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25 나는 녹색 타이탄을 얻은 이후로 지난 며칠간 북쪽의 아군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제국군 사이에서 '북벽의 공포'로 불리게 되었다.
내가 특공대를 끌고 다니며 박살 낸 타이탄은 500기가 넘어갔으며, 그중에는 제국의 천인대장급 이상과 타이탄마스터만이 탄다는 백색급도 무려 30여기나 되었다.
내가 나타난 이후 지난 5일 동안 북쪽의 제국군은 정신없이 전선을 물려야 했다.
그리고 그 덕에 북쪽의 방비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특공대의 숫자는 몰려드는 지원자들로 인해 늘어나 있었다.
……백색급을 10기 정도 잡았을 때쯤, 나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소용없는 일이란 것을.
적을 물리치면, 그다음 날은 그 두 배가 되는 전력이 몰려오고, 다시 물리치면 또 그 두 배가 다음 날에 몰려왔다.
북쪽은 내가 있다지만 남쪽과 중앙의 대장벽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나날이 악화일로였다.
이대로는 도저히 열흘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 * * 나는 위기를 맞은 중앙 대장벽을 지켜내 온 왕국에 이름을 떨쳤다.
거기에 더해 아주 값진 포로까지 얻었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그대를 후작의 지위에 임명함과 동시에 왕가와 왕가의 보물을 수호 하는 근위기사로 임명하노라."
나는 근위기사로 승진했다.
사실 선택권은 두 가지였다.
최전방에 남느냐, 아니면 최후방에서 최후의 저지선인 근위기사가 되느냐.
그리고 나는 근위기사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도 대장벽 사령관의 아쉬움에 가득 찬 눈길이 잊히지 않는다.
근위기사의 임명식이 끝나고, 나는 왕성의 한쪽 건물로 안내되었다.
네모반듯하지만 경비가 삼엄한 왕성 내의 건물.
그 건물은 수도 상공에 그 울창한 잎사귀를 드리운 '축복의 나무'와 맞닿아 있었다.
"저것이 바로 '왕가의 보물'일세."
나를 직접 여기까지 안내해 준 아카리프 왕국의 늙은 왕이 한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왕성과 맞닿은 나무의 한가운데, 새파란 보석이 그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왕국의 젖줄인 '축복의 나무'가 늘 푸르른 이유이지."
늙은 왕이 경건한 표정으로 보물 앞에서 기도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저 푸르 =른 보석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사이 [하늘의 눈]을 발동해 보았다.
-이름 : 블루드래곤의 하트 -희귀도 : 이벤트 -상태 : 축복의 나무의 에너지 공급원, 퀘스트 아이템, 아카리프 왕가의 보물.
-설명 :에인션트 블루드래곤이 영면을 맞으며 남긴 마나의 결정체.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아카리프 왕국인이 아닌 타국인의 손에 들어가면 모험가 신무결의 퀘스트가 종료된다.
"앞으로 자네는 이것을 지킬 것이 =네."
늙은 왕이 말했다.
원래 근위기사는 왕과 왕국의 보물을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왕궁에서는 이미 그전부터 제국이 노리는 보물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노리고 온 것도 바로 그 자리였다.
"부디 이곳에서, 보물을 잘 지켜주도록하게."
한참 당부의 말을을은 늙은 왕이 마지막 당부의 말을을고 자리를 떠나갔다.
이렇게 퀘스트에 이어 던전속 왕에게까지 보물을 지킬 의무를 부여 받았다.
나는 뚫어져라 블루드래곤의 하트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온 왕국에 비옥한 토지와 맑은 물을 선사하고, 수명을 늘리는 열매를 맺는다는 '축복의 나무'의 원천이었다.
온 왕국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려 한다는 왕국의 보물.
나는 왕이 부여한 의무를 저버렸다.
밤이 되자마자, 나는 블루드래곤 하트를 훔쳤다.
* * * 덜컹.
감옥의 문이 열렸다.
"이봐."
나는 잠자고 있던 죄수를 깨웠다.
"……뭐냐."
죄수가 눈을 떴다.
"너희 나라로 돌려보내 주겠다."
죄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포로로 사로잡은 자가 이제 와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니, 개소리로 느껴질 만도 하지.
눈앞의 죄수는 내가 어제 사로잡은 제국의 사령관이었다.
이름은 이그센트.
"대신 조건이 있다. 이 나라는 이제 가망이 없다. 너희 제국에 몸을 맡기고 싶으니, 나를 너희의 총사령관에게 소개해 다오."
내 말에 이그센트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 비웃는 표정.
"네가 죽인 제국의 동포의 수가 얼마인 줄 아느냐?"
"하지만 너희는 철저한 능력제라 그 능력이 뛰어나다면 적이라 해도 얼마든지 받아준다고 들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내가 스윽 품에서 파란 보석을 꺼냈다.
방금 막 훔친 블루드래곤의 하트였다.
이그센트가 그것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건……!"
