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42 스르륵- 바닥과 접촉사고를 낼 뻔했던 와인 잔이 무결의 손에 부드럽게 빨려들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허공에 흩뿌려지던 와인 방울들이 자연스럽게 무결의 손에 들린 잔으로 빨려들어갔다.
"어머~"
그녀가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결이 와인 잔을 그녀에게 돌려주자,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와인은 내려놓고 박수치도록 하세요."
무결 또한 그녀가 보내오는 호의가 나쁘지는 않아서 그녀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상태창에는 '세뇌'라는 두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무결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단지 그 두 글자가 없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이 반가울 수 있다니, 무결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 와인도 감사하지만, 그거 말고요."
"그럼……?"
"목숨을 구해주신 거요. 이한철 헌터님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이승을 떠날 뻔했어요."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쑥스럽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무결이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했다.
그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으니까.
"저…… 혹시 옆에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가 비어 있는 무결의 온천 속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결이 아주 짧은 시간 고민했다.
그 또한 눈앞의 여자와 잠시 대화 라도하며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무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안돼요."
그건 이 여인에게 민폐가 될 여지가 다분했다.
"아……."
그녀가 눈에 띄게 실망한 눈초리를 했다.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어요. 잘 가요."
무결이 일부러 단호한 어조로 그녀를 끊어냈다.
"네, 만나서 영광이었어요."
그녀는 결국 포기한 듯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무결을 떠나갔다.
무결이 온천물 속으로 몸을 푹 담갔다.
그렇게 잠시 무결이 고독을 짓씹으며 온천물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남자가 불쑥 온천물 속으로 들어 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185센티의 날렵한 근육으로 단련된 몸.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신이 단 하나 빼고는 모든 것을 내린 것 같은 남자가 무결의 옆에 와인 잔을 들고 앉았다.
하지만 무결은 그에게 없는 단 하나를 결코 잊지 않았다.
'자유의지.'
그는 위청천이었다.
"어때요, 이곳에서의 생활은?"
위청천이 시원스러운 베이징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무결에게 물었다.
"정말 좋아요.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거기가 바로 여기다 싶을 정도로요."
'감시의 눈길만 빼면 말이지.'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도 아직까지 이곳에 올 때면 항상 호화로운 서비스에 감탄하곤 하거든요."
위청천이 싱긋 웃으며 와인을 홀짝였다.
잠시 위청천과 무결의 잡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무결이 기다리던 말이, 위청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내일 한번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분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겠어요?"
위청천이 살짝 미소를 띠며 가볍게 말했다.
"누구신데요?"
무결이 그렇게 물으면서 속으로 빙긋 웃었다.
'입질이 왔군.'
적당히 실력을 숨길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실력을 드러내며 가국을 쓰러뜨린 이유.
이 입질을 위해서였다.
"제 은인이신 분이죠. 중국 헌터 업계의 큰 후원자이기도 하고요. 그 분이 꼭 중국의 새로운 영웅인 이한철 헌터님을 한번 만나 뵙고 싶다셔서요."
"음……."
무결이 짐짓고민하는 척을 해봤다.
"한철 씨에게도 분명 좋은 만남이 될 겁니다."
위청천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봐 조금은 초조한 듯, 기운에 탁기(獨氣)가 섞여 있었다.
물론.
무결이 그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좋습니다. 가죠."
무결이 속으로만 빙긋 웃었다.
이제 호랑이굴로 들어갈 때였다.
* * * 뚜벅뚜벅.
무결은 위청천의 차를 타고 베이징 외곽의 한 건물로 들어섰다.
꽤나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무결은 건물을 들어서는 순간 느꼈다.
여러 겹의 강력한 마력 보호막이 건물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미사일 공격쯤은 그냥 막아낼 수 있을 듯했다.
'방비가 대단하군.'
은하그룹에 비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어지간한 핵미사일도 한두 방은 버틸 만큼 강력한 보호막이었다.
