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56
"또, 또 시작이다."
김치우가 옆에서 혀를 찼다. 그가 재차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드 누나, 우리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약한 사람들 데리고 가봤자 짐만 된다고요."
"너, 내가 입조심하랬지?"
"쳇, 내가 뭐 틀린 말했나 뭐? 혼자서 다니기도 무서워서 다른 사람옆에 빌붙으려는 사람이 뭐가 그리 탐난다고."
"약한지 안 약한지는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좋은 말할 때 닥치고 있어라."
강하나는 골치 아픈 얼굴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물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결 씨를 따라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거든요."
조금 뜬금없는 얘기였지만 대충 짐작이 갔다.
'눈치 빠르기가 여우 같군.'
내가 슬쩍 천재령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띔이 있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사전에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 하고 있는데다, 이 던전에서의 내 행동을 유심히 살펴본 그는 내가 이 던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알았으리라. 그래서 나를 따라가면 좋은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덕분에 편해지겠군.'
나는 속으로 슬쩍 웃었다.
나 혼자 다니면 더 효율이 좋겠지만, 제2스테이지에는 나 말고도 적어도 두 팀이 더 필요했다.
그 두 팀 중 하나를 이지스 클랜으로 낙점하고 있는 이상, 이들도 빠르게 꿈의 조각을 모아 제2스테이지에 진출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어느 정도 키워주는 게 좋았다.
"한서후 씨, 어떻습니까?"
내가 한서후를 보며 물었다.
그래도 일단 먼저 동행하기로 한 한서후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괜히 여러분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감수하겠습니다. 저희 측에도 골칫거리가 있는걸요."
강하나가 김치우를 째릿 흘겨보았다.
"그럼, 승낙하기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목적과도 관련된 중요한 물음이었다.
"여러분은, 꿈의 조각을 모으면 무엇을 하실 겁니까?"
꿈의 조각은 매우 좋은 레어 아이템들과 제2스테이지 입장권을 살 수 있는 소중한 재화였다.
특히 제2스테이지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는 꿈의 조각 700개 값어치의 아이템들은 지금 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들이었기 때문에, 제2스테이지 입장권 대신 아이템을 선택하는 헌터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필요 없었다. 내게는 함께 제2스테이지에서 싸워 줄 전우가 필요했다.
이들은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할까?
"던전 시대가 열리고, 지금까지 던전들을 클리어해 오며 배운 것이 하나 있죠."
강하나의 입이 열렸다.
"한 걸음을 먼저 떼면, 두 걸음을 앞서나갈 수 있다는 것을요."
'다행이군.'
"저희는 제2스테이지 입장권을 가장 우선적으로 노리고 있습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
이들 역시 제2스테이지로의 빠른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그 선택, 후회하지 않게 해주지.'
내가 강하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내 손을 맞잡았다.
* * * 던전 [베히모스의 꿈]은 전생에서 약 6개월간 클리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제1스테이지에서 무수한 사냥터들이 발견되고, 수많은 헌터가 사냥터들을 전전하며 효율 좋은 사냥터들이 추려졌다.
이곳이 바로 그 효율 좋은 사냥터 중 하나였다.
우리는 어느 오크 군락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한 동굴 앞에 있었다.
"여기입니다."
내가 동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래서 마지막 그레이 트롤을 이곳으로 던지라고 하셨군요."
천재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곳은 내가 그래이 트롤로 베히모스를 유인한 곳이었다.
베히모스가 이곳에서 날뛴 덕분에 이곳을 지키고 있을 오크는 어디론가 피신하고 없는 상태였다.
이 동굴은 나름 숨겨진 사냥터라 꿈의 조각을 노리고 같은 인간을 습격하는 놈들의 방해를 받을 염려도 적었다.
"그런데 이곳에 이런 동굴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천재령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들을 마주 보며 미소 지어 주며 아까 천재령이 내게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영업 비밀입니다."
"……네."
"치이."
일행은 굳이 계속해서 내게 캐묻지는 않았다. 대강 스킬의 힘이려니 하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캐묻는 것은 개인 정보에 해당하므로 실례 이기도 했고.
일행의 실망을 뒤로하고 나는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들어가시죠."
우리는 동굴 속으로 발을 들였다.
베히모스의 꿈속에도 효율 좋은 사냥터가 몇 군데 존재했는데, 이곳은 그중 하나였다.
몬스터의 강함에 비해 꿈의 조각을 다량으로 획득할 수 있었으며, 획득 할 수 있는 아이템들도 쏠쏠한 곳.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여왕<아라크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동굴 속 포식자들이 포악해집니다.]
'응?'
시스템 메시지였다.
"아라크네?"
아라크네라니,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이었다. 베짜기의 명수였는데 그 오만으로 아테네에 의해 거미로 변하는 저주를 받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일행은 잠시 의외의 메시지에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거미 몬스터 같은데……."
'슈리, 아라크네, 던전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이름이야?'
[아니요, 데이터베이스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름입니다.]
'누군가가 아라크네를 사냥하고 기록을 생략했구만. 음, 좀 고민되는데.'
