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22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 달려들지 않고 대치했다.
그리고 서부의 사나이들처럼 한 발 짝, 한 발짝씩 옆으로 돌며 서로를 탐색했다.
탐색 시간이 길수록 내게 유리했다.
그만큼 [배틀 센스]가 녹색 라미아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하늘의 눈]으로도 한번 녹색 라미아를 살펴보았다.
-이름 : 라미아 -희귀도 : 레어 -상태 : 정비가 잘됨 -고유 스킬 : [마력 폭주].
-설명 : 아카리프 왕국에서 제작된 고급 타이탄. 자아[ego]가 있으며 자아와 '계약'을 맺은 탑승자만 이 조종할 수 있다. '계약' 조건은 라미아가 결정한다.
이것이 주로 소수의 지휘관들과 타이탄 마스터에게만 주어진다는 녹색 라미아였다.
녹색 라미아는 '쉬움' 난이도에서 나오는 가장 높은 등급의 타이탄이기도 했다.
나는 정보를 쭈욱 읽어 내려갔다.
[마력 폭주]와 '계약',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두 가지 모두 녹색 등급 이상의 기체가 갖는 특수 능력이었다.
'[마력 폭주]는 조금 있으면 보겠군.'
능력이 있으니, 사용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계약'.
이것은 인간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혼인'과 다름없었다.
[하늘의 눈]의 설명에는 타이탄만 다른 탑승자를 태우지 못한다고 써 있었는데, 사실 계약한 탑승자도 다른 타이탄에 탑승하지 못한다. 쌍방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아까 브록시아가 다른 타이탄을 탑승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라미아에 대한 탐색이 거의 끝나갈때쯤, 녹색 라미아가 먼저 움직였다.
* * * 녹색 라미아가 푸른 라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급할 것 없다는 여유로운 움직임.
둘의 거리는 서서히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일정 거리가 됐을 때.
콰작.
연병장 바닥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라미아가 폭발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순간 급발진이었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병사들 눈에는 라미아가 마치 쭈욱 앞으로 늘어지는 것 처럼 보였다.
거기에 더해 라미아가 자신의 검을 펜싱 선수처럼 깊숙하게 앞으로 찔러 넣었다.
타이탄의 옆구리 부근을 노리고 날아가는 회심의 일격!
일반적인 푸른 라돈이라면 이 한 방에 반응조차 못하고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푸른 라돈은 달랐다.
휘익- 마치 이미 공격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푸른 라돈이 가볍게 그 공격을 회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녹색 라미아의 몸통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카운터 어택!
'이크!'
브록시아가 깜짝 놀라며 녹색 라미아를 뒤로 물렸다.
'어떻게 이걸 피해낸 거지? 푸른 라돈 따위가?'
녹색 라미아와 푸른 라돈의 스펙 차이는 사실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빠르고, 강하고, 단단하다는 것 정도.
하지만 두 기체 사이에는 스팩을 뛰어넘는 성능 격차가 있었다.
특수 기능으로 마나 하트의 마력을 순간적으로 쥐어짜 내는 [마력 폭주]라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녹색 라미아가 방금 보인 순간적인 가속이 바로 이 [마력 폭주]로 인한 능력이었다.
'제길, 이럴 리가 없어. 한 번 더!'
브록시아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마력 폭주]를 사용했다.
녹색 라미아가 순간적으로 앞으로 쭈욱 늘어나며, 이번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하지만 푸른 라돈은, 녹색 라미아가 검을 내리긋기 직전의 순간부터 이미 회피동작에 들어가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카운터 어택!
'크웃!'
브록시아는 이번에도 재빨리 타이탄을 조종해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
병사들은 푸른 라돈이 공격을 두 번이나 피해내자 난리였다.
"오? 저 푸른 라돈 제법인데?"
"피하기는, 운이 좋았던 거지."
"두 번이나?"
"대장님! 봐주지 말라고요!"
"역베팅 가즈아-!!"
한껏 들떠 있는 병사들의 모습과 달리, 브록시아의 마음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지어 저 푸른 라돈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이, 이제 한 번 남았는데.'
[마력 폭주]는 탑승자의 역량에 따라 사용 횟수가 결정되는 능력으로, 브록시아는 하루 세 번의 사용량을 가지고 있었다.
'한 발은 아끼자.'
남은 한 발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어차피 타이탄 스펙은 내가 위야.'
대신 그는 기체 성능을 이용해 끝 장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흐음!"
그가 타이탄을 조종해 다시금 푸른 라돈에게 접근한 다음, 검술을 펼쳤다.
가문에서 연마한 그의 검술이 타이탄을 통해 펼쳐졌다.
푸른 라돈이 간단하게 그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브록시아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횡베기와 찌르기.
이번에도 푸른 라돈은 공격을 피했다.
종 베기, 횡 베기, 찌르기, 그리고 이어지는 대각선 베기.
다시 종으로 베고, 좌우 베기 페이크를 넣고, 찌르기, 그리고 다시 횡 베기.
현란하고 빠른 검술이 타이탄을 통해 재현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피했다, 피했다, 피했다.
푸른 라돈은, 마치 춤을 추듯 현란한 움직임으로, 그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구경하던 병사들 사이에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앞에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색 등급의 타이탄이, 자신보다 빠른 녹색 등급 타이탄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푸른 라돈이 보이는 움직임은 전혀 타이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타이탄에게서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부드럽고 유연한 움직임.
