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87
"제가 말씀드린 작전, 아직 유효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들에게 조금 잔인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이 던전을 빨리 깨지 못하면 몇 년 안에 이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죽게 될 테니까.
"하아, 그럼 하는 수 없죠. 이지스 클랜은 계속 갈게요. 지금까지 무결 씨 말이 틀렸던 적도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믿을게요."
그러면서 강하나가 클랜원들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가야죠!"
김치우는 오히려 좋아했다.
"무섭긴 하지만 언니 말이니까……. 또, 무결 오빠 말은 미, 믿을 수 있어요."
김소유 또한 반대하지 않았다.
근데 볼은 왜 발그레한 거지?
"저도 무결 씨 말이라면 믿습니다."
한서후 또한 마찬가지.
나는 마지막 남은 구자운을 바라보았다.
"하아…… 난 빠지고 싶은데."
구자운이 투덜거렸다.
"그럼 빠지시든지요."
내가 웃으며 구자운을 바라보자 구자운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 죽으면? 나도 죽으라고?"
그 순간.
구우우웅- 중앙화산에서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내리던 비들마저 잠시 숨을 죽이게 만드는 거대한 파동.
우리의 시선은 곧장 중앙화산으로 향했다.
세 조각으로 갈라진 화산 중, 우리와 가장 가까운 화산의 꼭대기에 똬리를 튼 놈이 보였다.
쿠쿵- 때마침 번개가 쳐서 놈의 거대한 동체를 잠시 비추었다.
몸통이 굉장히 굵은 뱀 같은 놈.
뱀처럼 차가운 눈이 분명하게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바라본 것만으로 오싹 오싹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번개가 지나간 이후로는, 눈발과 어둠 속에 가려 그 형상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침 이 던전의 터줏대감께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네."
구자운이 중얼거렸다.
"손님 된 입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죠. 가실까요?"
내가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강하나가, 한서후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우리 뒤를 따랐다.
"……할 수 없군."
가장 마지막으로 구자운이 발걸음을 떼었다.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보자.'
어쩌면 이번 싸움에서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잃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지금은 승리에 모든 것을 집중할 때다.'
하늘은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자를 돕는다지 않던가.
진인사대 천명 (盡人事待天命)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니, 결과는 다만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중앙화산으로 갈수록 살을 에는 냉기가 몰아쳐 왔다.
이제는 숫제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처럼 눈발이 휘몰아쳐 오기 시작 했다.
아무리 각성자가 강건한 신체를 지니게 된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뼈를 에는 냉기는 견디기 쉽지 않았다.
"으으, 추, 추워……."
"조금만 참아."
김소유가 오들오들 떠는 가운데 그녀를 업은 강하나가 그녀의 몸에 불의 정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체온을 보존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싸운다면 체온 유지에 빼앗기는 마력으로 인해 전투력이 한층 떨어질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세 조각으로 나뉜 중앙화산 중, 두 조각 사이의 길목에 도달했다.
이곳만 통과하면 원래의 화산이 있던 자리에 생긴 거대한 호수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곳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새파란 눈들이 허공에서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수십 쌍이 우리 주위를 둘러쌌다.
처음에는 무슨 몬스터인지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구분이 안 되었지만, 곧 그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등장한 몬스터는 눈에 익은 몬스터였다.
"드레이크……!"
제1스테이지에서 보았던 세 수호종중 악어의 몸통에 익통의 날개를 단 녀석들이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공중에서 녀석들이 우리를 포위해 오고 있었다.
[저놈들이 불을 뿜으면 다들 몸이 조금 녹으려나요?]
'아니, 몸이 아예 녹아버릴걸.'
드레이크는 불꽃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놈들.
단순히 우리 몸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정도로 그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이 일제히 숨을 후욱 들이켜더니, 우리를 향해 후욱 내뱉었다.
화르륵- 붉은색이 아닌, 새파란 불길이 우리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다들 배리어 치고 방어만 하세요!"
내가 앞으로 치고 나가며 소리쳤다.
나는 사용법을 어느 정도 깨친 소울 스톤을 앞으로 내밀며, 점프했다.
소울 스톤에서 생겨난 새빨간 불의 막이 새파란 불길과 부딪쳐,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츠으으윽- 수증기를 만드는 것을 보니 역시 저 푸른 불길은 화속성이 아닌 냉속성의 불길이었다.
세 수호종의 능력은 원래 베히모스로부터 받은 것.
지금은 레비아탄에게 종속되며 레비아탄의 특징 속성 중 하나인 냉기 속성을 사용하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냉기 브레스, 즉 냉기의 숨결은 베히모스의 화속성 방어막 앞에서 쉽게 스러져 갔다.