그리고 방어막은 그런 역할만 하는것이 아니었다.
[마력에 도청 장치와 각종 전자 장치를 감지하는 마력/물리결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결은 슈리의 말대로 각종 마력이 자신의 몸을 샅샅이 훑는 게 느껴졌다.
삐익- 어디선가 경고음이 들렸다.
"무기를 갖고 계시군요. 무기는 잠시 맡겨주실 수 있습니까? 평화적인 공간이라."
위청천이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무결이 선뜻 허리춤에 찬 두 정의 권총을 빼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위청천은 무결을 건물의 또 다른 입구로 안내했다.
거기에서 무결은 대기하고 있던 럭셔리한 리무진을 타고 몇 분을 달려 또 다른 현대식 건물에 도착했다.
"보안이 대단하네요. 만나는 분이 대단하신가 봐요."
무결의 말에 위청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곧 만나실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위청천은 무결을 그건물의 지하로 안내했다.
그리고 지하 1층에 마련된 통로를 통해 한동안 걸었다.
체감상 분명 건물 내부는 벗어난 듯했는데 통로에 방'향감각을 교란하는 기환진(奇幻陣)이 설치됐는지, 현 위치 파악이 상당히 힘들었다.
하지만 무결은 스마트워치의 3D 매핑 엡에 착실히 지형정보를 저장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슈리에게 자신의 위치를 물을 수 있었다.
'슈리, 여기 어디야?'
[근처에 있던 산아래에 접어들었습니다. 곧 목적지가 나올 것 같습니다.]
'땡큐.'
그렇게 슈리의 말대로 산 아래를 한동안 더 걸으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호수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곳이 실외인 건 아니었다.
아마 산속의 지반이 침하되며 만들어진 호수인 듯했다.
한데 그 호수위로, 아주 화려한 전각이 하나 보였다.
이런 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고 화려한 전각.
호수위에는 그 전각까지 향하는 길이 나 있었다.
"신기한 곳이군요."
무결이 그렇게 말했음에도, 위청천은 빙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먼저 앞서 걸었다.
그리고 위청천과 무결은 곧 전각 속으로 들어섰다.
"호호호호."
"깔깔."
전각 속으로 들어가자 어렴풋하게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각 곳곳에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각성자들이 보였다.
웃음소리와는 상반되는 아무 감정 없는 표정.
'인형들이군.'
저 사람들 또한 자유의지를 제압당한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곧 무결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방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깔깔깔!"
스르륵, 위청천이 정중하게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 순간,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들어가시지요."
위청천이 미소 지으며 무결에게 손짓했다.
어딘지 이상한 지금의 분위기와 어울려, 평소에는 부드러워 보였던 미소조차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하지만 무결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미닫이문으로 발을 내디몄다.
문 안쪽에서 수십 쌍의 눈길이 무결에게로 향했다.
문 안쪽은 화려한 연회장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접견실, 혹은 알현실이라 불러도 될 만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기다란 복도 양쪽으로는 향긋한 냄새가 올라오는 맛있는 음식들이 쌓여져 있었고, 그곳에는 TV 속에서 가끔 보았던 중국의 고위 헌터들이나, 정치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연회장의 끝.
왕이나 앉을 법한 화려한 의자에 앉은 한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앉아 무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벗어젖힌 상반신은 조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탄탄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외모가 연예인들 저리 가라 할 여인들이 앉아 하나같이 애간장 끓는 눈빛으로 의자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세뇌된 여자들이었다.
"왔군."
단 한마디의 말에서도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
이곳의 마력이 바로 그 한 사람에게 동조하는 듯한 엄청난 마력 장악력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결의 기억 속에 있던 바로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대악마 카이.
'찾았다.'
무결이 속으로 눈빛을 빛냈다.
한편으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놈이 이렇게 쉽게 정체를 드러 내다니.'
그동안 꼭꼭 아주 조심스럽게 숨어있어서 몇 단계를 더 거쳐야 녀석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로 자신을 드러내었다.