저 타이탄의 실루엣만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면 누구나가 '인간이잖아요!'라고 소리지를 만큼, 그 움직임은 명확히 인간의 것을 따르고 있었다.
베고, 찌르고, 다시 베고.
공격을 이어갈수록 브록시아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는 안간힘을 쓰며 공격을 이어갔다.
하지만 상대는 화면에 똑똑히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귀신과 장난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악몽인가?'
브록시아는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래, 악몽이야.'
그의 멘탈에 금이 갔다.
그의 검이 조금 느려졌다.
그리고 그 순간.
턱!
그의 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브록시아는 타이탄의 화면을 바라 보았다.
라미아의 검이, 푸른 라돈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리고 푸른 라돈의 검은, 라미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 * *
"특공대장님! 특공대님은 진짜 천재세요!"
조잘조잘.
"어떻게 농사만 짓다가 타이탄을 탔는데도 그렇게 타이탄을 예술적으로 조종할 수가 있는지!"
주절주절.
"그건 예술이었어요, 예술! 타이탄이 어떻게 인간처럼 춤을 춰요!"
재잘재잘.
내 오른쪽에서 날 따라오는 알렉스가 계속해서 찬양의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칭찬도 한두 번이지, 칭찬을 빙자한 끊임없는 수다에 머리가 아파왔다.
"스승님,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지요?"
왼쪽은 또 왼쪽대로 문제가 있었다.
"비켜라! 스승님이 출타하시는데 어딜 감히 아랫것들이!"
왼쪽에서는 한 사내가 내 앞길에 있는 평민들을 저 멀리 쫓아내며 나를 돌아본다.
"저 치들이 스승님의 위대한 실력을 몰라보고 감히 앞길을 막는군요. 다행히 이 제자가 있어서 얼른 쫓아 보냈습니다."
"쫓아내지 마."
"저 새들이 스승님을 바라보며 조잘거리는군요. 스승님의 위대한 조종 실력을 질투하는 것일까요?"
브록시아였다.
나는 알렉스는 그렇다 쳐도 브록시아가 수다쟁이일 줄은, 더군다나 저런 종류의 인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제발…… 조금만 조용히…….'
조용히 시키려면 시킬 수도 있었다.
사실 이미 한번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대가로 돌아온 불편하고 시무룩한 침묵에 결국은 다시 그들의 입을 살려주고 말았다.
나는 내게 이 둘을 보좌로 붙여준 만인대장 가르오네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감탱이…….'
저절로 잇새로 '가르오네……!'하는 이 악문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가던 길에 있던 돌멩이를 신경질적으로 툭 찼다.
그때 우연히 내 신발에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와 닿았다.
[아, 마스터시여. 저 나뭇잎을 보십시오! 나뭇잎이 마스터의 위대한 실력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마스터의 신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슈리가 브록시아의 말투를 흉내내며 나를 놀리고 있었다.
[깔깔깔!]
나는 브록시아와의 대결로 명명백백한 타이탄 마스터임이 입증되었다.
그 결과 그 자리에서 바로 만인대장 가르오네로부터 기사서임을 받은 후, 30명을 통솔할 수 있는 특공대장의 직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특공대에 가장 먼저 배속된 게 바로 이 알렉스와 브록시아였다.
알렉스는 내 특공대가 생기자마자 가르오네가 바로 내 보좌로 임명해 버렸다.
나와 가장 친하다는, 조금은 황당한 이유였다.
아무리 내가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로서니.
덕분에 그는 만인대장의 명령하에 스피릿 기사단에서 잠시 파견 형식으로 나와서 내 밑에 있게 되었다.
브록시아는 자신의 의지로 내 특공대에 소속되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왕국에도 13명 밖에 없다는 타이탄 마스터가 얼마 전까지 농사만 짓던 햇병아리의 부대에 자원할 리가 없었겠지만, 브록시아는 내게 배움을 청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내부대로 스스로 지원했다.
실력 면에서 굉장한 인재인 그를 나는 당연히 격하게 환영하며 받아 들였는데,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나는 그 선택을 한 과거의 나를 욕하고 있었다.
'후우…… 그래, 내 고막을 대가로 꽤 쓸만한 보좌관과 타이탄 마스터 하나를 얻었다치자.'
고막이 부서지면 [유가선공]으로 치료하면 되니까! 하하!
그렇게 긍정의 마인드로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병영 내에 있는 타이탄 창고였다.
이곳은 전시 물자 중 가장 중요한 타이탄의 수리와 정비를 겸하는 곳 이다 보니, 엄청난 물자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명령은 전해 들었습니다. 드시지요."
군인 한 명이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그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이 창고로 보내며 가르오네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 병영에는 주인 없는 녹색급이 단 한 기밖에 없다네. 만약 자네가 그 녀석과 '계약'을 맺지 못한다면 자네는 청색 타이탄을 탈 수밖에 없어."
'쉬움' 난이도에서는 시작부터가 질 수 있다는 녹색급 타이탄을 '어려음' 난이도에서는 왜 이렇게 얻기가 힘든지, 나는 속으로 쩝, 입맛을 다시며 한탄했다.
데이터베이스에서 '어려움' 난이도 옆에 '클리어 불가능'이라는 말이 왜 적혀 있었는지, 지금 이 순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한 기의 타이탄에 여러 명의 기술자와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그것을 정비하고 있는 모습을 곁눈으로 구경하며 지나치길 여러 번.
우리를 안내한 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타이탄 창고의 가장 안쪽 깊은 공간.
녹색의 타이탄이 늠름한 모습으로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