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26
"이그센트 황자님, 대장벽이 함락 되었다고 합니다."
"아, 그래? 드디어 함락되었나 보군. 제길, 내 손으로 대장벽을 무너 뜨렸다면 다음 황권에 한 걸음 다가가는 거였는데."
이그센트가 한 통신 마법사의 보고를 듣고 나를 째려봤다.
"뭐, 그래도 더 좋은 걸 주지 않나, 내가?"
내가 빙긋 웃으며 그의 눈빛을 받아쳤다.
"그건 그렇지."
2황자 또한 피식 웃으며 내 말을 긍정했다.
내가 들고 나온 블루드래곤의 하트 야말로 제국이 노리던 진짜 목적이었으니까.
그것은 아직 고스란히 내 품에 있었다.
이그센트가 '생명의 계약서'에 적힌 의무를 완수해야 비로소 이것은 그의 손에 들어가리라.
"근데 궁금한 게 있다."
"뭔가?"
"제국이 왕국을 친 이유. 내가 듣기로는 '모종의 타이탄'과 관련이 있다던데?"
이그센트와 함께 가던 도중, 내가 무료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거 말인가. 왕국 첩보부, 의외인데? 거기까지 알아내고."
이그센트가 피식 웃었다.
"군사기밀이긴 하지만…… 이제 한 식구가 되니 알려줘도 되려나?"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완전한 한식구가 되면 알려주도록 하지."
"알았다. 그나저나 너희 사령관 부대에는 언제쯤 도착하지?"
"아마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된 것 같군. 그나저나 네 녀석, 이제 너도 내 제국민이 되는 건데 아직까지 반말이냐?"
"아직은 제국민이 아니잖나? 그러니 내가 제국민이 잘 되게 신경 좀 써주면 좋겠다."
내 말이 2황자가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그래, 뭐, 그게 대수라고. 너, 그나저나 제국민이 되면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2황자가 갑자기 나를 보며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네 밑으로?"
"그래, 네 실력을 마음껏 떨칠 수 있는 자리를 주겠다. 그러니 내 밑으로 와라."
그가 눈에 은근한 욕심을 담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음, 나쁠 것 없는 제안이긴 하군. 생각해 보겠다."
"좋아, 기대하지."
2황자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이그센트의 말대로 곧 우리는 제국 총사령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거대한 총사령관 막사가 멀리서도 보였다.
막사로 다가갈수록 이그센트의 얼굴이 펴졌다.
이제야 끝이라는 생각과, 마침내 '블루드래곤 하트'를 얻는다는 희열이 샘솟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알려줘도 되지 않나?"
내가 그런 이그센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뭘 말인가?"
"너희의 '그 타이탄'."
"아, 그거."
이그센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차피 곧 내 밑으로 들어을 녀석이니 못 알려줄 것도 없지. 저기 저 막사 보이나?"
그가 총사령관 기지 바로 옆에 위치한 커다란 막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그센트가 내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 속에, 바로 '태초의 타이탄'이 들어 있다."
"태초의 타이탄?"
"그래, 우리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그 돌이 너희 '왕국의 보물'이라면 저 타이탄은 우리 '제국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지."
"제국의 보물?"
"그렇다. 너희처럼 소국에 불과했던 우리가 가장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이 바로 저것이다. 저 속에 숨어 있던 마법과 기술을 해석하여 우리는 '타이탄'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지금 이 시대를 이끄는 전쟁병기인 '타이탄'을 가장 먼저 만들어내, 그것으로 주위의 모든 나라를 집어삼키며 성장한 것이 바로 티이케 제국이었다.
그 원천이 되는 타이탄이, 바로 이그센트의 손가락 끝에 걸린 막사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대단하다는 얼굴로 막사를 바라보았다.
"저런 대단한 걸 어디서 발견한 거지?"
"우리가 소국이었을 당시 우리 영토 내에 있던 어느 마도시대의 유적에서였다."
"……그걸 들으면 다른 나라들에서 배가 아파 땅을 뒹굴겠군. 그런데 그거랑 '이 돌'이 아주 찰떡궁합인가 보지?"
