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60 곧 그들과 무결의 시야가 짙은 폭풍으로 가려져 버렸다.
"여허, 좀 좋은 거 가지고 있수다?"
각성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작은 구슬 같은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바람요정의 구슬].
은은한 초록빛이 퍼져 나오며, 그들을 둘러쌌던 칼날바람이 산들바람이 되어버렸다.
'역시 여기까지 온 각성자들인 만큼 꽤 만만치가 않군.'
[투시 글라스]로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무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이봐, 그게 단가?"
한 각성자가 조롱기를 담아 폭풍 너머의 무결에게 외쳤다.
열다섯 명이나 되는 각성자가 폭풍 속을 편안히 걸어 계속해서 무결에게 다가갔다.
무결이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조절 했다.
그들이 계속 폭풍 속에 있도록.
그것을 눈치첸 각성자들이 비웃었다.
"아하하하! 야, 저놈 겁먹었나 보다."
"하긴 혼자서 별수 있겠어? 지금 쓴 아이템이 최선의 수인가 본데, 불쌍하기까지 하다, 야."
"이봐, 이제 좀 있으면 벽이 닿겠다! 그 전에 뭐 좀 더 꺼내보라고!"
각성자들이 먹잇감을 갖고 노는 승냥이 떼처럼 지껄여댔다.
무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꺼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뭐?"
각성자들이 폭풍 속을 뚫고 귓가에 뚜렷이 말을 전달해 오는 무결의 기술과, 그의 말에 담긴 의미에 놀라 흠칫 몸을 굳혔다.
그때.
"컥"
한 각성자가 신음을 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왜 그래?"
다른 각성자들이 이상징후를 나타낸 각성자를 보며 다그쳤다.
그런데 연이어 다른 각성자가 팔을 움켜쥐었다.
"뭐, 뭐야, 이거? 왜 팔이 안 움직여!"
"뭐? 그게…… 어, 엇! 난 다리가 안 움직여!!"
각성자들이 저마다 이상징후를 토로했다.
"나, 난 숨이 가빠……."
"젠장,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각성자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수록 점점 더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결이 피식 웃었다.
'마비향이 효과가 좋군.'
[호신용 주술향낭]에서 뿜어져 나온 마비향이 계속해서 그들의 몸을 조금씩 마비시켜 갔다.
'[곡도], 움직여라.'
무결이 폭풍 속에서 [주술향낭]을 매달고 숨어 있던 [귀검 곡도]에 명령을 내렸다.
수실처럼 [주술향낭]을 매달고 있는 [귀검 곡도]가 각성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스륵- 귀신같이 움직인 [곡도]가 가장 먼저 베어낸 것은 [바람요정의 구슬].
"으악!"
[바람요정의 구슬]을 들고 있던 각성자가 구슬과 함께 없어져 버린 손에 비명을 질렀다.
폭풍 속에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아이템이 사라지자, 그들은 그대로 폭풍에 노출되었다.
"아악!"
"젠장, 모두 각자 알아서 생존해!"
모두 그럴싸한 방어 아이템 하나쯤은 챙겨놓고 있던 터라 폭풍 안에서도 그럭저럭 버티며 무결에게 나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을 가만 놔둘 무결이 아니었다.
"어딜 들어오시려고."
무결은 [스톰브링어]를 조종해 번개를 내리꽂는 한편, 손에 [세슈리더]를 들고 놈들의 급소를 연사해 그들을 견제했다.
폭풍 속이라 시야가 제대로 없는데다 정신없는 와중이라 아무리 좋은 방어구를 두르고 있다 해도,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급소를 당하고 있었다.
"악!"
각성자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동안 [귀검 곡도]도 열심히 폭풍 속을 움직였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곡도]를 방어 하고쳐내었지만, 그럴 때마다 손잡 이에 매달린 [주술향낭]이 흔들리며 마비가루를 뿌려대었다.
주술의 힘으로 폭풍 속에서도 그리 쉽게 날려 가지 않는 마비가루가 각성자들의 몸을 계속해서 서서히 마비시켜 갔다.
그것으로 승부는 났다.
툭 마지막 열다섯 번째 각성자가 쓰러지자 무결은 폭풍을 가라앉혔다.
[Kill Count : 40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탐험가의 지도'가 주어집니다]
킬 카운트를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쉬이이…….
팽이가 회전력을 잃고 비실거리자, 무결이 탁 팽이를 잡아챘다.
"흐음."
하지만 무결은 탐탁지 않았다.
각성자들 중 한 명이 죽기 직전에 동료들에게 무전을 보낸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곧 여기로 더 많은 각성자들이 몰려올 것이다.
어쩌면 카이가 직접 올 수도.
"슈리, 얼마나 남았어?"
무결이 [학살자의 지도]를 펴들어 남은 각성자들의 위치를 살펴보며 물었다.
역시나 다른 손님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15분 정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하는 수 없지."
무결은 제2격납고에서서 다가올 손님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약 5분여가 지난 후,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10명 정도로 구성된 자 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방금 전의 녀석들보다 급이 높아 보이는 실력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금 전 녀석들이 B급이었다면 이 놈들은 A급이라 할 수 있었다.
