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73 일반 물리법칙에서는 속도의 저하가 곧 파괴력의 저하를 가져오게 마련이지만, 물리법칙을 비트는 고르곤의 [둔화 광선]은 단지 속도만을 저하시킬 뿐, 그 물체가 가지는 파괴력 자체는 그대로 유지시킨다.
만약 둔화광선이 파괴력까지 감소 시키는 종류의 초능력이었다면 이런 방식으로는 녀석들을 이렇게 쉽게 쓰러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았겠지만.
쾅--!!
다섯 번째 개체를 쓰러뜨리자 블랙 미슈릴 슈트를 가동시키던 에너지 구슬이 작동을 정지했다. 나는 에너지 구슬을 갈아 끼우며 몸을 풀었다.
벌써 이놈들을 상대하며 세 번째로 갈아 끼우는 에너지 구슬이었다. 그 만큼 한 놈 한 놈을 상대할 때마다 블랙미슈릴 슈트에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여덟 번째 개체를 쓰러뜨릴 때쯤 슬슬 몸과 슈트에 이상징후가 왔다.
내 주먹의 뼈가 조각났다가 [유가 선공]과 [천옥보주]의 치유력에 의해 빠르게 다시 붙었다.
블랙미슈릴 슈트 또한 마디가 삐걱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슈트 역시 자가 수리기능에 의해 금방 원상복구 되었다.
이제는 고르곤의 파괴력이 내 치유력과 슈트의 수복력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그걸 꺼낼 때가 아니야.'
나는 횟수를 거듭해 고르곤을 쓰러 뜨릴수록 자꾸만 주머니에 가려는 손의 욕망을 억눌렀다.
준비해 온 '비장의 한 방'이 있긴 했지만,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는 만큼 지금 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열 번째 개체 까지 쓰러뜨리자, 마침내 알파고르곤의 곁을 지키던 녀석 중 하나가 움직였다.
-이름 : 베타고르곤 -상태 : 흥분 -설명 : 알파를 호위하는 종족 제 2의 강자 드디어 이인자가 납셨다.
'버터다오.'
나는 파지직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블랙미슈릴 슈트를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베타고르곤이 투레질을 하더니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덩치가 처음에 나온 녀석에 비해 족히 세 배는 되는 녀석.
나는 제자리에 선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시 주머니 속에서 나온 내 손에는 거대한 기계 건틀릿이 들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였다.
철컥.
나는 그것을 오른팔에 그대로 장착 했다.
건틀릿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기괴해 보이는 이 물건은, 이전에 내가 던전에서 보상으로 받은 '기계팔 EW-04'의 기술을 추출하여 오로지 펀치력 하나만을 위해 개발한 물건이다.
그 때문에 손목 부위는 관절이 따로 없었고, 팔꿈치 부분만 관절이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위잉- 위잉- 기계 움직이는 구동음과 함께 팔꿈치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흠, 좋아."
나는 내게 달려오는 베타고르곤을 바라보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때가 다가왔을 때, 내공을 다리에 집중하며 진각을 밟았다.
쾅!!
땅바닥에 살짝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밟은 진각.
그 힘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허리를 거쳐 내 오른팔로 전달되었다. 나는 건틀릿이 장착된 오른팔을 강하게 내뻗었다.
위잉- 고르곤의 [둔화 광선]이 여지없이 내게 와 닿았고, 내 몸은 또 다시 느려졌다. 이전보다 [둔화 광선]의 위력이 강해서 내 움직임은 마치 우주 복을 입은 우주비행사처럼 둔해져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주먹과 주먹에 달린 건틀릿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고 나아갔다. 그리고 건틀릿이 파랗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건틀릿 내부에 장착해 둔 수속성의 마력석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블랙미슈릴 슈트와 다른 무기들에 사용하는 에너지구슬 대신 마력석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직 대량의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뿜어낼 때의 안정성 면에서 에너지구슬보다 마력석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부분의 기술 개발이 아직 기계공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순간적으로 대량의 에너지를 방출해야 하는 이 건틀릿에는 극 소수의 몬스터에게서 획득할 수 있는 마력석을 사용하게된 것이다.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며 내 몸의 물리법칙이 순간적으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둔화 광선]의 마력을 건틀릿에 담긴 마력이 밀어낸 것이다.
건틀릿의 돌출된 전면부로부터 나온 물빛의 마력이 내 몸 전체를 둘러싸며 일렁이고 있었다.
베타고르곤의 뿔과 내 건틀릿이 급속도로 가까워져 갈 때, 나는 타이밍을 재며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부스터 온!
주먹을 꽉 움켜쥐자 팔꿈치 부분에서 커다란 불꽃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치 미사일이 떨어진 듯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후우."
나는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내 몸은 폭발의 진원지에서 뒤쪽으로 한참을 밀려나 있었다. 건틀릿의 부스트 기능까지 썼음에도 베타고르곤의 돌격을 온전히 버티고 서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역시 승리는 내 것이었다. 베타고르곤이 숨을 헐떡거리며 초라하게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놈의 덩치와 맞먹던 거대한 크기의 뿔은 산산조각이나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한 놈만 남았군.'
나는 저 멀리서 숨을 후욱후욱 내 뿜으며 투레질을 하고 있는 알파고르곤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방금 나왔던 베타고르곤과는 달리 크기가 제일 처음 녀석과 비슷할 정도로 작았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열한 놈이었나.'
아마 나는 고르곤족의 열한 계급을 차례로 박살 내고 올라온 것이리라.
이제 마지막 한 놈만 박살 낸다면 나는 고르곤족의 자존심을 짓밟고 그들의 눈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그 한 놈, 알파고르곤이 내게 돌진을 시작했다.
"후우."
