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18 타이탄이 누워 있었기 때문에 조종석에 착석한 나도 눕게 되었다.
나는 레버를 조작해 머리 뚜껑을 닫았다.
[디바이스 컨트롤]
덕분에 모든 타이탄 조작부의 기능이 한눈에 파악 된다.
조종석 왼쪽에 자리한 푸른 마력석에 손을 댔다.
그러자 손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며 조종석 전체에 불빛이 들어왔다.
정면부에는 타이탄 밖의 상황을 보여주는 화면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각종 조작 버튼과 조종간, 레버가 있었다.
조작 패널은 꽤나 간단했다.
기간테스의 패널과 비교하면 그냥 게임 컨트롤러 정도의 수준.
나는 가볍게 패널을 조작해 다리를 접어 보았다.
쿠그극- 땅을 긁는 소리와 함께 라돈의 다리가 간단하게 접혔다.
'쉽군.'
조종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쭈? 동기화 장치도 있네?'
내 양옆으로는 손을 집어넣는 장치가 내려와 있었다.
그 안에 손을 넣고 타이탄의 팔을 조종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난 안 써도 되겠군.'
조작 패널에도 타이탄의 팔다리를 조종할 수 있는 장치가 충분히 구비 되어 있었다.
아마 이 동기화 장치는 기사들이 좀 더 자신들의 움직임을 잘 구현해 내기 위해 고안해낸 보조 장치인 듯 보였다.
전방의 화면은 '+' 모양으로 생겨서 전후좌우와 머리 위까지 거의 전 방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내 라돈(?)의 팔을 자른 파이톤과 내 라돈(?)을 구해준 새로운 라돈이 싸우는 것이 보였다.
한데 그 라돈이 파이톤에게 밀려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저 파이톤 조종사의 실력이 매우 뛰어난 듯했다.
"흐음, 어디 한번 움직여 볼까?"
나는 가볍게 손올 스트레칭한 다음 버튼과 스턱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탑승형 무기를 접하게 되어 그런지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쿠그그그그- 쓰러져 있던 양팔 없는 라돈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둥거리더니-다리를 쪽 튕기며 그 반동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그 순간 파이톤이 상대중인 라돈의 한 팔을 잘라 버렸다.
아까 내 라돈의 팔을 잘라 버렸듯이.
팔을 잃은 라돈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다시 파이톤에게 달려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검을 들지 않은 팔이 잘렸기 때문에 조금 더 저항하는 모습.
하지만 위태로운 폼으로 보아 저항이 얼마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저 라돈의 탑승자를 위해 조금만 더 서두르기로 했다.
쿵, 쿵, 쿵.
내가 탄 라돈이 마치 걸음마하는 아기처럼 뒤뚱거리며 앞으로 걷더니, 점차 걸음걸이가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그리고 그때, 파이톤이 라돈의 남은 팔을 잘라 버렸다.
캉!!
라돈의 남은 팔이 허공을 날았다.
'저놈은 팔을 자르는 게 취향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배틀 센스]로 물색했다.
주위의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 입력 되며, 원하던 것을 찾아내었다.
파괴된 건물의 잔해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커다란 돌.
그리고 [배틀 센스]가 파이톤의 움직임을 읽어들인다.
라돈을 끝장내기 위해 다가가는 발걸음.
역수로 바꿔 잡는 검.
그리고 들려 올라가는 팔.
그 모든 궤적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입력된다.
내 라돈은 쿵쿵거리며 달려가다가- 뻥!
돌을 찼다.
돌은 머릿속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서, 파이톤의 궤적과 겹쳐졌다.
라돈을 끝장내려던 파이톤의 뒤통수를, 커다란 돌이 통렬하게 강타했다.
깡!!
'나이스 샷!'
균형을 잃은 파이톤이 그만 앞의 건물에다 머리를 꼬라박고 말았다.
'이때다!'
나는 조작판에 빠르게 손을 놀리며 라돈을 조작했다.
쿵, 쿵쿵쿵쿵 라돈이 달리는 속도를 더했다.
한 걸음, 두 걸음이 더해질수록 걸음걸이가 부드러워지고 빨라진다.
그렇게 파이톤에게 다가가던 라돈이, 하늘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는 파이톤의 가슴에…….
쿵쿵쿵쿵- 콰아앙!!
충격적인 드롭킥을 날려 버렸다.
콰앙 쿠당탕탕탕!!
파이톤이 굉음을 내며 다시 건물 속으로 처박혀 버렸다.
특히 내 라돈의 드롭킥에 맞은 가슴부는 움푹 파여 들어가 버렸다.
건물에 파묻힌 파이톤은, 미동도 없이 추욱 늘어져 버렸다.
파이톤의 움푹 파인 가슴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내 라돈의 첫 사냥이었다.
* * * -타이탄으로 저런 발차기가 가능 하단 말이야?! 그것도 팔이 잘린 상태에서!! 이런 미친!
나는 갑작스럽게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아, 들리십니까?
내가 구해준 라돈에 탄 자의 통신이 분명했다.