실력도 그랬고, 갖춘 아이템들도 그러했고.
"무기고랑 격납고 털러 갔던 못난 이들을 몰살시킨 게 바로 너냐?"
열 명의 선두에 있던 녀석이 이죽 거리며 다가왔다.
'다행히 카이는 아직이군.'
초반에야 무결이 더 강했을지라도, 지금은 몰랐다.
수많은 각성자를 부려 성능 좋은 사기 아이템들을 끌어모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녀석을 맞이할 준비가 좀 필요했다.
'조금 천천히 상대해 볼까.'
고전하는 척할수록, 카이는 더욱 여유를 갖고 이곳에 다다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거다."
무결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맨 앞에서 다가오던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어디 한번 보자고."
무결이 다시 팽이를 꺼내 폭풍을 불러들였다.
콰아아아- 다시금 정비고 속에 폭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녀석들은 장담대로 폭풍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결에게 다가들었다.
그 와중에 아까 죽은 녀석들에게 들었는지 숨을 참는 것을 잊지 않았다.
덕분에 [호신용 주술향낭]의 마비 향은 녀석들에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까짓 바람쯤이야."
그리고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로 낙뢰와 무결의 총격을 손쉽게 방어해 냈다.
'과연 골치가 좀 아픈 녀석들이긴 하군.'
무결이 [스톰브링어]를 해제했다.
[스톰브링어]는 아무래도 범위공격 용 아이템이니만큼 저런 정예들을 상대로는 한계가 있었다.
"죽어랏!"
무공 사용자들이 무결에게 직접적으로 달려들었다.
가시에 마법사용자들이 원거리에서 아군들에게 [헤이스트] 등의 버프 마법을 걸어주었다.
하지만 속도 증가 버프 마법에도 불구하고-
"큭!"
"크억!!"
"빨라…."
원래부터 민첩 스텟이 엄청난 데다 [미타찰의 법보]로 대량의 스텟업을 한 무결의 속도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무결이 엄청난 속도로 적들 사이를 누비며 양손에 든 [코크야의 관통 대거]와 [세슈리더]로 놈들의 빈 곳을 치고 빠졌다.
특히나 오른손에 들린 [코크야의 관통 대거]는 아주 강력한 근거리 무기였다.
'대거'의 특성상 공격 범위가 한정적인 만큼, 웬만한 이벤트 아이템의 방어력조차 뚫어내는 무시무시한 관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크윽."
부상을 입은 각성자들이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하, 젠장. 엄청난 녀석이군."
"이거 카이 님께 위협이 될 수도 있겠어."
"그렇게 둘 순 없지. 낄낄."
제자리에 주저앉은 녀석들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웃었다.
무결은 순간 불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이 세뇌되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놈들이란 것에 생각이 미쳤다.
무결이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쾅!!!
녀석들의 몸이 하나둘씩 폭발하기 시작했다.
쾅!
콰쾅!!
강렬한 폭발이 놈들과 비교적 가까이에 있던 무결을 휘감았다.
* * *
"지독한 놈이군."
멀리서 들려온 폭발음에 카이가 [학살자의 지도]를 열어 그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붉은 점 하나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곳에 간 노예들과는 통신이 끊겼으니, 아마 녀석들이 상대하던 그놈 인 듯했다.
"으음, 이제 남은 적은 그놈 하나 인가?"
카이가 손에 쥐고 있던 시체를 눈 앞까지 다가온 '자기폭풍'에 던지며 말했다.
강력한 자기장에 휘말린 시체가 순식간에 핏물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 우주선은 한쪽 외곽 부분에서부터 거대하고 강력한 자기장이 다가 오며 내부의 생명체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우주선 자체의 구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유기물로 이루어진 생명체에는 직접적 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붉은 점이 보이는 '정비격납고'는 아직까지 자기폭풍에서 꽤나 안전한 지역이었다.
"가서 끝장을 봐야겠군. 가자고."
카이가 마지막 남은 부하 네 명을 데리고 무결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 * *
"크흐, 조금 위험했다."
녀석들이 자폭할 때 쓴 폭탄은 무결로서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폭탄이었다.
아마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무기고'에서 얻은 것들인 듯했다.
다행히 [아이기스의 방패]와 무결이 가진 자체적인 방어력으로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타격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라서, 무결은 등판의 블랙미슈릴 슈트가 벗겨지고 살이 까맣게 타올라 있었다.
그렇게 타오른 살은 [유가선공]과 [천옥보주]로 치유되고 있었다.
치이익- 무결은 상비 물품인 치료용 스프레이를 등판에 뿌리며 치유를 도왔다.
"음?"
그렇게 치료를 이어가던 와중에, 저 멀리서부터 자신을 한껏 드러낸 무시무시한 기파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악당 출현이시군."
무결이 스프레이를 다시 집어넣고 전투 준비를 갖추어갔다.
"슈리, 얼마나 남았어?"
[3분 남았습니다.]
"에이, 아깝군."
웬만하면 제4정비격납고까지 장악 하고 싸우고 싶었지만, 이제는 때가 늦었다.
"하는 수 없지, 뭐. 항상 완벽한 준비 상태에서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니."
무결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저벅.
카이가 제2정비격납고 입구에 발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