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63 [대천세계].
본래가 정신방벽을 약화시키고 환상을 보여주어 그것이 실제라고 믿게 하는 종류의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거기에 더해진 카이의 [광뇌조작]의 힘.
아이템과 스킬의 힘이 시너지를 이루어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무결의 움직임이 마치 뭔가에 걸린 것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눈이 현실이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이, 카이의 눈에 보였다.
카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무결에게 암기를 흩뿌렸다.
수십 개의 암기가 일시에 날아무결을 뒤덮었다.
띠디딩!
[귀검 곡도]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암기를 걷어냈지만 역부족이었다.
퍼퍼퍽.
몇 개가 무결의 블랙미슈릴 슈트를 파고들어 박혔다.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무결은 미동조차 없었다.
'제대로 먹혔군.'
카이가 무결에게 짓쳐들어갔다.
그리고 [여의창]을 있는 힘껏 앞으로 찔렀다.
퍼억.
짙은 파육음이 울렸다.
* * * 무결의 주변이 일순간에 변했다.
아름다운 언덕 위.
따스한 바람.
한 그루의 소나무.
주변으로 흩날리는 꽃잎들.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있던 우주선 내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
하지만 무결은 그 풍경에서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아름답다.'
무결의 정신이 그 풍경에 녹아들었다.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스킬 '하늘의 눈'이 발동합니다.]
[스킬 능력치가 부족해 발동이 취소됩니다.]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잠시 눈이 떠졌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어서 무결은 이내 다시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보다는 눈앞의 평화로운 풍경에 그냥 몸을 맡기고 싶었다.
기분 좋은 햇살.
기분 좋은 내음.
또 다시 눈이 감겼다.
[마스터!]
아스라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들려온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다.
그 목소리 덕에 다시 눈이 떠졌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들이 몸에 닿는 게 보인다.
몸에서 붉은 꽃이 피어난다.
왜 몸에서 꽃이 피는 걸까?
[스킬 '하늘의 눈'이 발동합니다.]
[스킬 능력치가 부족해 발동이 취소됩니다.]
[……취소됩니다.]
[……취소됩니다.]
귀찮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대체 나에게 뭘 바라는 거지?'
무결이 의아해하던 차.
저 멀리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왠지 모르겠지만, 바람은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그때.
[마스터, 좀 일어나십시오!!]
[스킬 '하늘의 눈'이 발동합니다.]
[스킬 능력치가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에 의해 급상승합니다.]
[스킬 '하늘의 눈'에 의해 모든 환상이 사라집니다.]
스킬이 발동하며 환상이 걷혀 나갔다.
흩날리는 꽃잎은 차가운 칼날로.
한 그루의 소나무는 가까이 있던 거대로봇으로.
그리고, 따스하게 불어오던 바람은…….
'카이.'
카이로.
놈이 [여의창]을 가지고 자신을 찔러오고 있었다.
무결은 회피하려 했으나, 이미 피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
무결이 이를 아득 물고 몸을 비틀었다.
온몸에 박힌 암기들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상처도 상처였지만, 뭔가 암기 자체에 움직임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었다.
[하늘의 눈]으로 암기를 살필 여유는 없었다.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던 창이, 옆 구리를 그대로 꿰뚫었다.
퍼억.
옆구리가 꿰뚫리며 몸이 덜컥 뒤 쪽의 벽에 박혔다.
무결은 카이가 창대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하게 창대를 움켜쥐었다. 우드득.
[유가선공]의 내공과 강철 같은 힘줄이 돋아났다.
창이 강하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카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잡았다."
눈앞의 무결의 모습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그 모습을 본 무결이 마주 씨익웃었다.
"지랄."
그 순간, 벽 뒤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지이잉!!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정확히 카이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간 레이저 한 줄기.
순간적으로 카이의 투구가 자동으로 얼굴을 뒤덮으며 그 레이저를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카이가 [여의창]을 놓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주인이 '던진' 것이 아니라 '놓아' 버린 여의창이 다시 원래의 작은 단봉 형태로 줄어들었다.
무결은 그것을 [공간주머니] 속으로 던져 넣으며, 피가 흐르는 배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슈리, 늦었잖아.'
무결이 살짝 투덜댔다.
[으으, 마스터. 저 아니었으면 마스터 돌아가실 뻔한 건 알고 계십니까?]
슈리가 매우 피곤한 듯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고맙다.'
무결 또한 방금 있던 상황을 어렴풋이 깨달아 알고 있었다.
슈리가 자력으로 [에메랄드의 서]의 힘을 일부 끌어 썼다.
