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102 깊은 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엘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내 뒤를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만해요. 그러다 걸리겠어요."
나는 엘리스에게 주의를 주고 살며시 눈앞의 보안장치에 시계를 대었다.
'슈리, 부탁해.'
[네, 마스터.]
슈리가 내 스마트 워치에서 보안기기 쪽으로 옮겨 가, 문을 열었다.
띠릭- 작은 신호음과 함께 도어록이 해제 되었고, 나는 여유롭게 걸어서 바티칸의 여러 미술관 중 하나인 '키아라몬티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수백 개의 석고 상이 복도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석고상은 소형과 중형, 그리고 두 상과 전신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석고상들이 진열돼 있어서 하나쯤 없어진다 해도 누가 알아챌까 싶었다.
"자, 고르세요."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신중하게 엘리스에게 맡겼다.
이곳에 전시된 미술품들은 모두 역사를 간직한 유물들.
아무리 작은 석고 조각 하나라도 어떤 문화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이 방면의 전문가(?)로 보이는 엘리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네에……."
엘리스가 힘없이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엘리스, 기억하시죠? 뭘 고르든 상관없는데, 반드시 가치가 높은 물건 하나는 포함시켜야 해요."
"알았어요……."
"사람 살린다 생각하고 눈 딱 감고 고르세요!"
내 말에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중히 미술품들올 하나하나 집어나갔다.
미술품을 집어 드는 엘리스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나는 엘리스의 뒤를 따르며 그녀가 집어주는 미술품들을 받아 [아르카시아의 공간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30개 정도의미술품을 골라냈을 즈음, 그녀는 한 전신상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가 애통한 눈빛으로 그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로마시대의 갑옷을 입은 사내가 전 방으로 팔을 뻗은 가운데, 그의 다리 어림으로 작은 아기 천사가 조각 되어 있는 대리석상.
"무슨 조각상인가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느낌의 조각상인지라, 이것을 고른 그녀에게 물었다.
"포르티 포르타의 아구구스투스상 이에요. 로마 초대 황제인 그가 연설하는 모습을 나타낸 조각상이죠. 거의 2천년 정도 된 유물이에요."
"그렇군요. 자, 그럼."
나는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는 나갈 것 같은 조각상을 간단히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위이이이이잉--- 시끄러운 경보음이 들리며 미술관 내부가 시끄러워졌다.
"이런, 젠장."
"어머어머!!"
나는 황급히 조각상을 [공간주머니] 속에 집어넣고는, 엘리스와 함께 빠르게 도서관 밖을 향해 달렸다.
'슈리, 아까 경보장치도 다 해제한 것 아니었어?'
[출입 경보 장치는 해제했습니다만 미술품들 쪽으로 연결된 경보망이 따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슈리가 모든 경보를 해제했으리라 지레짐작하고 너무 안일하게 행동해 버린 것 같았다.
"누구낫!!"
입구 쪽에서 무장한 경비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퓨푹- 나는 재빨리 마취총을 꺼내 쏘아 둘을 쓰러뜨려 버렸다.
"죄송합니다."
나와 엘리스는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경비원들에게 거듭 사죄하며 빠르게 미술관 내를 빠져나왔다.
"저기다!!"
일단의 경비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각성자인 우리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라 경비원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로 문제가 되는 이들 또한 나타났다.
'성당기사단……!'
사방에서 강력한 마력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정면돌파를 해야 하나?'
마취총만으로는 제압이 힘든 상대 그렇다고 [유가선공]만 믿고 돌진 하기에는 쪽수도 많고, 실력도 뛰어난 상대들인지라 망설여졌다.
상대방을 다치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요!"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움켜 쥐었다.
그녀가 나를 쥐지 않은 한 손의 검지를 세워 허공을 숙숙 휘저었다.
마치 글자를 쓰듯이.
나는 허공에 남는 희미한 마력의 잔상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몇 글자를 쓰자마자.
"어? 어어?"
"어디 갔어!!"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자들이 당황 하기 시작했다.
엘리스가 검지를 세워 입에 조용히 가져다 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우리의 모습과 기척의 감추는 마법을 쓴 것이다.
우리는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경비원들과 성당기사단원 사이를 고양이처럼 빠져나왔다.
* * * 우리는 바티칸 근처에 마련한 안가 (安家)에 들어섰다.
이곳은 은하그룹에서 몰래 마련해 준 곳으로, 이런 준비를 하느라 2주 가까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자, 시작해 볼까요?"
