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85 우웅- 내 몸 전체에서 부드러운 빛이 퍼져 나오며 우리 일행을 감쌌다.
그 빛은 가만히 일행의 상처 입고 지친 몸을 감싸, 마치 위로라도 하듯 부드럽게 그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일행의 어딘지 성나 있던 기운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칠칠치 못했군. 사과합니다.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구자운과 강하나가 서로 무기를 거두었다.
자신들의 이상 상태를 깨달은 두 사람이 헛기침을 했다.
"……다들 힘드시죠?"
내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지나쳐 이곳에 있는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지금까지 며칠간 전혀 쉴 틈이 없었을 것이다.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
제2스테이지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강하나뿐만 아니라 김치우, 김소유, 한서후, 천재령, 그리고 구자운마저도 얼굴에 짙은 피로를 달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적대감에 휩싸인 것도.
"힘들죠. 그냥 힘든 게 아니라 힘들어 죽겠어요."
강하나가 지친 얼굴로 빙긋 웃었다.
"푹신한 침대가 너무 그리워요……."
김소유가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힘들고 지친 얼굴은 똑같았다.
나는 이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말씀드렸을 겁니다. 이 던전을 깼을 때 제가 여러분께 뭘 드릴 수 있는지."
"……."
"제가 약속드렸던 것, 저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이뤄드릴 수 없습니다."
모두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겪어봐서 아시겠죠. 제가 이곳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걸. 그 지식에 기대 말씀드립니다."
나는 모두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여러분은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저를 믿으세요. 그리고 제가 고른 서로를 믿으세요. 그럼 곧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여러분의 손아귀에 들어올 겁니다."
나는 손을 들어 중앙화산을 가리켰다.
"이제 한 고비만 남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뜨거운 기운이 깃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주저앉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는 기대와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가지러 가죠."
나는 뒤를 돌아, 먼저 앞장섰다.
"아직 임자가 정해지지 않은 보물들을. "
피로와 짜증 대신 투지가 들어선 이들이, 발걸음을 떼었다.
* * * 제2스테이지의 날씨는 기본적으로 가을 날씨라고 할 수 있었다. 찬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늦가을 날씨.
여기까지라면 몬스터 사냥하기 좋은 날씨라고 씨부리는 헌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야장천 비가 내리는데다가 갈수록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있는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는 낭만은 커녕 제정신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 말 몇 마디로 제정신을 되찾은 우리 일행은 꽤나 훌륭한 정신건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가끔 온 세상을 밝히는 번개를 통해 우리가 향하고 있는 섬 중앙의 중앙화산이 보였다.
섬의 외곽에서 중앙화산 가까이 갈수록 냉기가 심해지며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진눈깨비로, 진눈깨비에서 눈으로 바뀌어갔다.
걷는 길마다 발이 푹푹 잠기는 눈길을 만들어내는 주위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짜증과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에는 온갖 몬스터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우리는 마주치는 몬스터와 도플갱어들을 돌파하며 갈라진 중앙화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강하나가 달리며 나에게 물어왔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내가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던 것이다.
"저희도 하나 씨가 얻은 것과 같은 아이템을 하나씩 얻어야 했거든요. 근데 예상보다 얻는 시간이 좀 걸렸지 뭐예요?"
내가 슬쩍 구자운을 바라보자 구자운이 딴청을 피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내가 시킨 대로 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혼자 삽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늦은 거라고 할 수 있었다.
강하나 일행처럼 온전히 내 말을 믿지 못한 것이다.
'하긴 서로 신뢰를 쌓을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
강하나 일행은 계속 나와 같이 다니며 내 능력을 조금이나마 엿봤지만, 구자운은 그럴 기회도 없었으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 물론 내 무력적인 부분은 구자운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도 구자운이 막판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내지시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에 늦게나마 또 다른 네임드 몬스터인 [아이스 아울]을 잡고 이벤트 아이템인 [아이스클로]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럼 필요한 아이템은 다 얻은 거 예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예의 주시했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때, 주위에서 갑자기 뭔가가 날아들었다.
"아오, 또야?"
김치우가 짜증을 내며 손을 휙휙 휘둘러 날아드는 것들 쳐냈다.
펑! 펑!
[매직미사일]과 [아이스 애로우]가 김치우의 손에 간단하게 터져 버렸다.
"젠장, 이놈들 강해!!"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한 사람들인데 약하겠냐, 멍청아!"
김치우가 짜증을 내면서도 이벤트 아이템을 노리고 몰려든 빌런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꼭, 크악!"
열 명 남짓 되는 빌런들이 금세 김치우의 손에 정리되었다.
"갈수록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데요?"
