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55
"한서후 씨는 이 동굴을 찾아낸 것이라 믿더군요. 동굴의 상태로 보아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 보이는데도 말이죠. 그렇다면 무결 씨밖에는 동굴을 만들 사람이 없죠. 한서후 씨는 동굴의 흔적으로 보아 정신을 잃고 있으셨군요."
정확했다.
"원거리 공격을 통해 동굴을 만든 거라 생각한 건요?"
"절벽에서 근접 공격으로 만들어냈다면 절벽 옆에 어떻게든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지지대가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원거리 베기 공격이 아닌 한 이렇게 완벽한 수직으로 절벽에 구멍을 낼 수는 없습니다."
깔끔한 추리였다.
'과연.'
내가 속으로 감탄할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던진다!! 으랴압!!!"
어느새 트롤들을 다 처리한 김치우였다.
그의 고함 소리와 함께 머리 둘 달린 트롤이 하늘을 날았다.
트롤은 5미터라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하늘을 훨훨 가로질렀다.
베히모스는 어느새 한국 헌터 클랜 사람들이 아닌 강하나를 쫓고 있었다. 한국 헌터 클랜 사람들은 한서후의 인도하에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비눗방울 터뜨리며 자신과 놀아주는 강하나를 신나게 쫓아다니던 베히모스의 코앞으로, 마침내 트롤의 시체가 도달했다.
촤악- 그때 내 손에서 사출되어 날아간 플라스마 링이 시체를 반 토막 냈다.
트롤의 피가 그대로 베히모스의 코에 쏟아져 내렸다.
뀨웅 뀨응!
베히모스가 신이 나서 트롤의 피를 핥아댔다.
"긍정적인 반응이군요. 그럼 저기로!"
딱!
천재령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저 멀리 공중의 한 부분이 빨갛게 점멸했다.
"으랴얏!!!"
김치우가 그곳을 향해 또 다시 머리 둘 달린 트롤 시체를 던졌다.
뀨우응!!
베히모스가 강하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 시체 쪽으로 달려갔다. 신나게 입맛을 다시며 달리는 폼이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태도였다.
"이번엔 저기로!"
딱!
천재령이 이번엔 조금 더 멀리 보이는 산 쪽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내가 재빨리 소리쳤다.
"잠깐!"
"치우 씨, 잠깐만요!"
"그곳 말고 저쪽으로 던지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 옆으로 보이는 어느 산골 짜기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알겠습니다."
천재령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곳으로 목표지를 수정했다.
딱!
내가 가리킨 계곡 사이로 붉은 불빛이 명멸했다.
"으랴아아아앗!"
김치우의 마지막 외침이 들려왔다. 이번엔 유독 힘이 들어간 음성이었다. 머리 셋 달린 놈은 아무래도 다른 놈들보다 무거운 듯했다.
그렇게 트롤의 시체가 골짜기사이로 날아가고.
쾅쾅쾅광!
베히모스가 신나게 달려가 계곡 속으로 사라졌다.
쾅쾅! 콰광!!
산골짜기 사이로 난데없는 소란이 일었다.
* * * 일행이 동굴로 다가오는 동안 나는 천재령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베히모스가 트롤의 피 냄새를 맡고 움직일 거란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그 모습에 천재령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영업 비밀입니다."
'스킬의 힘인가?'
그의 스킬 중에 [빛나는 지식의 별]이란 스킬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스킬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지스 클랜, 듣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
던전 입장 첫날부터 소득이 괜찮다. 이지스 클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3대 클랜에 대한 정보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특히 이지스 클랜은 전생에서도 소수정예로 움직이는 클랜으로 유명 했는데, 그 때문인지 클랜원 개개인에 대한 정보가 그다지 많이 풀리지 않았다.
내가 한창 활동할 때는 그 모습이 사라진 클랜이라서 정보가 별로 없기도 했고.
천재령은 듣던 대로 똑똑했고, 강하나는 듣던 대로 날쨌다.
물 찬 제비 같은 강하나의 움직임은 베히모스에게 잡힐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여 베히모스의 관심을 잡아두는 한편, 위험 거리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김치우가 싸우는 장면은 못 봤지만, 아직 변신이 풀리지 않은 그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는 높이 3m쯤 되는 늑대인간으로 변신해 있었는데, 내 시선을 느끼고는 변신을 풀었다.
이들의 비장이 무기 중 하나가 '김치우의 변신'이라는 사실 또한 알았으니, 김치우에 관해서도 큰 비밀을 하나 알아낸 셈이었다.
'근데 왜 이런 클랜이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걸까?'
내가 이들에 대해 잘 모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들은 내가 한창 활동할 시기에 자취를 감추었다. 다를 던전 공략도중 실패했구나 했는데, 그들이 어떤 던전에 들어갔는지 조차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동굴에 다시 모두가 모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 명의 한국 클랜 헌터가 우리를 향해 연신 감사를 표했다.
"어쩌다 그렇게 쫓기게 됐어요?"
강하나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물었다.