나는 건틀릿에서 빛을 잃은 수속성 마력석을 꺼내 버리고 그 자리에 노란색의 마력석을 끼워 넣었다. 어렵게 구한 금(金)속성의 마력석이었다.
이번엔 내 몸에 노란빛의 마력이 휘몰아쳤다.
물빛의 수속성 마력과는 달리 노란 빛의 금속성 마력은 마치 철갑처럼 단단하게 내 몸을 둘러쌌다.
그런데 뭔가 불안했다.
저 멀리서 내게 달려오고 있는 알파고르곤의 느낌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이 발을 딛는 자리마다 소형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터져 나가고 있었다. 대지가 놈의 발힘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가는 것이다.
녀석이 뿜어내는 파워와 속도는 지금까지의 녀석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엄청났다.
더욱 끔찍한 것은 녀석이 달리는 길 주변의 암석들이 대지에서부터 날아올라 녀석의 몸을 감싸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이윽고 녀석은 암석들에 의해 가려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녀석을 감싼 암석은 정확히 녀석의 모습을 본떠서 크기를 불려가기 시작 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저건 반칙이잖아?'
녀석의 발밑의 암석이 마치 해일처럼 거대하게 일어나며 내게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디딘 곳 주위가 어두워졌다. 저 멀리서부터 하늘을 가로막고 내게 다가오는 암석의 해일에 의해 그늘이 진 것이다.
알파고르곤은 내게 돌진해 오는 해일의 가장 위에서 거대한 모습으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몸짓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처럼 역동적이었지만, 뒷발들이 해일에 집어삼켜져있어서 엄밀히 말해 달리고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나는 거대한 자연의 폭압을 마주한 것처럼 숨 막히는 위압감을 느꼈다.
던전 데이터베이스에서 보았던 것 보다, 그리고 과거에 이놈과 마주했던 헌터의 경험담을 건너건너로 들었던 것보다 눈앞에 마주한 놈의 위용은 엄청났다.
'이대로는 안돼.'
나는 내 기계팔 건틀릿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슈리를 찾았다.
'슈리.'
[네, 마스터.]
슈리가 조금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녀석 역시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
'준비해.'
속으로 간단하게 말했으나 이심전심.
그 뜻은 말로 전하지 않아도 슈리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준비됐습니다, 마스터. 선택하시죠.]
슈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 마력이 훅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 눈앞에 세 개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셋 모두 내가 과거에, 아니, 미래라고도 할 수 있는 전생에 겪어보았던 기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 한 가지를 선택했다.
내 주머니 속에서 금속들이 튀어나 오며 블랙미슈릴 슈트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디바이스 컨트롤]과 [마스터피스]를 동시에 사용하는 내 필살기 '기계변환'이었다.
금속은 계속해서 튀어나오며 블랙미슈릴 슈트 위에 들러붙었다.
내 몸이 살짝 떠오르며 발아래도 금속들이 날아와 발받침을 형성했다. 그리고 블랙미슈릴 슈트의 표면에 외골격 뼈처럼 들러붙는 금속들이 결합되었다.
등과 배에, 그리고 팔과 다리의 표면에 강철의 뼈들이 날아와서 외골격을 형성했다. 이 모든 뼈와 뼈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내가 발하는 움직임을 수십 배로 증폭시켜 줄 뼈대들이었다.
이 금속들은 지금까지 개발된 가장 가볍고 단단한 금속인 '화이트미슈릴'이었다.
내 몸은 순식간에 화이트미슈릴의 골격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었다. 내 몸을 둘러싼 이 강화 외골격은 후일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쓰이게 될 미래과학병기로, 일명 엑소 스켈레톤 슈트(Powered Exo-Skeleton Suit) 라 불리는 것이었다.
외골격이 완성되었지만 주머니 속에서는 계속해서 금속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금속들은 내 오른팔에 끼워져 있던 건틀릿에 결합되어 거대한 원뿔의 형상을 이루었다.
원뿔은 내 몸보다 세 배는 커다란 크기까지 커져갔다.
그 원뿔에는 나선형의 홈이 나 있었다. 그 나선형의 원뿔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준비는 됐군.'
나는 다리를 구부렸다.
강화 외골격이 내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굽혀졌다.
나는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막대한 파워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사용해 봤기 때문에 몸 곳곳에 들러붙은 이 새하얀 골격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낼지는 이미 짐작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화 외골격과 드릴을 이룬 화이트미슈릴이 은은한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화이트미슈릴이 금속성의 마력을 흡수하여 생기는 현상이었다.
나는 도약 직전의 고양이처럼 한껏 몸을 움츠렸다.
눈앞으로 거대한 암석의 해일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타이밍을 쟀다.
'아직, 아직……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각도와 타이밍이 오자마자.
쾅!!!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콰아아아- 드릴이 회전하는 소리가 폭풍우 속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강력한 [둔화 광선]이 내 몸을 옥 죄어 왔지만, 최대출력을 발하는 내 마력과 마력석의 힘은 그 힘을 충분히 상쇄해 냈다.
허공을 날아가며 거대한 암석의 해일로 튀어나가는 내 머릿속으로 문득 당랑거철(趙螂推撤)이라는 사자 성어가 스쳐 지나갔다.
내 자신이 사마귀처럼 초라해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암석의 해일이 사마귀의 눈에 비친 수레처럼 거대해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자연의 위대함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함이라는 오래된 테마가 생각났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극복해 왔고, 원래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지.'
[마스터의 것은 매운 모양이군요.]
나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슈리의 말을 머릿속으로 흘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가즈아아!!!"
콰콰콰콰-!
폭풍처럼 회전하는 드릴과, 쿠르르르르- 맹렬하게 몰아치는 해일의 첨단이, 마침내 맞닿았다.
콰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