내가 품속을 툭툭 쳐 보이며 말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저것을 작동시키는데 필요한 게 바로 '그 돌'이라는 내용을 최근에야 해독했거든."
"'이 돌'이 바로 마나 하트로 사용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무려 드래곤 하트를 마나 하트로 쓰는 타이탄이라니.
얼마나 대단한 타이탄일지 상상이 안 갔다.
역시 30여기의 백색급 타이탄 마스터가 쏟아낸 정보의 질은 꽤나 믿을 만한 것이었다.
저런 게 제국에 있는 이상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지.
"그런데 그런 대단한 걸 왜 굳이 여기까지 갖고 온 건가?"
"그야 욕심 많은 우리 형님이, 왕국을 점령하자마자 바로 타이탄을 작동해 보시고 싶으셔서지."
이그센트가 1황자를 비아냥거렸다.
총사령관 막사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형님!"
이그센트가 반가운 얼굴을 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물론 속으로는 그에 대한 경멸을 쏟아내고 있겠지만.
나는 피식 웃었다.
기회였다.
'고맙다, 이그센트. 덕분에 여기까지 빨리 올 수 있었다.'
나는 바닥에 허름한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이 던전에 들어오며 유일하게 제한 되지 않은 마법 아이템 [아르카시아의 공간주머니].
그 위에 발을 내디디며, 읊조렸다.
"소환, 오르토스."
쿠과콰콰-
"어, 어어?"
주위에 있던 제국군들이 일제히 당황하는 가운데.
[공간주머니]에서, 내 녹색의 타이탄이 머리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가르오네 만인대장, 이번엔 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군요.'
나는 대장벽 너머 수도를 지키고 있을 만인대장 가르오네를 떠올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곧 눈앞에 두 기의 적색 타이탄이 나타났다.
1황자 곁에 있던 두 아르페제가 즉각 대응에 나선 것이다.
'자, 그럼……. [마력 폭주2].'
무결이 녹색 오르토스에 깃든 스킬을 사용했다.
녹색 타이탄의 몸에서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 * * 쾅!
검은 타이탄의 검이, 수도의 벽을 두드렸다.
와르르르.
"여기 성벽이 무너졌다!!"
검은 타이탄 조종사의 목소리가 통신을 타고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그쪽으로 검은 타이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저쪽 성벽이 뚫렸다! 막아!!"
만인대장 가르오네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색과 청색의 타이탄들이 검은색 타이탄들의 성벽 내 진입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죽어, 이 새끼들아!!"
"어딜 감히 넘어오려고!"
그러나 이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검은 타이탄에 결국 묻혀 버렸다.
"아아! 여신이시여!"
아카리프 왕국의 타이탄 조종사들은, 그렇게 그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왕궁근위대와 수도근위병단, 그리고 근위기사단마저 전투 일선에서 악을 쓰며 타이탄을 조종하고 있었다.
수도 안쪽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왕족들은 옥쇄(玉碎)를 각오한 채 성벽을 올랐다.
죽어도 성 안에서 죽지는 않겠다는 굳은 각오.
온 국민이 달려들어 수도를 지키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함락까지는 길어도 반나절이다.'
만인대장 가르오네가 암울한 눈으로 전황을 바라보았다.
어딜 보아도 검고, 검고, 또 검은 물결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간혹 섞여 있는 흰색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무이켈, 실패했는가?'
가르오네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에게 '블루드래곤 하트'를 맡긴 건 그로서도 왕국과 자신의 명운을 건 최후의 도박이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을 믿어달라'며 꺼낸 말에, 가르오네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왕국의 보물'을 흠치는 것을 도와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로 하는 그에게 대고 무이켈이 되물었다.
"그러면, 달리 방법이 있습니까?"
그 말에 가르오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밀려오는 제국군에 의해 며칠 안으로 왕국이 함락되리란 것은, 해가 북쪽에서 뜨는 것 만큼이나 명확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무이켈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제가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꺼내놓은 말은 놀라 웠다.
제국이 '왕국의 보물'을 빼앗으려는 이유는, 제국 측에서 가지고 있는 강력한 타이탄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대륙 정복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였다.