이곳은 제법 난이도가 있는 사냥터라 일행들이 걱정되었다.
원래부터도 3개월 차 헌터들에겐 난이도가 있는 사냥터였는데, 거기에 더해 몬스터들이 강화된데다 아라크네라는 처음 듣는 몬스터까지 등장한 걸로 보이니…….
'아마 아라크네는 네임드 몬스터겠지.'
[최초의 던전]에서의 마더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몬스터.
그때 6층 수준의 마더만 되어도 이들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뭐, 괜찮겠지.'
내가 있으니까.
나는 눈앞에 보이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 속으로 들어서서 처음 만난 것은 오크들이었다.
밖의 오크 부족의 놈들인 듯했다.
"쿠루루룩!"
놈들은 기성을 지르며 몽둥이를 휘둘러 왔다.
그런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게 왠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저희가 처리해 보겠습니다."
사전에 얘기된 대로 세 명의 한국 클랜 헌터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과 함께하려면 그들의 전투력을 제대로 파악해 둬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뒤로 빠졌다.
먼저 탱커로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앞으로 나서며 스킬을 시전했다.
그의 스킬은 [돌갑옷]이었다.
그러자 그의 온몸에 갈색의 돌이 입혀지며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오오오!"
그는 양팔로 머리를 가드하며 오크들을 향해 돌진했다.
캉! 캉!
오크들이 무기를 휘둘러댔지만 그의 피부를 둘러싼 돌에 가로막혀 그의 몸에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 헌터는 돌갑옷 헌터에게 시선이 빼앗긴 오크 한 마리를 뒤에서 기습해서 처리했다.
"쿠루루룩!"
그에 정신을 차린 듯한 오크들이 반격을 해왔다.
캉캉!
두 마리는 돌갑옷 헌터가 상대했고, 다른 두 마리는 검을 든 어린 헌터 김송호 헌터가 상대했다. 그 둘은 오크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신경 쓰며 오크들을 발을 막는데만 주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대치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의 헌터가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5분여가 지난 후, 마법이 완성되었다.
"바인딩 스파이크."
동굴의 땅에서 송곳들이 솟아올라 두 마리의 오크의 발을 차례로 꿰뚫었다.
"쿠루루룩"
"울루를툭!!"
발이 꿰뚫린 오크들은 기성과 함께 제자리에 묶여 버렸다.
두 마리가 발에 묶이자 전위의 두 헌터가 상대하는 오크의 수는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버렸고, 돌갑옷 헌터와 검을 쓰는 헌터는 손쉽게 한 마리씩을 맡아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남은 오크 들은 손쉽게 처리될 차례였으나.
"잠시만요."
천재령의 제지에 잠시 그 두 마리 오크는 바닥에 못 박은 채로 살려두기로 했다.
"으음……."
천재령이 오크들 주변을 돌며 잠시 놈들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나는 흥미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재령이 과연 그 오크들의 상태를 알아차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름 : 우투투 -상태 : 감염체 -설명 : 녹색오크족의 전사 다른 한 마리의 오크 역시 '감염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오크들을 살피던 천재령이 입을 열었다.
"이 오크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조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천재령은 이 오크들의 특징을 단번에 파악해 냈다.
"여기 이 오크는 머리 뒤에, 이 오크는 팔에 작은 상처가 나 있습니다. 아마 이 오크들을 감염시킨 무언가가 이 상처를 통해 오크들을 감염시킨 걸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앞으로 만날 몬스터들의 공격에 가능한 상처를 입지 않기를 당부했다.
"그리고……."
천재령이 이번엔 한국 클랜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크들이라면 이곳에서도 2점 정도의 약하디약한 몬스터였을 겁니다. 근데 그런 것치고는 잡는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그 말에 한국 헌터 클랜의 세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스킬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스킬에 대한 연구와 전투에 대한 준비가 덜 되어 있습니다. 그 돌은 어째서 방어 부위가 아닌 전신에 두르는 것이죠? 몸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그리고……."
천재령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들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특히 그중에 10대 헌터인 김송호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천 실장님, 그만 하세요."
보다 못한 강하나가 중간에 천재령을 뜯어말렸다.
"……알겠습니다."
천재령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클랜 로드의 명령에는 순순히 따랐다.
'천재령, 머리는 좋지만 사람 대하는 건 잘못하는군.'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해 보였으나, 천재령은 지금 매우 답답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는 한국 클랜을 데리고 다니는 것부터를 탐탁치 않아 했는데, 그 심리가 이들을 다그치는 것으로 표출된 것이다.
반면 강하나는 천재령보다는 머리 쓰는 건 못하지만 사람 다루는데는 그보다 훨씬 유연한 면모를 보였다.
"괜찮아요. 여러분은 직접 전투보다는 전투 보조와 후방 경계를 맡아주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역할을 하나하나 지정해 주었는데, 큰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남은 인원의 사냥에 적절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아까도 보았지만 다시 한번 [하늘의 눈]을 활성화시켜 강하나를 바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