한서후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2스테이지 전체에서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을 테니까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소유자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벤트 아이템 세 개가 한 곳에 모여 있다. 제2스테이지에 있는 빌런들이라면 그 아이템을 강탈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이 아마 제2스테이지에 존재하는 각성자 수로는 정점을 찍은 시기일 것이다.
앞으로 도플갱어를 비롯한 제2스테이지의 실태가 알려지며 제2스테이지로 들어오는 각성자들의 수가 줄어들 테니까.
덕분에 우리는 몬스터들뿐만 아니라 다른 각성자들을 꼬리처럼 달고 다니고 있었다. 지금 바로 공격하지 않고 어부지리를 노리는 놈들의 수도 상당했던 것이다.
중앙화산으로 갈수록 안 그래도 듬성듬성 있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또한 굴곡진 지형도 평평해지며 점 차 사방이 탁 트인 늪지대로 변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를 둘러싸고 감시하고 있던 각성자들의 모습 또한 드러나고 있었다.
"많기도 하다."
강하나가 혀를 찼다.
족히 100명에 가까운 각성자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놈들, 거의 빌런입니다. 사정 봐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2스테이지 입장권]을 얻기 위해서는 '꿈의 조각'이 필요했다.
우리야 몬스터 사냥을 통해서도 충분히 빠르게 꿈의 조각을 모을 수 있을 정도로 강했지만, 우리는 사실 각성자들 중에서도 상위 1%의 그룹이었다.
괜히 강하나가 3대 클랜의 수장이며 [최초의 던전] 최후의 5인 출신 이라 불리며 추대받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꾸린 소수정예 클랜인 '이지스 클랜'의 구성원들 또한 전혀 약하지 않았고.
한서후 또한 나와 강하나 사이에 끼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이지, 어디 가면 충분히 대접 받는 헌터였다.
그런 우리와 다른 각성자들의 사냥 속도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몬스터 사냥을 통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제2스테이지를 이렇게 많은 각성자들이 벌써 들어왔다.
무슨 수로 그랬을까?
답은 뻔했다.
저들 대부분이 꿈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 가장 쉬운 길을 택한 자들이다. 그 방법이란 '다른 각성자들을 죽이고 꿈의 조각을 빼앗는 것'이었다. 지금은 우리를 죽이고 우리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고.
"사실 근데 저 사람들 덕에 좀 편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너도 그렇게 느꼈냐? 나돈데."
김소유와 김치우가 말했다.
사실 저놈들이 있음으로써 우리에게 몰려오는 몬스터들이 놈들에게 처치되고 있기는 했다.
본의 아니게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셈이었다.
"근데 저놈들, 계속 따라오기만 하네요."
"아무래도 경쟁자가 많다 보니 눈치를 보는 것 같군요. 오히려 잘됐네요. 좀 있으면 떨어져 나갈 겁니다."
"좀 있으면요?"
내가 강하나의 물음에 대답하려 할 때, 늪 아래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왔다.'
미세한 기운이었지만 발아래로 기 운을 집중해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 따라와요! 그리고 이벤트 아이템 꺼내 착용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내 말에 일행이 황급히 나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강하나와 구자운은 [레인 소드]와 [아이스 클로]를 꺼내 착용했다.
"저 새끼들 도망간다!"
"잡아!!"
우리를 거의 포위하다시피 한 각성자들이 우리를 따라 달려오기 시작 했다.
그런데 그때.
쿠우우우- 늪지 아래에서 뭔가 거대하고 기다란 것이 솟아올라 각성자들의 일단을 '지나'갔다.
"뭐, 뭐야, 저거!"
"또 어스 스웜인가?"
다른 각성자들이 펄쩍 뛰며 몬스터가 등장한 곳으로부터 멀리 물러났다.
제1스테이지의 거대한 지렁이 괴물 어스 스웜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입으로 인간을 한입에 잡아먹고 땅속으로 사라지는 어스 스월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이 지나간 자리의 각성자들은 사라지지도, 어디 한 군데가 다치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은 무언가가 자신들을 지나친 직후 달리던 속력을 줄여 그대로 멈추어 섰을 뿐이었다.
"어이, 이봐! 괜찮아?"
멀찍이 물러났던 다른 각성자가 그들의 상태를 물으러 다가왔다. 그러다가 다급한 경호성을 토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한발 늦은 움직임이었다.
"컥!"
그가 신음과 함께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슴 한복판에 검을 박은 상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서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검을 박은 자는 방금 그가 말을 걸었던 동료 각성자였다. 동료의 몸에 검을 박아 넣은 그의 눈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저놈들 도플갱어처럼 되었어!!"
방금 이상한 몬스터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각성자들은 눈이 파랗게 물들어 주위의 각성자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