 귀속 된 후, 그 소유주를 변경시킬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만약 무결을 동등한 상대로 놓고 제안을 했다면 처음부터 100 억 달러 정도는 불렀어야 했다.
'뭐, 내가 다른 던전 월드를 가지고 있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겠지.'
'던전 월드'의 산업적 가치를 측정 하려면 그 속에 숨은 자원들을 잘 파악해야 했다.
지금 막 '월드'를 얻은 이한철이라면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리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중국은 '재앙형 던전'을 클리어한 전적이 없으니, 중국 쪽에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아무튼 재미있게 됐군.'
미국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 * * 무결이 중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을 맡았다지만, 중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은 사실상 지금까지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게 움직이도록 자리에 앉혀진 허수아비.
그래서 사실 다른 중국의 유력 인사들도 그렇게까지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무결에게 주어진 권한 자체가 그리 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게 있었다.
그들이 자력으로 카이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위청천이, 바로 무결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란 사실을.
위청천은 무결에게 헌터 협회장으로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건네주었다.
물론 무결은 그들이 걱정할 만한 짓을 저지를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한국에는 조금 더 도움이 되고 말이지.'
서로 윈-윈을 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중국과 한국 양국 간에.
무결은 중국 헌터 협회사람들에게 명령해 '무(武)'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고 있었다.
중국이 지닌 가장 큰 자원은 바로 무공에 대한 이해도였다.
무협(武快)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중국인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마법을 연구해 온 엘리스가 말한 바로, 세상에는 수천 년 전까지만 해도 기(氣), 동의어로 마력(魔刀)이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 기(氣)는 갈수록 옅어져 던전시대 이전에는 존재가 없어지다시피했다.
때문에 그것은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 취급을 당하는 일이 되었다.
기(氣)에 대해 연구하는 자들은 음지로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중국은 기(氣)라는 것이 세상에 희미한 잔향(殘香)만을 남긴 시점에서도 계속해서 기(氣)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무공을 발전시켜 오고 있었다.
그것이 비로소 지금에 와서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무공에 대한 지식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뛰어났다.
특히 중국 헌터 협회에는 무공 자료에 대한 기록이 많았다.
이 부분은 사실 카이의 덕을 많이 봤다.
그가 중국의 전체적인 힘을 끌어올리고자 많은 자들이 꽁꽁 숨겨놓았던 무공 이론들을 뱉어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카이의 존재는 지금 까지 중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개인의 도덕성만 완벽했더라면 어쩌면 카이는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군주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을지도.
하지만 카이 방식은 너무 위험했다.
앞으로는 뛰어난 헌터일수록 정신을 도야시켜야 했다.
몬스터라고 정신공격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카이에 의해 세뇌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몬스터에 의해 지배 되는 것도 순식간이 될 터였다.
그렇게 한국에 가지고 갈 무공 지식을 정리하는 한편, 무결은 다소 혼란스러운 헌터 협회를, 부회장을 내세워 다스렸다.
"회장님, 협회에 공고문 냈습니다. 팀장 이상의 직위 전부 유지하기로요."
"반발은 없던가요?"
"세뇌되었던 자들이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저들이 어쩌겠습니까. 회장님이 까라면 까야죠."
부회장 또한 위청천이 내준 인물이라 무결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잘 따랐다.
"원래부터 능력 있던 자들이니 놔 두면 알아서 잘할 겁니다. 카이에 세뇌되었던 자들은 개인적인 축재도 못하게 세뇌되어 있었으니 도덕적으로 걸릴 일도 그다지 없고요."
무결은 헌터 협회에서 카이에 의해 기용되었던 자들을 그대로 그 자리에 둠으로써 정국의 혼란을 최소화 했다.
사실 카이의 수하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자신이 원해서 카이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이가 직접 나서서 세뇌할 정도의 인물들은 원래부터가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굳이 원래 하던 일에서 제외시킬 필요는 없었다.
정치세력이야 힘의 역학에 의해 그 면면이 바뀌었다지만, 능력 있는 헌터들까지 그렇게 바꿔치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무결은 자리를 나서 협회 건물을 나왔다.
그리고 숙소인 용유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협회 건물에서 용유곡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렇게 그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피슉-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들었다.
퍽.
총알이 땅에 박혔다.
건물 옥상 위에서 총을 쏜 저격수는 무결이 스르르 움직여 유령처럼 총알을 피하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를 떠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결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평범하게 길을 걸었다.
'귀찮게스리.'
최근 들어 이런 공격이 많았다.
저격수의 상태창을 확인해 두었기 때문에 배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번엔 독일인가.'
아마 회유가 통하지 않으니 납치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저 총알은 살상용이 아니라 마취용 총알이었다.
옛날 총알과는 다르게 마취용 총도 요즘은 원거리에서 저격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던전으로 인해 그것이 가능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조용하네.'
사람 많은 중국 거리답지 않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농간을 부렸군.'
무결은 주변에 엷게 퍼진 마력을 감지하고 말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각성자 무리가 나타났다.
모두 복면을 한 자들.
그리고 흑인들이었다.
'독일, 이러면 좋게 봐줄 수 없어.'
무결이 속으로 독일에 경고 하나를 새기며 멈춰 섰다.
흑인들을 보내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저들은 독일 소속의 헌터들이었다.
'이한철'을 포획하기 위해 파견된.
"저격은 어떻게 피한 거지?"
과연 가장 앞에 선 이의 입에선 독일어가 아닌, 아프리카 쪽의 언어로 추정되는 말이 흘러나왔다.
물론 통역기가 알아서 제대로 번역 해 주었다.
"이렇게."
무결이 스르륵 사라졌다가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최근 들어 연습하고 있는 보법(步法)이었다.
기초공까지밖에 습득하지 못해서 숙련도는 낮았지만, 기본 스텟이 높아서 엄청나게 빨랐다.
눈앞의 납치범들의 눈을 속이기엔 충분할 정도로.
납치범들이 피하려 했으나 늦었다.
퍽, 퍼퍽.
그들은 뒤통수를 후려맞으며 하나 둘씩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엉덩이를 쭉 뺀 채로.
얼마간의 소음이 오간 후, 무결의 주변은 조용해졌다.
자연스럽게 그들을 둘러쌌던 결계도 거두어졌다.
그곳에는 기절해서 벌거벗겨진 채로 입고 있던 옷으로 결박된 각성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나는 바보입니다'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래도 나를 죽이려 한 건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무결은 그렇게 대충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각성자들에게 흑역사 하나씩을 새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