덕분에 나는 드레이크 중 한 녀석의 몸에 올라탈 수 있었다.
발광하듯 몸부림치는 녀석의 등에 난 가시를 꽉 붙잡고, 내가 지니고 있던 [윈드 블레스터]를 녀석의 등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종속되어라."
제2스테이지에서 얻은 [레인 소드], [아이스 클로],[윈드 블레스터] 이 세 이벤트 아이템에는 공통적으로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설명 : ……(생략)…… 제2스테이지에 존재하는 어떤 몬스터라도 한 마리를 종속시킬 수 있다. 시동어는 [종속되어라].
내가 제2스테이지에서 고른 이벤트 아이템들의 조건은 간단했다.
무기로서의 위력도, 유틸리티 측면에서의 능력도 아니었다.
이 '몬스터 종속 능력'이 있는 아이템이어야 할 것.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고려한 조건이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적혀 있던 여러 개의 이벤트 아이템 중단 세 개만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아이템 설명에 적혀 있는 문구대로 시동어를 외치자, 원드 블레스터의 기운이 내가 타고 있는 드레이크의 몸에 스며들었다.
날뛰던 드레이크가 잠잠해졌다.
나는 드레이크가 이제 나에게 종속 되었음을 알아챘다.
"옆으로 돌아!"
내가 명령하자 드레이크가 내 명령에 따라 오른쪽으로 크게 선회하여 날았다.
"브레스!"
내 말대로 드레이크가 새파란 브레스를 내뿜어 주위에 있는 다른 드레이크들을 멀리 밀어내었다.
놀랍게도 어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게 종속된 드레이크는 내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끼고 있는 [윈드 블레스터]를 통해 내 의도가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다른 드레이크들은 내가 탄 드레이크가 내뿜은 브레스에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멀리 밀려났다.
이제까지 제2스테이지에서는 섬의 몬스터끼리는 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그 점은 드레이크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나는 다른 드레이크들을 멀리 밀어내자마자 주머니에서 [알파 드레이크의 영혼이 담긴 병]을 꺼내 들었다.
나는 병의 두껑을 열고 그것을 내가 탄 드레이크 위로 기울였다.
병에 담긴 눈물이 드레이크의 몸 위로 떨어졌다.
다른 몬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회색빛을 띠고 있던 드레이크의 몸.
그런데 눈물이 떨어진 자리로부터 드레이크 특유의 녹색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녹색은 둥글게 둥글게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 순식간에 드레이크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으음……."
내가 타고 있던 드레이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동자의 푸른빛은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제1스테이지에서 보았던 드레이크의 눈동자 색이었다.
"뭐야…… 여긴 어디야?"
마침내 드레이크의 입에서 명백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정신이 드나?"
내가 웃으며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너, 너는……! 그때 날 죽이려던……? 근데 뭐지, 이 친근한 느낌은? 왜 네 녀석이 내 주인님처럼 느껴지는 거야? 내 주인님은 베히모스님……."
"지금은 내가 네 주인이야.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갑다. 자, 좌회전!"
"어, 어……?"
녀석이 매우 얼떨떨해하면서도 내 말에 따라 왼쪽으로 몸체를 틀었다.
"좋아, 말 잘 듣는군."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전부 계획대로였다.
이벤트 아이템에는 저마다의 능력이 있었는데, 나는 그중 밝혀진 정보를 조합해 한 가지 시도를 하는 중이었다.
밝혀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제1스테이지에서 '꿈의 조각'을 사용해 얻는 [영혼을 담는 병]의 능력이었다.
이 [영혼을 담는 병]에 눈물을 담아 제2스테이지에서 영혼을 잃은 몬스터에게 떨어뜨리면, 눈물에 담긴 영혼이 그 몬스터에게 스며들게 된다.
즉 나는 알파 드레이크의 눈물을 담았었기 때문에, 알파 드레이크의 영혼이 이 드레이크에게서 눈뜬 것이다.
"베, 베히모스 님은 어떻게 된 거냐?"
"글쎄……. 아마 레비아탄에게 진 다음 어디 짱박혀서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레비아탄이라고? 그 악마가 깨어 났단 말이냐?"
"깨어나다니? 어디서 잠자고 있기라도 했어?"
"녀석은 호시탐탐 이 섬 전체를 차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베히모스 님은 맨날 노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섬 어딘가에 놈의 마수가 뻗치지 않을까 살피고 다니는 일을 하셨지. 놈이 섬을 차지하면 우리들은 영혼을 잡아먹히고 모두 놈의 꼭두 각시가 되거……든……?"
