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21 슥- 푸른 라돈이 검을 간단히 피하며 검은 파이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캉- 들린 것은 작은 쇳소리뿐.
털썩.
하지만 그가 지나간 직후 검은 파이톤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대체 그가 어떻게 당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저 녀석, 왜 움직임을 멈춘 거지?"
하지만 잠시 후, 무릎 꿇은 타이탄의 겨드랑이 부분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붉디붉은 인간의 피.
겨드랑이에서 조종석까지 이어지는 초신속의 찌르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고 지나간 것이다.
모두가 경악했다.
"말도 안돼! 타이탄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여!!"
"푸른 라돈이라면 우리 검은 파이톤보다 0.5단계 정도 급수가 낮은 기종 아니었어?"
제국 측 타이탄 조종사 대부분이 당황으로 몸이 굳은 가운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자들도 있었다.
"다들 방어태세! 빨리 진형 굳혀!!"
하지만 이미 한발 늦은 대응.
무결의 푸른 라돈은 이미 적진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으,으아!!"
"죽어!!"
두 기의 타이탄이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러 왔다.
그러나 푸른 라돈은 마치 곡예를 부리듯 교묘하게 두 칼의 틈을 빠져 나가며 검을 놀렸다.
캉, 캉!
털썩, 털썩.
두 타이탄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오, 오지 마!"
"저 자식 잡아!!"
이번에는 세 타이탄이 검을 휘둘러 왔다.
그래도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왔던 동료라 그런지 빈틈이 없는 합격술! 하지만.
캉!
푸른 라돈의 검이 슬쩍 움직이더니 세 검 중에 하나를 툭 쳤다.
카캉!
그러자 그 검의 경로가 미세하게 변경되며 다른 두 검의 움직임을 방해하게 되었다.
푸른 라돈은 그 틈으로 빠져나가며 두 기의 타이탄을 또 다시 쓰러뜨렸다.
제국군 사이로 공포가 번져갔다.
"저, 저 저 새끼 도대체 뭐야?!"
"어떻게 저런 새끼가 왕국군에!"
"타이탄 마스터인 건가? 아니, 타이탄 마스터라면 저게 가능한 거야?"
그러는 사이에도 다들 무결을 상대하며 진영을 짜려 애를 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과 무결의 싸움은, 마치 양쪽 무릎에 관절염이 걸린 검사들과 상대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는 일류검사의 싸움과 같았다.
그만큼 그들은 기동성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과직 콰직.
푸른 라돈은 때로는 적기의 다리를 베어버리기도, 그리고 팔을 베어버리기도 하며 야금야금 적의 전력을 약화시켜 갔다.
"으악!!"
또 다시 두 기의 타이탄이 쓰러졌다.
"저거…… 검술인가?"
"아니…… 그냥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은데……"
"뭐야, 저 기괴한 움직임은?"
그 모습을 관찰하던 왕국군 기사들이 의문에 빠졌다.
분명 무결이 사용하는 것은 검술이 아니었다.
모든 검술이 가지는 검술 특유의 형식과 틀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찌르기와 막기, 베기.
그것이 푸른 라돈이 펼치고 있는 검술의 전부였다.
"저런 건 처음 봐. 기묘해…… 하지만."
한 기사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무섭도록 효율적이야."
다른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그 말이 오가는 사이에 또 다시 두 명의 타이탄이 쓰러지고 말았다.
"재, 재네 도망치려 그런다!"
"모두 포위해!"
얼떨떨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왕국군은 타이탄 조종사들은 슬금슬금 사기가 꺾여 전투 이탈의 조짐을 보이는 제국군을 밖에서부터 포위했다.
그리고 단지 포위만 하고 있었다.
그랬을 뿐인데…….
전투가 끝났다.
무결은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왕국군 기사들로부터 '타이탄 마스터'의 호칭을 얻었다.
* * * 다음 날.
"그래, 자네가 바로 그 타이탄 마스터인가?"
보디빌더를 연상케 하는 강인하고 단단한 육체.
짧게 자른 하얀 머리와 수염.
60대 초반으로 접어든 것 같은 묵직한 노인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리마을의 무이켈이라고 합니다."
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눈앞의 이 노인네가 바로 이 지역 일대의 지휘를 맡은 만인대장 가르오네였다.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내려 책상 위의 서류를 손으로 넘겨보았다.
"음…… 일단 투리마을 출신인 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고……."
그가 계속해서 서류를 살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혼자서 20여기의 개자식들 타이탄을 부쉈다던데, 정말인가?"
티이케 제국은 검은 개가 그려진 국기를 쓴다.
그래서 제국의 적대국들은 지휘고하에 상관없이 그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 말에 서류를 읽던 만인대장 가르오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네, 해보니 되더군요."
"농사꾼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타이탄을 바로 그날 처음 타본 사람이 혼자서 20여기의 타이탄을 고철덩이로 만들어? 허, 참."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긴, 타이탄 조종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종종 발견되어 왔으니까. 자네 정도의 천재가 나타날 수도 있지. 흠……."
그가 턱을 짚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그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뒷 짐을 지고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못 믿겠어. 내 눈으로 볼 때까진."