더군다나 제국은 이미 왕국 함락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타이탄을 왕국 쪽으로 호송하고 있다고 했다.
왕국을 함락하자마자 그 타이탄에 '왕국의 보물'을 장착하기 위해서.
무이켈의 말은, 그것을 역으로 빼앗자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간자로 잠입하면 그 타이탄을 차지할 수 있노라, 장담했다.
"그리고 간 김에 적진 본부를 초토화시키고 오겠습니다."
"정보는 확실하나? 만약 그 타이탄이 자네가 예상한 곳에 없거나, 예상처럼 강하지 않다면?"
"20명의 백색급 조종사에게 교차로 확인한 정보이니,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20명의 백색급 조종사'라는 말에 가르오네는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면 정보의 신뢰도는 의심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불안 요소가 있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다 떠나서…….
"내가 그대를 어찌 믿나?"
가르오네는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왕국 투리 마을 출신이란 건 확인했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에 그가 제국이 아주 옛날부터 심어놓은 간자일 수도 있었고, 혹은 그가 회유되었거나 배신을 하기로 작정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말에 무이캘은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생명의 계약서'였다.
무이켈은 그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행사해, 두 장의 '생명의 계약서'를 구했다고 했다.
한 장은 이 앞에 내민 ' 진짜' 생명의 계약서.
그리고 다른 한 장은 작전에 사용 할 '가짜' 생명의 계약서.
그는 ' 진짜' 생명의 계약서에 '자신은 절대로 아카리프 왕국을 배신할생각이 없으며, 왕국을 제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가르오네는 병영 내 최고의 마법사를 불러 두 장의 생명의 계약서를 모두 확인했기 때문에, 결국 무이켈의 말을 믿고 도박 같은 작전을 진행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가는 며칠 내에 제국군의 손에 들어갈 터였으니, 이 같은 도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가르오네는 왕성 근위대 내 자신의 세력에 입김을 넣어 무이켈이 '왕국의 보물'을 훔치는 것을 도와주고, 그가 탈출하기 쉽게 북쪽 산맥의 정찰로를 조정해 주었다.
덕분에 무이켈이 무사히 제국으로 넘어간 정황까지 확인했다.
이 제작전은 가르오네의 손을 완전히 떠나 있었다.
"여신이시여……."
가르오네는 '축복의 나무'를 형상 화한 여신을 떠올리며, 자신의 판단이 옳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쾅!!
"으아아아악!!"
또 다시 성벽의 한편이 무너지며, 그 위에 있던 병사들이 돌무더기에 깔려 버렸다.
타이탄 앞에서 성벽은 나무쪼가리 만큼이나 쓸모없는 것을, 병사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아득 바득 성벽을 올라 타이탄에게 끓는 기름이나 돌덩이들을 던져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
"이쪽 성벽, 뚫리기 직전입…… 으악!!"
"이쪽도 위험합니다!"
"지원! 지원 요청합니다!!"
사방에서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보고가 흘러들었다.
그리고.
"우와아아아!!"
검은 물결이 결국 성벽 내로 파고 들었다.
"아아……."
가르오네가 기어코 탄식을 내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신이여…… 저희를 끝내 버리십니까."
한쪽이 뚫린 이상, 그곳에서부터 균열이 급격하게 가속화 될 터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스르릉.
가르오네가 칼을 빼 들었다.
자신이 상징적으로 갖고 있던 타이탄까지 조종 실력이 뛰어난 유능한 젊은 병사에게 내줬기 때문에 그에게 무기라고는 오직 이 오래된 벗뿐이었다.
그는, 자신과 수십 년을 함께했던 검과 최후를 맞이하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그때.
-신이 만인대장님을 왜 버려요?
"……?"
가르오네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큭큭, 주위 둘러보셔봤자 저 안 보이실 겁니다. 아직 좀 멀리 있거든요.
"무이켈……?"
가르오네가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채고, 넋 빠진 얼굴을 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자…… 이제 선물 하나 드리지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새하얀 빛이 눈앞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