-일단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스피릿 기사단의 기사 알텍스인데, 혹시 관등성명 확인 할 수 있겠습니까?
"……."
'내가 관등성명이 있을 리가 있냐.'
나는 이곳에서 그냥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인들이 갖는 직위 직급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그냥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 안 들린다.
-……통신, 안 들리십니까? 이상하네, 표시는 이상 없는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알렉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굉장히 젊었다.
목소리만으로는 20대 초 정도로 생각된다.
-에이, 안 들리나 보네. 그나저나 내 생애 타이탄으로 그런 킥을 볼 줄이야…… 이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통신이 꺼졌다.
그런데 문제는 피숙- 알렉스가 아예 자신의 타이탄 밖으로 나와 내 라돈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와서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도망치기로 했다.
벌떡!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리를 튕겨서 제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재빨리 등을 돌려 알렉스에게서 달아났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일단 적을 만나면 부수기.
지금 이 던전의 퀘스트는 말하자면 타이탄으로 하는 '디펜스 게임'이었다.
적들이 쳐들어오는 걸 열흘을 막아야 한다.
'쉬움' 난이도를 선택했더라면 대장군이, '보통' 난이도를 하면 지휘 관급 기사가 되있겠지만 지금의 난 '어려움'을 선택해서 순도 100% 흙수저로 시작해 버렸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적 타이탄을 사냥해 차근차근 계급을 높여가는 것.
그러기 위해선 적기를 격파해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둘째, 웬만하면 지금 이 타이탄보다 상태가 좋은 타이탄을 얻어야 했다.
'하지만 조종석과 사지가 동시에 멀쩡한 타이탄이 전장에 주인 없이 멈춰 서 있을 리가 없으니.'
전장에서 지금 내가 탄 것보다 나은 타이탄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일 게 분명했다.
전에 어려움 난이도를 플레이했던 사람은 세 시간 정도를 돌아다닌 끝에 소변을 보러 간 자의 타이탄을 훔쳤다고 했다.
그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경우였을 테니, 일단은 이걸로 공을 세운 다음 우리 왕국 군부에 어떻게 비벼보는 걸로 가닥을 잡기로 했다.
이가 없을 땐 잇몸으로라도 음식을 씹어야 하는 법.
그렇다면 잇몸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스킬로 씹어 먹으면 되지 않겠는 가!
마침 먹잇감을 발견했다.
"자아……."
저 앞에서 검은 타이탄이 마을의 시설물들을 신나게 파괴하고 있었다.
나는 눈빛을 빛내며 타이탄을 조작 했다.
내 타이탄 라돈이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자세를 낮추고, 놈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 * *
"어어……."
알렉스는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광경에 입을 벌렸다.
양팔이 없는 타이탄이 제국의 타이탄 '검은 파이톤'을 사냥하려고 다가간다.
저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아까는 자신을 도와준 다급한 마음에 나선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전의 그놈은 자신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저 검은 파이톤은 주위를 충분히 경계하면서 파괴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대로 둘이 맞붙는다고 한다면 자신은 검은 파이톤 쪽에 전 재산을 걸 용의도 있었는데, 지금 그걸 저 푸른 라돈이 싸우겠다고 들어가고 있다!
"어, 가, 가면 안돼요! 가지마!!"
애타게 소리쳐 봤으나 돌아오지 않는 슬픈 대답.
아, 임이여.
"젠장, 나라도 가서 도와야지."
제임스는 뒤로 돌아 자신의 푸른 라돈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근데 그때.
쿵쿵쿵쿵.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제임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팔 없는 푸른 라돈이 검은 파이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검은 파이톤이 마침내 푸른 라돈을 발견했다.
"으악!"
제임스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 파이톤의 검에 짓이겨지는 푸른 라돈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로서 동료의 최후를 두 눈에 담기 위해 다시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파이톤이 거대한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팔이 없는 푸른 라돈은 막을 수가 없는 공격.
제임스는 푸른 라돈이 뒤로 점프해 그 공격을 회피할 거라 예상했다.
후웅- 검은 파이톤의 칼날이 바람을 가르고 지나갔다.
제임스의 예상대로 푸른 라돈이 검은 파이톤의 공격을 회피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점이라면 피하기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푸른 라돈은 몸을 한껏 아래로 낮추어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을 피함과 동시에, 그대로 앞으로 달려 검은 라돈을 향해 '태클'이란 것을 걸었다.
콰과광!!
충돌과 함께 검은 파이톤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반면 푸른 라돈은 몸을 눕힌 동작에서 유려하게 등을 바닥에 튕겨, 그 반동으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
제임스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쩍벌렸다.
아까의 드롭킥도 그렇고 저 푸른 라돈의 조종자는, 타이탄의 발 컨트롤 기술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 났다.
푸른 라돈은 바로 몸을 돌려 양팔로 땅을 짚고 일어서는 검은 파이톤의 엉덩이를 차버렸다.
꽝!!!