"그래,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야."
"어, 어떻게……. 중앙화산의 [소울 스톤]이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으,응……."
"아, 넌 [소울 스톤]이 뭔지 모르겠군. 우리 섬을 수호하는, 베히모스 님의 힘의 정수다. 그것이 있음으로 써 우리 섬이 레비아탄의 침략으로 부터 보호받고 있었다. 우리 세 수호종이 있는 것도 그곳으로 향하는 통로를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듣자하니 [소울 스톤]이 사라지면 레비아탄이 깨어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잠깐, 그럼 제2스테이지에서 레비아탄의 힘이 강해진 것도 그 영향……?'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전생에서 고려 클랜 또한 [소울 스톤]을 얻어 레비아탄을 사냥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제1스테이지는 지금쯤 뭔가 난리가 났을 것 같군.'
나는 식은 땀을 흘렸다.
전생에서야 고려 클랜이 막판에 [소울 스톤]을 얻고, 그 직후 제2스테이지를 클리어했으니 제1스테이지에 어떤 영향이 왔어도 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제1스테이지에서 이변이 일어나 더욱 클리어가 힘들어 지기라도 하면, 정말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어떤 돼먹지 못한 망나니가 [소울 스톤]을 건든 건……."
"조, 조용히 하고 이거나 먹어라!"
나는 주머니 속에서 마지막 이벤트 아이템, [드레이크족의 종족석]을 꺼내 녀석의 이마에 박았다.
"음……."
녀석이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종족석을 받아들였다.
내 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었다.
나는 긴장되는 눈으로 양상을 지켜 보았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들어맞을지는 결과를 눈으로 봐야 알았기 때문이다.
보라색의 종족석을 박은 녀석으로 부터, 보라색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마침 이쪽으로 다시 몰려들고 있던 드레이크들에게도 그 빛이 닿았다.
드레이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으음……."
"여기가 어디래?"
하나둘 제정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됐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제2스테이지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일부 아이템에는 '몬스터 종속 능력'이 있다.
-[눈물]로 영혼을 되찾은 몬스터가 [종족석]을 착용하면 알파가 되며, 알파의 영향력이 닿은 주변의 모든 동족이 함께 영혼을 되찾게 된다.
전생의 헌터들이 찾아낸 히든 피스(Hidden piece)들.
이 조각들을 조합한다면?
'해당 종족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이벤트 아이템으로 세 수호종 중 한 개체를 종속시킨다.
종속시킨 몬스터의 영혼을 [눈물] 로 일깨운다. 그리고 그 몬스터에 [종족석]을 박아 종족 전체를 일깨우고, 지배한다.
이미 알파가 내 명령에 따르는 상태이므로 종족 전체가 내 지배하에 따른다.
이것이 내가 이론적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세 수호종의 힘은 막대하다.
섬의 다른 몬스터들은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우군 삼아 레비아탄을 대적한다면, 확률은 한없이 올라갈 터였다.
나는 드레이크들을 조종해 일행 곁으로 내려앉았다.
"성공했군요!"
강하나가 기쁨의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네, 첫 번째는 성공했습니다. 이제 '고르곤'과 '어스 팽귄'을 찾아서 종속시킬 차례입니다."
나는 '어스 팽귄'을 떠올리며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꼬맹이 녀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동족에게 따돌림받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을 희생해 자신을 따돌리던 원흉인 동족의 알파, 자신의 어미를 살려내고 죽은 녀석.
그 녀석의 영혼이 내 손안에 있었다.
하지만…….
'사용하기 싫다……'
이걸 사용하면 분명 어스 팽귄족을 지배하에 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사용하지 않고 아이템의 형태로 그대로 던전 밖으로 들고 나간다면 어쩌면 꼬맹이 녀석을 살릴 기회가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녀석의 영혼이 담긴 병은 '영혼의 일부'가 담겼다는 다른 두 병과는 달리 '온전한 영혼'이 담긴 병이라지 않은가.
어쩌면 이걸로 녀석을 현실에 다시 데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미련한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강하디강한 레비아탄의 모습이 떠오르자 고개를 저었다.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사용해도 해치울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태.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이 병을 사용해야 했다.
'미련 버리고.'
김칫국은 나중에 마시고 일단은 그들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마세 조각으로 나뉜 화산 지역에서 한 조각당한 종족씩 있을 것이다.
크르르르!
뒤쪽 저 멀리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타세요!"
나는 우리에게 복종하는 드레이크 들의 등에 일행을 태우고, 다른 화산 구역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를 멀리서 쫓던 몬스터들은 닭 쫓던 개들이 되어 멍하니 우리를 올려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