'패기가 대단하군. 누구든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긴, 그 정도 패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세뇌시킬 수 있있겠지.'
보안도 몇 겹이나 될 정도로 철저하게 했고, 지금까지 카이에 대해 퍼진 게 없다는 사실이 그의 철저함과 강력함을 입증하고 있었다.
지금 이 주변에서 카이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헌터들만 해도, 두세 명 정도는 위청천과 비슷한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다.
중국 최고의 헌터라는 위청천과.
그 사실만으로 그가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대비를 하고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 그놈이 요즘 그렇게 화제가 되는 그놈인가?"
새로운 장난감을 보는 눈빛으로, 카이가 무결을 바라보았다.
장난감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렇습니다."
위청천 또한 무결의 기분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기계처럼 위청천의 말에 대답했다.
스르륵- 탁.
무결이 들어온 문이 닫히고, 이곳에 있던 헌터들이 그 문을 가로막았다.
"위청천, 이놈이 너와 비슷한 무력을 갖고 있다고?"
"예, 저도 고전한 8급 몬스터 '가국'을 저와 거의 동시에 쓰러뜨렸습니다."
"호오, 네가 추천할 만하군."
카이가 무결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 까닥했다.
"이리 와보시게."
단지 손가락의 끄덕임이었지만, 주위의 대기가 무결을 카이 쪽으로 조금씩 밀어내었다.
무결이 그 위압적인 행태에 조금씩 카이 쪽으로 끌려가며 당황한 얼굴로 위청천을 돌아보았다.
"위, 위청천 씨?"
하지만 위청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로 물러나며, 딱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무결은 그 말을 듣고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이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긴장한 표정이었다.
얼굴 옆으로는 식은 땀마저 흘러내렸다.
물론.
모두 연출된 모습이었다.
"그래도 자네는 꽤나 침착하군. 보통 이런 상황에 몰리면 당장 나가겠다고 날뛰던데 말이지.
카이가 큭큭 웃으며 무결에게 칭찬 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자네, 내 부하 할 생각 없나?"
카이가 대뜸 무결에게 대고 물었다.
"시…… 싫습니다."
무결이 싫은 티가 팍팍 나는 눈빛으로 말했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온갖 부귀영화는 다 누리게 해줄 수 있어."
확고한 거절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카이는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부귀영화는 개뿔.'
무결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세뇌되어 개처럼 구르다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게 퍽이나 좋겠다.'
"너 정말 강단 있는 놈이군?"
카이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큭큭 웃었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발치에 있던 한 여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카이의 손길에 이끌려 일어섰다.
'아…….'
그녀의 얼굴을 본 무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잡혔구나.'
-이름 : 장유이 -상태 : 각성자, 세뇌됨 -고유 스킬 : [생명의 수신호]
-습득 스킬 : [응급치료], [꽃의 기도]
어제 저녁, 스카이라운지에서 무결에게 호감을 보였던 여인이었다.
무결이 가국으로부터 구해주었던.
'이렇게 될까 봐 일부러 그녀와 거리를 둔 거였는데.'
일부러 거리를 둔 보람도 없이, 이미 그녀는 카이에게 잡혀와 있었다.
"어제보니 이 여자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던데."
카이가 그녀를 자기의 무릎에 앉히며 큭큭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당겨 그녀의 볼에 쪼옥 키스했다.
"하악."
그 볼 키스만으로 장유이의 몸이 활처럼 휘며,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파르르 몸을 떨었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상태.
"어때? 내 부하가 된다면 이 여자를 네게 줄 수도 있어. 그래도 싫어?"
카이가 마치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무결은 그 모습을 조금 침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순히 자유의지를 빼앗긴 것뿐만이 아니라 몸의 어딘가가 카이 저놈에 의해 개조된 것 같았다.
'역시.'
무결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야겠어, 저놈은.'
인간을 장난감 이상으로는 안 보는 태도에 확고히 결심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