"그래, 너희 제국에서 원하던 그것이다. 이것까지 넘기겠다면? 이것도 조건으로 부족한가?"
"……충분하다."
"좋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어서 여기 사인하기로 하지."
나는 방금의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적힌 양피지를 내밀었다.
"이건…… 생명의 계약서?"
"그렇다."
이곳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티펙트 중에는 신기한 것이 있었다.
바로 서로 약속된 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 목숨을 앗아가는 계약서.
'생명의 계약서'란 것이었다.
수준급 마법사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야 하는 아티펙트로, 만들어내기는 무지 힘든 반면 효과가 확실해서 아주아주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이었다.
"서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이견은 없겠지?"
"좋다."
나와 이그센트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푸른빛이 나며 계약서가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그센트는 생명의 계약서가 작동 하는 모습을 종종 봤는지 놀라지 않았다.
"자, 그럼 가도록 하지."
나는 이그센트를 데리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아직까지 드래곤하트의 도난이 밝혀지지 않은 지금, 근위기사의 신분은 프리패스였다.
* * * 나는 성 밖에 대기시켜 둔 청색 타이탄을 타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타이탄의 이동 소리는 숨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나, 내 실력이 실력인 만큼 그 소리를 달구지 끄는 소리 정도로 줄일 수는 있었다.
"어떻게 이런 컨트롤을……."
내 옆 빈 공간에 타고 있던 이그센트가 소리 없는 타이탄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수도에서 은벽산맥은 굉장히 가까웠다.
지금쯤 수도에 어떤 소란이 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은벽산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는 북쪽을 탈출로로 삼아 은벽산맥을 넘었다.
북쪽은 내가 한동안 활동한 장소라 훤히 꿰고 있었다.
덕분에 다른 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곳을 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은벽산맥을 거의 넘어서자, 비로소 제국군들의 기지가 저 앞으로 보였다.
우리는 청색 타이탄을 숲속에 버려두고 제국군의 기지 측으로 나섰다.
이제부터는 제국의 사령관인 이그센트의 몫이었다.
"멈춰라!"
보초를 서던 한 병사가 소리쳤다.
"신분을 밝혀라!"
그가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밀며 외쳤다.
여차하면 뒤쪽에서 있는 타이탄들 또한 움직일 기세였다.
"나는 이그센트 라 데파울로다."
이그센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의 얼굴이 훤한 불빛 아래 드러났다.
"데파울로라면…… 황자님?"
병사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가운데서도,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중앙군단 사령관이자 제2황자인 나, 이그센트 라 데파울로가 적진에서 탈출해 중요한 보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너희 사령관께 안내 해라."
이그센트가 위엄이 한껏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참 다시 들어도 난놈은 난놈이었다.
무려 황자인데다가 타이탄마스터의 최고봉이라는 아르페제라니.
이 정도 되는 인물을 사로잡았으니 내게 근위기사라는 최고의 직위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뒤에 있는 분은 누구십니까?"
병사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내 탈출을 도와준 자다. 사령관님께 직접 설명드리겠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차례 야단스러운 신분 증명 절차를 걸쳐, 우리는 제국 측 북쪽 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이그센트가 뒤돌아서며 '이 놈은 이제 필요 없으니 죽여라!'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꼼짝없이 개죽음을 당할 운명이겠지만, 그의 배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생명의 계약서'는 약속을 강요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니 배신은 곧 죽음.
내가 제국에 투항하기로, 그리고 이그센트가 나를 제국의 총사령관에게 소개해 주기로 한 이상, 그가 약속을 어길 걱정은 안 해도 될 터였다.
이그센트는 북쪽의 제국군 사령관에게 적당히 나를 왕국군 내에 있던 제국의 첩자쯤으로 설명했고, 사령관은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위기에 빠진 나라의 적국에 대한 망명은 으레 있어왔던 일이니까.
이그센트 또한 그 으레 있어왔던 일 덕에 운 좋게 왕국을 탈출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내게는 기사나 마법사로서의 소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제국 측은 내게 어떤 구속도 가하지 않았다.
나를 데려가는 이그센트 자체가 굉장한 검사이니까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타이탄에 타지 않은 난, 그냥 마나만 조금 많은 일반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사령관님."
"그럼 부탁합니다."
이그센트와 나는 북쪽 사령관이 제공한 극진한 호위 아래 중앙을 향해 출발했다.
* * * 은벽산맥의 대장벽.
쾅광쾅! 쿠르르릉-
"불덩이 날아온다!!"
어제보다 두 배는 많은 마력대포. 쿵!! 쿵!!
"장벽의 강철 문이 뚫리려 하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두 배는 많은 공성병기 그리고.
"타이탄 부대! 이것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타이탄…… 전멸했습니다."
쿵쿵쿵쿵!
어제보다 두 배는 많은 검은색 타이탄들.
마지막 남은 녹색 타이탄이 검은색의 물결 아래 사라졌다.
대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