검은 파이톤이 다시 앞으로 벌러덩 넘어졌다.
타이탄은 한번 넘어지면 일어서는 과정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적과의 전투에서 넘어지면 대부분 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경우는 이번에도 맞아떨어져서, 푸른 라돈의 발이 타이탄의 가슴을 파괴하는 것으로, 전투가 막을 내렸다.
제임스는 한껏 흥분하며 소리쳤다.
"설마…… 타이탄마스터?!!"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소문으로만 듣던 타이탄마스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장군님은 분명 아닐 텐데, 대체 누구야 그럼?"
제임스는 의문스러워하다가, 깜짝 놀랐다.
검은 파이톤을 파괴한 푸른 라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같이 가요!!"
제임스가 재빨리 자신의 푸른 라돈으로 되돌아가 다른 사냥감을 찾아 떠나는 푸른 라돈을 쫓아가기 시작 했다.
* * *
"후퇴! 후퇴하라!!"
황색과 파란색의 타이탄들이 검은 타이탄들에 쫓겨 혼비백산 흩어지고 있었다.
"으아아! 살려줘!!"
검은색 타이탄들은 티이케 제국의 타이탄들이었고, 황색과 파란색은 아카리프 왕국의 타이탄들이었다.
"한 곳으로 튀지 말고 흩어져, 이 멍청이들아!!"
파란 타이탄들 중에 유난히 키가 큰, 머리가 독수리 모양인 타이탄이 외쳤다.
그렇게 외치면서 그는 후퇴하는 전열의 가장 뒤에서 적의 검은 파이톤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카각, 카가각.
검과 검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으아, 죽어 이 개자식들아!!"
그의 거대한 검이 허공을 가를 때 마다 검은 파이톤들이 주춤하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그는 이 일대의 방어를 담당한 백인대장이었다.
그와 그의 부대는 산을 넘어오는 30명의 검은 파이톤에 대항해 같은 30명으로 맞붙었지만, 타이탄의 성능과 기사들의 실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살아남은 아카리프 왕국의 타이탄은 채 열기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제국의 검은 타이탄들은 20 여기나 남아 있었다.
두 배나 되는 숫자 때문에 후퇴도 여의치 않을 지경.
'검은 파이톤, 듣던 것보다 무시무시하구나.'
전쟁을 일으킨 티이케 제국이 최근 개발한 고성능 보급형 타이탄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보다 성능이 0.5단계에서 1단계 낮은 자신들의 타이탄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가는 것을 보며 백인 대장 쿠세이는 가슴속으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남은 부하들이라도 후퇴시키기 위해, 그는 목숨을 내놓을 작정이었다.
"크아아악! 대장님!!"
"대장님, 도망가십시오!"
"시끄럽다!! 빨리 후퇴해서 이곳이 뚫렸다고 상부에 전해!!"
이곳은 수도 진입로의 마지막 교두보인 은벽산맥의 우회로로, 전술적인 요충지였다.
이곳이 뚫렸다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상부에 전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살아 나가야 했다.
'그래, 그게 내 소임을 다하는 길이야.'
백인대장 쿠세이는 각오를 다지고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검에 오러가 맺혔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도망가라니까!!"
"백인대장님, 전에 빌려드린 돈도 못 받았는데, 갚으실 때까지 옆에 있겠습니다!"
"하하하! 난 백인대장님이 여자친구 소개시켜 주기로 했는데. 소개받을 때까지 놔드릴 수 없지!"
"이 자식들……."
백인대장 쿠세이의 옆에 다섯 명의 푸른 타이탄이 남아 검을 치켜들었다.
모두 쿠세이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고참병들 혹은 십인대장들이었다.
"고맙다."
"별말씀을. 대가로 꼭 예쁜 여자 소개시켜 주셔야 합니다?"
"빌린 돈 이자는 두 배로 갚으시고요!"
"크하하하!"
모두 죽음을 예감하고 있음에도 베테랑들답게 웃음을 잃지 않았다.
"크하하하! 저 새대가리들이 가소로운 반항을 하는구나! 모두 나서서 죽여 버려라!! 축제를 즐기자!!"
검은색 타이탄들 중 마찬가지로 덩치가 더욱 커다란 타이탄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우오오!"
그에 동조에 다른 검은색 타이탄에 탄 기사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백인대장 쿠세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모두 동료를 위해 죽자!!"
"알겠습니다-!!"
다섯 명의 부하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5분. 5분만 벌자.'
쿠세이는 자세를 낮추고, 다가오는 검은 물결을 향해 오러가 맺힌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돌격!!"
단 6기의 타이탄이 20기의 검은 타이탄을 향해 달려들었다.
20여기의 타이탄도 지지 않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캉!!
서로의 검이 부딪치며 충돌이 일었다.
불꽃이 튀며 잠깐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획- 백인대장 쿠세이는 한 푸른 타이탄이 전장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타이탄을 본 쿠세이는 황당함에 잠시 타이탄의 컨트롤을 놓칠 뻔했다.
그 푸른 타이탄은, 양팔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