그 바람에 이제까지 [에메랄드의 서]에 모아두었던 모든 에너지가 날아가고, 슈리가 가수면 상태에 빠지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다. 하지만.
'그래도 늦지 않았군.'
제4격납고의 문을 연 슈리가 뒤 늦게나마 그곳의 시스템을 장악하고 비치되어 있던 무기를 개방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아직 성공 못했습니다.]
슈리가 무결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응?'
[여기 있는 건 고작 그 정도 무기가 아닙니다. 장악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마스터는 계속해서 저자와 싸워주십시오.]
슈리가 피곤한 목소리로 할 말은 다 했다.
아무래도 작업이 끝나면 탈진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젠장.'
무결은 혀를 찼다.
슈리도 걱정되었지만…….
'결국 저 무공 괴물 녀석하고 직접 부딪쳐야 하는 건가?'
이 사실도 좀 걱정이 되었다.
이제까지 무결은 카이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걸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곳의 사기적인 아이템들과 뛰어난 무공으로 무장한 카이를 맞상대하려면 무결 또한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느낌, 이 내공. 어디서 느껴 봤는데……."
그때 카이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본 무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 녀석이 싸움을 걸기보다 뭔가를 골돌히 생각해 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끌기는 무결이 원하는 바였다.
"설마, 네놈……."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신…… 무결?"
무결의 이름을.
결국 녀석이 무결의 정체를 알아 냈다.
단지 잠깐 느낀 무결의 내공만으로.
"기감이 대단하군."
무결이 미소 지으며 그 사실을 긍정했다.
그의 얼굴이 스르륵 변했다.
카이를 처음 만날 당시 인천 월미도에서 하고 있던 얼굴로.
카이의 눈이 더욱 커졌다.
"역용술을 썼군."
그가 으득 이를 갈았다.
무결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나 더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까?"
그의 얼굴이 다시 스르륵 바뀌었다.
카이에게 세뇌되었던 얼굴인 이한철의 모습으로.
"미안하지만 난 당신에게 세뇌되지 않았어."
이한철의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부터 흘러나왔다.
마치 그를 조롱하듯이.
그 모습을 본 카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분명 확인 과정까지 거쳤는데, 어떻게!"
"내가 관찰력이 좀 뛰어나서. 다른 세뇌된 사람들을 열심히 관찰 해 봤지."
"다른 세뇌된 자들을 알아봤다고?"
카이가 거듭 놀랐다.
"언젠가 들통 날 줄 알고 그토록 조심했건만, 역시 시간문제일 뿐이었나."
그가 그답지 않게 씁쓸하게 중얼 거렸다.
"그때 한국에서 네 녀석에게 당하고, 한창 벌이던 사업까지 철수시켰지. '아직 세상에는 많고 많은 괴물이 있구나' 하는 심정으로."
무슨 심정인지, 그가 자신이 벌였던 일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너 같은 녀석이 두명만 더 있으면 분명 내 대계(大計)에도 영향이 있을 터였으니."
"대계?"
"아, 뭐, 세계정복 같은 거."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큭큭 웃었다.
"정말 유쾌하군. '맞수'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나? 그동안은 같은 높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어서 나도 나름 외로웠나 봐. 이렇게 다시 네 녀석을 만나서 수다쟁이가 될 줄은 나도 몰랐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왠지 위험하지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생기마저 느껴지는 환한 눈빛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천천히 숨죽여 준비하다 보니, 과연 미국과 아프리카 지역에도 너처럼 강력한 녀석들이 있더군. 직접 붙어보지 않아서 네 녀석만큼 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가 그렇게 말하더니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얼마나 절치부심했는지 모른다. 너를 포함한 그 두 놈을 한꺼번에 상대해도 좋을 만한 무공을 익히기 위해. 네 녀석을 죽이기 위해 특별히 연마한 스킬도 있으니 한번 보라고."
카이가 중얼거리며 온몸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아니,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데."
무결은 땀을 삐질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카이가 온몸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육마황술]전삼술(前근術) 개(開).
온몸에 막대한 힘이 휘몰아치며 터져 나왔다.
'할 수 없군.'
무결 또한 힘을 개방시켰다.
[의기활신유가선공(意氣活神騰跏仙功)] 잠맥개방(潛脈開放).
평소엔 잠자고 있던 그의 혈도가 일시적으로 뻥 뚫려 버렸다.
전신에 흡착되어 있던 블랙미슈릴 슈트에서 가느다란 침들이 삐져나와 무결의 온몸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근육이 더욱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쾅!!
양쪽에서 있던 둘이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땅을 박차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