그렇게 말한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브록시아 불러! 타이탄 갖고 연병장으로 오라 그래!"
"예! 알겠습니다!"
천막 밖에서 복창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자네, 아직 싸울 수 있지?"
나는 씨익 웃었다.
"네."
* * *
"뭐야, 브록시아 대장님, 갑자기 웬 연병장에 타이탄이시래?"
"내가 알겠냐? 타이탄 대응 훈련이라도 하나?"
"그럼 타이탄 마스터의 실력 좀 볼 수 있으려나?"
"대응 훈련이면 못 보지. 실력이 나올 건덕지가 없으니까. 근데 나도 보고 싶다."
"타이탄 조종이 그렇게 기가 막히 다지?"
"예술이라던데."
내가 연병장에 들어설 때는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서 연병장 한가운데 세워진 녹색의 타이탄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
나는 녹색의 타이탄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저 녹색의 타이탄은 지금까지 봐왔던 타이탄들과는 그 모양새부터가 달랐다.
지금까지 봐왔던 타이탄들이 통조림 깡통이었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타이탄은 콜라병이었다.
키도 한 뼘 정도 큰 데다 몸매가 날렵하고 매끈하게 빠진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기동력이 다른 타이탄들보다 뛰어날 것 같았다.
다만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취약할것 같은데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그 녹색의 타이탄에는 한 금발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 기대고 있었다.
그는 나와 만인대장이 다가서자 고개를 들더니 경례를 했다.
"충성! 천인대장 브록시아!"
그는 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조각 같은 꽃미남이었다.
"그래, 왔군. 자네, 이자랑 한판 붙어보게."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호오, 이분은 누구십니까?"
그가 흥미롭다는 듯 가늘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타이탄 마스터 후보지."
"오호?"
브록시아의 눈이 한층 가늘어졌다.
그러면서 눈이 살짝 위로 휘었다.
"이봐, 들었어? 타이탄 마스터래!"
"그리고 둘이 붙는다고? 맙소사, 이거 대박이다. 야! 옆 백인대에도 전해!"
"야, 내기! 내기 돌려! 빨리!"
주변의 병사들이 한층 분주해졌다.
역시 최고의 구경은 싸움 구경이라더니 타이탄들끼리 싸울 거라는 말에 병사들은 생기에 차서 사방팔방으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자네는 물론 녹색 라미아를 타겠고…… 다른 타이탄은 못 타겠지?"
"네, 라미아와 계약 상태니까요."
"음, 마음 같아서는 자네에게도 녹색급의 타이탄을 타게 해주고 싶은데, 알다시피 녹색급 타이탄이라는 게 함부로 태워줄 수가 없는 거라서. 미안하지만 청색급을 타고 싸워 주게."
가르오네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슬쩍 브록시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가 이길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병사들 사이에서 또 다시 난리가 났다.
"오호?"
"호오~"
가르오네는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고, 브록시아는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럼 규칙을 말하겠다."
가르오네가 말했다.
"상대의 몸통 부위에 먼저 검을 가져다 대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하지. 상대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되고, 타이탄은, 음, 손상시키는 것까진 괜찮지만 사지를 파괴하는 등의 큰 손상을 입힐 시, 손상을 입히는 쪽의 패배다. 이상. 질문 있나?"
"없습니다."
"좋아, 그럼 서로 악수하고 탑승하도록."
나와 브록시아는 서로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손을 잡았는데, 브록시아가 슬쩍 손을 끌어당기더니 내 귓가에 말했다.
"호오, 검을 잡은 적도 없는 손이군요. 애송이 군. 건방 떨지 마세요. 죽여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눈 하나 안 찡그리고 경고를 한 그는 슬쩍 웃으며 나를 밀치더니 자신의 타이탄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슬쩍 웃었다.
'도발한 보람이 나오는군.'
행여 저 녀석이 설렁설렁 하기라도 한다면 나도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줄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이럴 땐 이를 악물고 덤벼주는 편이 나로서도 좋았다.
[건벵 뜰지 므르, 애승이~]
그런데 슈리가 그 말이 짜증 났는 지 그의 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했다.
[마스터, 저놈 아주 재수 없네요.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오냐.'
나는 그 타이탄에 탑승했고, 브룩시아 역시 녹색 라미아에 탑승을 마친 것이 보였다.
"대장님, 대장님에게 10실버 걸었습니다! 아주 죽여~버리세요!"
"우리 부대의 긍지를 보여주라고요, 대장!"
"저 자식 묵사발을 내버려요!!"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역시 대부분 처음 본 나보다는 역시 자기들과 함께 고생해 온 대장을 응원했다.
하지만 간혹 나를 응원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무이켈~ 힘내요! 전 당신을 응원 합니다?!"
내 팬 1호인 알렉스였다.
"어이! 나 역베팅 했으니까 이겨달라고! 돈 좀 만져보자?"
그리고 낮은 확률 속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저 녀석 운이 좋은걸?'
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살짝 긴장 시켰다.
그렇게 뜨거운 응원의 열기 속에
"시작!"
가르오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