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계신과 함께 070 내가 딸려나온 곳은 짙은 녹음이 가득한 숲속이었다. (70/215)

  기계신과 함께 070 내가 딸려나온 곳은 짙은 녹음이 가득한 숲속이었다.

  높고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그림자로 가득한 이곳은, 나무의 넓은 이파리들로 인해 숲 전체가 어두침침했다.

  숲의 어둠만이 나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슈우욱- 내 머리를 노리고 다른 단도 한 자루가 날아왔다. 내가 잡고 있는 존재가 반대편 손에 든 단도로 나를 찔러온 것이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일격이 날아왔다.

  내공이 가득 담긴 엄청난 빠르기의 일격.

  스킬을 사용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대로 칼침을 맞아버렸다.

  팟!

  피가 튀었다.

  나는 어깨에 칼을 맞은 채로 상대를 꽉 껴안았다.

  곧 상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상대가 내 포근한 포옹에 사랑과 평화를 느끼고 움직임을 멈춘 건, 물론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대의 척추를 부러뜨려 버린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평화롭게 [유가선공]으로 상대의 혈도를 틀어막아 움직임을 멈추어 버린 것이다.

  점혈 (點穴)이었다.

  "후우, 드디어 잡았군."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온몸의 상처를 치료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까 관성택의 [거인의 주먹]에 맞아서 블랙미슈릴 슈트와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사실 보기와는 달리 부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이건 다 내가 '일부러' 연출한 거 였기 때문이다.

  왜?

  어둠 속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상대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상대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마혈은 짚었지만 아혈은 짚지 않았기 때문에 말은 할 수가 있었다.

  "뭘?"

  내가 상처를 치료하며 대수롭지 않게 묻자, 상대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

  "아."

  나는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음, 사실 확신은 아니었어."

  "뭐?"

  "찍은 거라고, 멍청아."

  이상했다.

  이제1스테이지는 거의 면적이 서울시 두 배정도의 크기로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지하로 깊이 뻗어 있는 거미굴 또한 굉장히 크고 복잡해서 다른 각성자 무리를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데 만나 버렸다.

  그것뿐이라면 정말 낮은 확률이지만 그냥 우연히 만났으려니 했을 것이다.

  거기에 두 가지 이상한 점이 겹쳤다.

  하나는 김치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

  김치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존재는 분명 우리를 공격한 자들에게 있어 전력상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없었더라면 김치우 일행이 그들을 간단히 제압했을 테니.

  그만큼 김치우 일행과 적들의 전력 차는 분명했다.

  한마디로 사라진 존재는 전력에 균형을 맞추는 존재였다.

  그런 중요한 존재가, 나와 강하나가 적들을 제압했을 때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이상한 점 하나는 우리가 제압해 두었던 각성자들이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

  나는 이 두 가지 일에서 특정 유형의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두 그룹을 이간질시킨 다음 부상당한 이들을 침으로써 손 쉽게 포인트를 얻는 사람들.

  분명 전생에도 존재했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놈이 열다섯 삼일그룹 각성자들을 죽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마 삼일그룹 녀석들도 이놈의 존재를 제대로 못 알아차렸을 것이다. 알았다면 그렇게 이용만 당하진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놈의 다음 행동양식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우리를 또 다시 다른 무리와 붙임으로써 전력을 갉아먹고, 기습할 것. 그래서 연기를 한 것이다.

  부상당한 척.

  "넌 너무 빨리 네 존재를 드러냈어."

  "……당신이 이렇게 강한 줄 알았다면 더 조심했겠지."

  그는 이미 우리가 제압해 둔 열다 섯 명의 삼일그룹 각성들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이 녀석을 경계하고 있었고,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지켜보고 있을 녀석을 꾀어 낼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 녀석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존재를 지켜보고 있었을 테고, 그래서 내가 우리 일행에서 포인트를 가장 많이 가진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날 노릴 확률이 가장 클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부상 당한 다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이다.

  물론 강하나에게는 미리 내 예상을 알려둔 상태였다. 혹시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기습한다면 그녀가 막아낼 수 있게.

  "이렇게 첫 시도에서 나와서 다행이야. 안 나오면 연기를 좀 더 하려 그랬는데."

  "……자신있었거든. 죽일 자신이."

  그럴 만했다. 생각보다 이 암습자의 실력이 강했다.

  아마 내가 아니라 강하나를 기습했더라면 어쩌면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야 [유가선공]이란 희대의 치유 술 겸 제압술이 있었으니 이렇게 어깨만 내어주고 쉽게 제압한 거지만, 강하나라면 과연 부상 없이 이 녀석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건데. 죽일 거야?"

  "흐음, 글쎄."

  일단 얼굴이나 살펴보자는 생각에 나는 그의 복면을 벗겼다.

  그리고.

  "……!!!"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곳엔 아는 얼굴이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강인한 눈매.

  호인처럼 보이나, 사실 누구보다 잔인한 이자는 회귀 직전 나를 도와 주었던 두 사람의 인물 중 하나였다.

  땅의 지배자.

  일인군단.

  이 남자를 수식하던 말은 많았다.

  하지만 아마 이 남자를 지칭하는 수식어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이것 일 것이다.

  수라마교(修羅魔敎)의 교주.

  이자는 훗날 수백의 헌터들이 우러러 따르는 최강 종교의 교주가 될 것이다.

  나는 뒤늦게 [하늘의 눈]을 사용해 이자를 바라보았다.

  -이름 : 구자운 -상태 : 각성자 -고유 스킬 : [새도 트랜스]

  '이름이 구자운이었군.'