나는 바로 유물로부터 기운을 추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훔쳐 온 유물들올 하나하나 공간주머니에서 꺼내 세워 둔 다음, 망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유물들을 사정없이 내려쳐 가루를 내기 시작했다.
픽! 퍽!!
석고상이 하나둘 가루가 되어갔다.
엘리스는 무릎을 껴안고 앉아 우울한 눈으로 내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석고상을 한 번 한 번 내려 칠 때마다 그녀의 몸이 움찔움찔 떨린다.
이윽고 아우구스투스상을 제외한 서른여 개의 석고상이 전부 가루가 되었다.
나는 그 가루를 잘 모아 미리 준비해 둔 커다란 솥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솥 안에 마지막으로 특수한 문양이 새겨진 총알을 집어넣었다.
그 문양은 마법진으로, 내가 마력 탄생성을 위해 익혀둔 비법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몬스터의 마정석을 가루 내어 솥에 넣은 다음 솥을 부글부글 끓였다.
그러자 솥에 빠진 총탄에서 빛이 나며 가루 속의 마력과 기운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가온 엘리스가 우울함도 지워 버린 채 그 총알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마력 흡수 마법진이군요?"
"……어?"
나는 깜짝 놀랐다.
엘리스가 설마저 마법진을 알아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엘리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제가 마법에 관심이 좀 많아서요."
"허, 참."
나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저 마법진은 보기에는 간단해 보여도 여러 술식이 들어간 꽤 고도의 마법진……이라고 내게 저 마법진을 전수해 준 마법사가 말했다.
나야 그냥 문양만 기억해서 총탄에 마법진을 새겨 넣을 뿐이었지만, 마법진에 새겨진 문양만 보고 저 마법진의 기능을 이해했다는 것은 엘리스가 최소한 저 마법진을 만들어낼 만한 뛰어난 마법 이론가라는 것을 의미했다.
솥은 곧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는 총알을 솥에서 건져내었다.
가루에 있던 모든 마력이 흡수된 것이다.
엘리스가 흥미롭게 그 과정을 지켜 보았다.
"음……."
나는 총탄 속에 담긴 마력양을 가늠해 봤다.
"왜요, 결과가 안 좋나요?"
엘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예, 생각보다 기운이 너무 안 모이네요. 이 정도 기운으로는 한 명도 구제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나는 이번에는 아우구스투스상으로 다가가서 그것을 부수었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마력탄을 제조해 냈다.
"음……."
"그건 어때요?"
"이건 그나마 낫군요. 한 명 정도는 제대로 정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우구스투스상을 부숴서 만든 마력탄은 악령종 몬스터를 정화하는데 필요한 선기(善氣)가 꽤나 많이 들어 있었다.
"역시 양보다는 질이군요. 저런 자잘한 조각상 천 개 정도는 부숴야 이 아우구스투스상 정도의 기운이 모일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그런 비효율을 감당할 여력이 안 된다.
"……."
엘리스가 잠시 머릿속으로 뭔가를 헤아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우구스투스상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온 유물이라면…… 대략 2천 년 정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온 유물이려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내가 다시 엘리스에게 물었다.
"엘리스가 봤을 때 이상 행동을 보인 사람들의 수가 몇 명 정도였죠?"
"대략 열 명 정도요."
"그럼 아우구스투스상 정도의 가치를 지닌 유물을 열 개 정도 더 골라주시죠."
내 말에 유물 덕후 엘리스가 또 다시 울상이 되었다.
"다, 다른 걸 열 개나 더 부숴야 한다고요?"
"한 발에 한 명 생각하면 당연히 그 정도는 모아야지요. 아니, 혹시 모르니 15개는 골라주세요. 내일 가지러 가게."
나는 그녀가 내 말에 놀라는 게 오히려 조금 의아했다.
"그 총알, 재활용 되는 거 아니었어요?"
……총알이 무슨 재활용품인 줄 아나.
역시나 상황을 몰라서 저렇게 태연한 거였어.
"총알에 들어간 기운은 한 사람 정화하면 그걸로 사라집니다. 재활용 할 수 없어요."
"그럴 수가……."
엘리스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낙담했다.
"아으…… 우리 아우구스상 같은 친구들을 열다섯 명이나 죽이라니……."
엘리스가 아우구스투스상을 일본인 친구 부르듯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엘리스가 또 어떤 발작을 할까 걱정하며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리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을 수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리스트…… 뽑아 놓을게요."
우울한 목소리였지만, 확실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아까 한번 겪었던 일이라 그런지 꽤 적응이 빨랐다.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조용히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