"그게, 한서후 씨를 찾아 이쪽 방향으로 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베히모스가 쫓아오지 뭡니까?"
세 한국 클랜 헌터 중,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헌터가 말했다.
베히모스는 기본적으로 생명체를 모두 장난감 내지는 간식, 혹은 식사로 취급한다.
즉 누구든 베히모스의 가까이 가면 녀석의 관심을 끌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그놈 근처로는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한서후가 안도감 섞인 미소로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딘지 씁쓸한 느낌이 감도는 미소였다.
"이제부터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한서후가 한국 클랜원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우물쭈물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역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녀석이 한서후에게 말했다.
"저희는 그냥 서후 형 따라다닐래요."
그래도 쉽게 던전을 포기했던전의 그 한국 클랜원들보다는 나았지만, 한서후 한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태도가 눈에 보여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늘의 눈]으로 셋을 살펴보니 스킬도 별로고, 풍기는 마력량도 미약한 게 별로 전력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한서후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들의 패기 없는 대답에서 한서후도 이들의 속셈을 짐작한 듯했다.
그래도 일전의 한국 클랜 헌터들에게는 함께 이곳에서 사냥하면 실력이 나아질 거라고 열변을 토하더니, 이번에는 스스로 따라나서겠다는 이들의 말에도 별반 반응이 없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허 참, 진짜 한심하기 그지없군."
듣고 있던 김치우가 대놓고 혀를 찼다.
"한 사람만 새끼오리처럼 졸졸 쫓아다닐 거면 여긴 왜 들어왔어요? 당신도 이런 사람들 구하겠다고…… 미련하다, 진짜."
김치우가 이번엔 한서후를 조롱했다. 그리고 번쩍 고개를 들어 한서후를 노려봤다.
"그래도 제 동료들입니다. 함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어이구, 그러셨어요? 함부로 얘기 하면 어쩔 건데? 한판 뜰까?"
김치우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이 미친놈이 진짜!"
강하나가 기어이 또 다시 김치우의 뒤통수를 후렸다.
"아! 안 그래도 나쁜 머리 더 나쁘게 할 거야, 누나?"
"치우는 머리더 안 나빠질 거야.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서 더 나빠질 수가 없을걸."
대답은 강하나가 아닌 김치우의 쌍둥이 김소유의 입에서 나왔다.
"아 진짜, 야, 김소유!"
김소유가 화들짝 놀라며 강하나의 뒤에 숨었다.
이지스 클랜 쪽에서 이런 촌극이 벌어지는 동안 한서후와 한국 클랜 헌터들은 어딘지 침울한 분위기였다.
"저기, 서후 형."
10대 헌터가 입을 열었다.
"저희 사냥하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나갈게요."
"송호야."
한서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10대 헌터의 이름을 불렀다.
그 10대 헌터의 이름은 김송호였다.
-이름 : 김송호 -상태 : 각성자 -고유 스킬 : [회전베기]
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검술 사용자인 듯한데, 스킬이 검술 중에서도 일부동작인 [회전베기]뿐이다.
각성은 했으나 고유 스킬이 조금 안타까운 경우라 하겠다.
김송호가 말을 이었다.
"저희도 알아요. 저희가 형의 발목을 많이 잡고 있다는 걸. 그래도 이번에는 한 번 기회를 잡고 싶어요. 이 던전, 우리도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거 같거든요."
"……알겠다."
한서후의 입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그래도 의지를 가진 클랜원이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듯했다.
김송호를 비롯한 세 한국 클랜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서후가 이번엔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무결 씨."
"네?"
한서후가 '은인님' 대신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아닙니다."
한서후가 뭔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하려다 만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쪽에서 대신 제안했다.
"한서후 씨, 당분간 저도 함께 다녀도 되겠습니까?"
"예?"
한서후가 휘둥그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혼자 다니기엔 조금 적적해서 말이죠. 파티 사냥을 하는 게 효율도 좋을 테고요."
"아…… 아! 불감청 고소원이었습니다. 꼭 함께 다녀주십시오!"
한서후가 나와 파티를 맺고 싶어 하는 건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가 비록 실력 좋은 헌터라고는 해도, 빌런과 위험한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이곳은 동료 없이는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물론 나는 충분히 홀로 다닐 수 있었고, 어쩌면 그게 효율이 훨씬 나을 수도 있었지만, 내가 이러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생에 있던 수순 대로라면 곧 있으면 한국 헌터 클랜은 해체된다. 그럼 한국 클랜에 소속된 한서후는 자기의 의지가 어떻든 프리가 된다.
나는 그때를 노려 한서후를 은하그룹으로 영입할 생각이기 때문에 미리 밑밥을 깔아놓는 것이다.
"좋습니다.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내민 손을 한서후가 꼭 맞잡았다.
"저희도 함께해도 될까요?"
그때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강하나였다.
"이지스 클랜도 말입니까?"
한서후야 그렇다 쳐도 이들은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할 이유가 없는데.
"두 분에게 흥미가 있어서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강하나의 눈빛은 생선을 보는 고양이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