  수라마교주의 이름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나는 비로소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이름뿐만 아니었다. 그의 과거 행적 또한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전대 수라마교주를 꺾고 마교 최강자로 등극한 최강의 인물.

  그가 내가 알고 있던 수라마교주였다.

  근데 그 젊은 모습을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이야.

  노화가 느린 각성자이다 보니 10 년 후 늙었을 때의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새도 트랜스]?'

  수라마교주의 능력은 대지를 움직이는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근데 [하늘의 눈]으로 살펴본 그의 고유 스킬은 대지 관련 스킬이 아니었다.

  '이 인간, 특기를 숨기고 있었군.'

  고유 스킬은 그 자신이 가진 가장 능숙한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고유 스킬이 별로 안 좋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습득 스킬을 주력으로 사용하지만, 고유 스킬이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들은 당연히 고유 스킬을 주력 스킬로 사용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 교주는 [새도 트랜스]라는 스킬을 쓰지 않았었다.

  아마 대규모 교전에는 대지 관련 스킬이 더 쓸모가 많아서인 측면도 있있겠지만, 그 정도로 꿍꿍 숨긴 걸로 보아 품속의 비수 같은 스킬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튼…….

  '어떡한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혹시 제가 풀어주는 대신 제게 복종하라 하면 하실 겁니까?"

  나는 미래의 수라마교주, 구자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기꺼이 되어주지."

  그가 진지하게 내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거짓말을 뻔뻔스럽게도 하는군.'

  [유가선공]을 익힘으로써 타인의 몸의 반응을 면밀히 살필 수 있던 덕분에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떨림이 없었다.

  "역시 안 믿는군. 큭큭."

  그 또한 내게서 불신의 감정을 읽은 듯했다.

  "보통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다 넘어가던데 말이야."

  그에게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전에 한 말을 번복할 수 있는 간교함

  "아니면 그냥 겁쟁이인 건가?"

  목숨이 상대에게 맡겨진 상태에서도 상대를 냉철하게 관찰하며 비웃을 수 있는 냉철함이 있었다.

  '이대로 죽이기엔 아까운데.'

  분명 이대로 살려두었다가는 내 앞 길에 방해가 될 것 같았지만, 이대로 죽이자니 그건 또 그거대로 아까운 느낌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자는 기계룡과 싸운 최후의 4인으로, 인류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었으니까.

  비록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쯤은 거리낌 없이 죽이는 사람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일찍이 죽여 두는 게 인류를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 아까웠다.

  "당신, 몇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들어는 보지."

  "이름이 뭡니까?"

  "이도윤."

  "첫 번째 질문부터 거짓말로 대답 하는군요, 구자운 씨."

  "……어떻게 알았지?"

  본명을 맞힌 게 꽤나 놀라웠던 듯, 그가 눈을 치떴다.

  "다음 질문입니다. 사람을 얼마나 죽였습니까?"

  "글쎄, 한 백 명?"

  이번엔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어디 이것도 거짓말인지 맞혀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구자운 씨."

  내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하면 죽는데요?"

  그가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잠시 그와 나의 눈싸움이 지속되었지만, 그는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쉰세 명."

  "……이 던전에서만?"

  "각성하고부터."

  "생각보다 얼마 안 죽였군요."

  53명을 죽인 사람과 마주하고 하는 대화치고는 어딘지 핀트가 어긋나 있었지만, 내 기준에선 별로 안 죽인 게 맞았다.

  "누굴 살인 쾌락자로 아나. 난 필요한 살인 외엔 안 해."

  구자운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음, 좋습니다. 그렇다면 풀어드리겠습니다."

  구자운이 '뭔 헛소리냐?'하는 눈 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초리에 웃음 지었다.

  '이걸 여기서 시험해 볼 줄은 몰랐는데.'

  오른손, 정확히 말하면 오른손의 소매에서 천천히 하나의 실이 뻗어나오고 있었다.

  이 실은 [아라크네의 거미실샘]의 여섯 종류의 실 중 하나로, 단 한 가닥만을 뽑을 수 있는 특별한 실이었다.

  일명 [영혼사(靈魂絲)].

  나는 그 실을 천천히 뻗어 구자운의 심장과 연결시켰다. 실은 구자운의 심장과 연결된 후, 마치 허공에 녹아들듯 천천히 사라져 버렸다.

  [구자운 씨.]

  나는 구자운의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었다.

  "……뭐냐, 이거?"

  [당신은 제……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당신은 제게 1년 간 종속되었습니다.]

  "……종속?"

  [그렇다고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제가 죽으면 당신도 죽고, 서로 어떤 거리에서든 이처럼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죠. 소울 메이트가 되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너는?]

  역시 요령이 좋은 구자운도 바로 텔레파시로 내게 물어왔다.

  [슬퍼하겠지요.]

  […….]

  [눈물도 흘려드릴지도?]

  [……필요 없다. 젠장, 정말 별의별 스킬이 다 있군.]

  된통 물린 것을 알아챈 구자운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위에 말한 것 외에도 영혼사에는 다른 기능들이 더 있지만, 그걸 말했다가는 구자운이 자살하겠다고 날될 것 같아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1 년간 제게 잘 협조해 주시면 그 후엔 풀어드리지요. 당신에게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제가 또 제 사람들은 잘 챙기거든요.]

  [……퍽이나.]

  [자, 일단 들어보세요.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첫 번째 미션은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구자운의 혈을 풀어줬다.

  잠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구자운이 잠자코 내 말을 기다렸다.

  [이 던전의 클리어입니다.]

  두 번째 조각이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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