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75 녀석은 분노에 가득 찬 상태로 숨을 힘껏 들이켜더니 후악 내뱉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화염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와 고르곤 무리 쪽으로 떨어졌다. 마치 화염방사기가 화염을 내뿜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가 내뿜은 화염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 많은 화염이 나무가 가득한 밀림에 쏟아졌음에도 나무에는 작은 불씨 하나 번지지 않았다. 대신 불꽃은 마치 뱀처럼 가늘게 퍼져 나가 오직 고르곤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들러붙었다.
'화염의 가호'를 받는 알파답게 화염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화염은 고르곤들에게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꾸준히 한곳(내가 있는 곳)을 향해 달리던 고르곤들이 방향감을 잃고 서로를 들이받거나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이 돌멩이 같은 자식 들아!!"
알파 드레이크는 숨이 모이는 족족 고르곤들을 향해 화염을 내뿜어대며 헉헉거렸다.
놈은 지치는지 날갯짓이 느려졌다. 그 덕분에 놈의 몸체가 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지상을 향해 가까워져 갔다.
나는 주의 깊게 사방의 상황을 관찰했다.
드테이크들은 고르곤들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으며, 고르곤들 또한 놈들에게 막혀 쉽사리 내 쪽으로 접근해 오지 못하고 있었다.
알파 드레이크는 나와 가까운 곳에서 불꽃을 날려 고르곤들을 태우고 있었으며, 나는 알파 드레이크의 지척에서 놈을 관찰하고 있었다.
놈의 관절 가동 범위가, 놈이 불을 내뿜기 위해 움직이는 근육들이, 놈의 불이 미치는 범위와 지속 시간, 불꽃의 컨트롤 능력 등, 지금 알파 드레이크가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속속들이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더 이상 입력할 정보가 없을 때.
나는 알파 드레이크를 향해 도약했다.
* * *
"워, 원하는 게 뭐야."
원래대로라면 드래이크종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드레이크들을 조종하는 것만으로 헌터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드래이크들의 우두머리가, 던전에 들어온 지 고작 4일째인 내게 급소를 틀어 잡혀 벌벌 떨고 있었다.
이놈은 웬만해서는 영역의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 매우 조심스러운 녀석이었으나, 고르곤들의 영역 침범 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는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알파고르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드레이크가 같은 알파인 그밖에 없었기도 했고, 지상 종족인 고르곤족은 하늘을 나는 종족인 드레 이크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녀석으로서는 자신을 잡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이용한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참 단순해서 좋단 말이야.'
혹시나 알파 드래이크가 나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녀석을 찾아낼 다른 방법도 세 가지 정도 더 생각해 뒀지만, 쓸모가 없어졌다. 덕분에 쓸 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의 등에 올라탄 채로 놈의 목 아래 부분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원래 악어의 급소는 연약한 뱃가죽이었다.
하지만 악어를 닮은 이놈들의 약점은 뱃가죽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은 지상의 생명체를 상대로 싸우게 진화되어온 비행 생명체인 만큼, 오히려 뱃가죽은 단단한 반면 약점이 등 뒤에 나 있었다.
녀석들의 등 위에는 단단한 비늘이 하나 나 있었는데, 이 단단한 비늘은 다른 비늘과는 달리 거꾸로 나 있었다.
이른바 역린(逆銳).
이 역린을 들추면 생선살처럼 연약한 속살이 나오는데, 나는 이곳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 칼을 그대로 찌르는 순간 놈은 신경이 끊어지며 절명하게 된다. 나는 가장 먼저 녀석을 제압하자마자 다른 드레이크들은 따라오지 못하도록 명령한 뒤 하늘나무 쪽으로 날아갈 것을 녀석에게 요구했다.
하늘나무 너머에 마지막 수호종인 어스 팽귄의 영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요구대로 우리는 하늘나무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다음 요구는 하나밖에 없어. 여기에 네 눈물을 담아."
나는 플라스마 링에 [영혼을 담는 병]을 매달아 녀석의 눈 밑에 갖다 댔다.
"정말? 그러면 날 살려줄 거야?"
녀석의 세로로 쭉 째진 노란 눈동자가 그 병을 슬쩍 보더니 다시 머리 위에 올라타고 있는 나를 향했다.
"그래."
나는 당장에라도 녀석의 역린을 찌를 듯이 칼로 쿡쿡 갖다 대며 녀석을 재촉했다.
"알았어, 알았어, 기다려."
녀석이 다급하게 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기다리자 자그마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영혼을 담는 병]에 담겼다.
그러자 [영혼을 담는 병]이 잠시 빛을 발하더니 저절로 뚜껑이 닫히며 밀봉되었다.
나는 그 병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혹시나 해서 [하늘의 눈]으로 살펴보았다.
-이름 : 알파 드레이크의 거짓된 눈물이 담긴 병 -등급 : 레어 -설명 : 알파 드레이크의 거짓된 눈물이 담겨 있다. 거짓된 눈물로는 영혼을 담을 수 없다
"……악어의 눈물이라더니."
[하늘의 눈]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속을 뻔했다. 생긴 게 [알파고르곤의 영혼이 담긴 병]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로 병을 열어 눈물을 내 버렸다. 그러자 병은 다시 [영혼을 담는 병]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얼굴로 알파 드레이크를 내려다봤다.
"거짓 눈물?"
"어, 어떻게 알았지?"
그러자 도리어 알파 드래이크가 황당해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살짝 열이 받아서 역린 속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그, 그만! 그만! 하지만 저거 내 영혼의 일부를 담는 병이잖아!!"
"그래서?"
"저기에 영혼을 담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데 어떻게 내 진짜 눈물을 담아!!"
"어떻게 되는데?"
"그야, 내 힘이 뭉텅이로 깎여나 가게 될 텐데!!"
"하아…….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가 목숨을 틀어쥐고 있는 이 상황이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힘이 깎여나가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은 건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 녀석이제 목숨을 걸고 내게 사기를 치려 했다는 것이다.
"너……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 이번에도 제대로 안 하면 너 죽이고 다른 녀석의 눈물을 뽑아낼 거야."
다른 드레이크의 눈물을 받아도 괜찮긴 했지만 사실 웬만하면 알파의 눈물을 받고 싶었다.
일단 다른 녀석의 눈물은 알파의 것에 비해 성능이 조금 모자라는데다가, 이 기회를 놓치고 다른 드레이크의 눈물을 얻기 위해 들어갈 노력과 시간과 고생이 눈에 보이듯 훤 했기 때문이다.
알파를 죽인 뒤 종족석을 빼앗는다면 드레이크들도 고르곤들처럼 눈이 벌게져서 날 쫓아올 게 분명했는데, 그 상황에서 한 녀석의 감정이 우러 나온 눈물을 얻을 생각을 하니 벌써 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렇다고 이 교활한 알파 드레이크를 놔줬다가 다시 잡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고.
내게는 종족석과 눈물 두 가지가 모두 반드시 필요했다.
'이 기회 놓치면 진짜 똥 된다.'
내가 진짜와 가짜 눈물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이 녀석도 더 이상 사기를 칠 생각은 안 할 테지만 혹시라도 이번에도 나를 속여먹는다면 고문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제대로 살기를 담아 녀석의 역린을 찔러 들어갔다.
"아, 알았어."
녀석이 공포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후, 흡. 후, 흡."
"너 뭐 하냐."
"눈물 빼려고 감정 잡는 거야. 기다려 줘."
참 악어 주제에 별의별 짓을 다 한다 싶었지만, 나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눈 아래 정면으로 하늘나무가 보였다.
조금 있으면 하늘나무 위를 지나갈 상황에서, 나는 하늘나무를 구경했다.
밀림에서 높은 이 나무는 곳곳이 마치 비행착륙장처럼 편평하게 깎여 있었다.
드래이크들의 쉼터 내지 생활공간으로 보였다.
나는 알파 드레이크가 계속해서 심호흡하는 동안 하늘나무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심호흡?'
그러다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온몸의 감각을 긴장시키며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새빨갛고 가느다란 불줄기가 독사 처럼 내 목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팔에 힘을 주어 칼날을 역린 속으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끄아아아악---!!!"
알파 드레이크가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놈과 뒤엉킨 나는 불행하게도 하늘 나무 중단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는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도 한 손으로 단단히 놈의 비늘을 붙잡고 이마에서 녹색 종족석을 분리해 내었다.
그리고 [영혼을 담는 병]을 바라보았다.
'제발…….'
나무가 급격하게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나무와 충돌할 상황에서…….
반짝.
[영혼을 담는 병]이 한 차례 명멸 했다.
나는 그 모습을 포착한 순간 병을 낚아채는 동시에 드래이크의 등을 박찼다.
쾅!!
발아래서 알파 드레이크가 나무줄기와 충돌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튀어나온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은 채로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알파 드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하늘나무는 중단이라 해도 엄청나게 높아서 알파 드레이크가 지상과 충돌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결국 녀석의 추락에도 끝은 있었다.
쿵!!
발밑 저 멀리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꿈의 조각 50개를 획득했습니다.]
그제서야 시스템음이 울리며 내게 알파 드레이크의 죽음을 알려왔다. 그리고 몬스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많은 꿈의 조각이 내게 들어왔다.
지금의 시스템음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아까 알파 드레이크를 죽이지 않았다. 내가 아까 찌른 것은 녀석의 급소가 아니라, 그 옆의 근육이었다.
녀석의 근육을 찌른 나는 칼을 통해 녀석의 몸속으로 [유가선공]을 불어넣어 녀석의 근육을 사정없이 뒤틀어 버렸다. 공중에서 그냥 놈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고통을 가한 것이다. 계속해서 녀석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면 안 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눈이 돌아가는 아픔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 속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이 녀석이 흘린 마지막 눈물이 되었다.
"……후."
나는 아래를 마지막으로 일별하고는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나무 상단부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쯤 드래이크들도 녀석들의 알파가 죽은 것을 알았을 테니, 빨리 볼일을 보고 어스 팽귄들의 영역으로 가야 했다.
이제는 드래이크와 고르곤 양쪽으로부터 추적을 받을 테니 서둘러 이곳을 떠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