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53 '고작 3달 만에 사량발천근과 이화접목까지 표현해 냈어.'
이 두 수법은 내공 없이는, 그리고 무리(武理:무공의 이치)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는 실현하기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공이 이 세상에 등장한 건 3달 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사람은 고작 3개월 만에 그 이치들을 몸소 터득 했다는 말이고, 그것은 무공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라는 뜻이었다.
'탐난단 말이지.'
이런 인재를 내 옆에 두고 쓸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분노조절장애야 내가 강하니 괜찮고, 사람 참 착하고 성실하니 앞으로 아주 도움이 되는 동료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은근한 눈으로 한서후를 바라보았다.
한서후는 복잡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한숨을 쉬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옆에서 보고 있자니 참 이 사람도 감정 표현이 다양하구나 싶었다.
한참 뭔가를 고민하던 한서후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은인님."
"네."
한서후가 뭔가를 한참을 말할 듯 말 듯하다가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인간, 때려줄까?'
[뒤통수 한 대만 갈겨주십시오.]
'너 너무 폭력적이다?'
[……마스터도 때려줄까 고민하지 않았습니까?]
꾸우우우웅- 그때 동굴 밖 저 멀리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들으면 코끼리 울음소리와도 비슷한 듯했고, 어떻게 들으면 고래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거대한 울음소리의 진원지는, 체고만 거의 1킬로미터는 되는 거대한 생물체였다.
"저건……?"
한서후가 동굴 밖을 바라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베히모스…… 아닙니까?"
그랬다.
베히모스의 꿈속에는, 베히모스가 있었다.
우리가 현실에서 봤던 체고 1킬로 미터짜리의 개체에 한참 못 미치는 크기의 작은 베히모스.
그게 저 울음소리의 주인이었다.
"근데…… 뭐 하는 중입니까, 저거?"
한서후가 약간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베히모스는 힘차게 땅에서 날뛰며 뭔가를 밟고 있었다. 녀석이 땅에 발을 구를 때마다 꾸롱- 꾸르통-하는 지축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런 베히모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두더지 게임."
"네?"
"두더지 게임입니다."
베히모스가 발을 구르면, 그 충격의 여파로 땅 아래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내가 아까 보았던 두더지 몬스터의 수백 배 크기는 될 법 한 몬스터.
작은 베히모스는 그게 튀어나올 때 마다 힘차게 밟아대며 승리의 포효를 지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두더지 게임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작은 베히모스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저 커다란 생물도 기분이란 게 있습니까?"
"네, 한서후 씨도 알아두십시오. 이 던전을 무사히 클리어하려면 저 베히모스를 항상 잘 살펴야 합니다."
"네? 저 베히모스를요? 왜요?"
"음……."
막상대답하려니 할 말이 궁색해졌다.
미래에서 겪어봤습니다만!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말을 돌렸다.
"마침 베히모스의 기분이 좋을 때 다녀와야겠군요."
"어디 다녀오시려고요?"
"네, 잠시 좀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몸을 풀었다. 그리고 눈앞에 떠다니는 방울들을 응시했다.
저 방울들은 아기 베히모스의 기분이 좋을수록 더 많이, 그리고 크게 나타난다.
마침 베히모스의 기분이 좋아서 방울들이 튼실해 보였다.
다른 급한 일도 없는 지금이 바로 내가 하려는 일을 할 적기였다.
나는 방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펴보았다.
"음, 저기 있군."
내가 찾던 구름이 저 하늘 위로 보였다.
이곳 제1스테이지에는 위치가 변하지 않고 항상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구름이 하나 있다.
이 근처로 올 때 저 구름을 목표로 왔기 때문에 내가 있는 절벽이 바로 그 구름 아래였다.
나는 점프해서 비눗방울을 밟고, 비눗방울이 터지기 전에 다시 점프 해 더 높은 비눗방울 위에 올라섰다. 그런 방식으로 비눗방울들을 밟고 하늘 높이 떠 있는 구름을 향해 다가갔다.
전생의 한 헌터는 하늘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구름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
'왜 다른 구름들은 움직이는데 저 구름만은 움직이지 않지?'
몬스터를 잡느라 하늘을 볼 새가 없던 많은 헌터들은 구름의 위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평소 하늘을 보는 것을 즐기던 낭만적인 헌터 하나가 결국 그 구름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낭만을 좋아하는 헌터답게, 그 헌터는 그 구름 위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마침 베히모스의 기분이 좋을 때 나타나는 비눗방울이 충분히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락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그 헌터는 마침내 구름 위에 다다랐고, 구름에 발을 올린 헌터는 구름이 뜻밖에도 지지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이 아래로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헌터는 신이 나서 구름을 밟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거기에서 구름 위에 있을 리가 없던 뜻밖의 물건을 발견했다.
"후우, 후우, 도착이군."
목표로 했던 구름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덕분에 나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가 되어서야 마침내 하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구름을 밟는 느낌은, 마치 침대를 밟는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둥실둥실 구름을 밟고 나아갔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전생에서 그 낭만적인 헌터가 발견했던 물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보물 상자였다.
'던전은 모험하는 자를 좋아한다.'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하늘의 눈]으로 보물 상자를 들여다봤다.
-이름 : 뜻밖의 행운 -희귀도 : 레어 -상태 : 랜덤 박스 -설명 : 개봉 시 레어 이하의 소모성 아이템을 한 가지 획득할 수 있다. '엘리의 눈물'을 획득할 수 있다.
'응?'
나는 정보를 읽다 말고 멈칫했다. 글귀가 바뀐 것이다.
-이름 : 뜻밖의 행운 -희귀도 : 레어 -상태 : 랜덤 박스 -설명 : 개봉 시 레어 이하의 소모성 아이템을 한 가지 획득할 수 있다. '트라이어드의 꼬리'를 획득할 수 있다.
'설명' 부분의 획득 아이템이 약 2 초에 한 번씩 바뀌고 있었다!
랜덤 박스였지만 어느 순간 뭐가 나올지 보이는 랜덤 박스였다.
'흠.'
상자를 들어보려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와증에도 상자 속 내용물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어디 들고 갈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상자를 여는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알고 있는 아이템이 나왔을 때 열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상자를 주시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거다.'
나는 어떤 이름이 보이는 순간 바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작은 나뭇잎들이 듬성 듬성 달린 나뭇가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이름 : 니케의 나뭇가지 -희귀도 : 레어 -상태 : 행운이 깃든 나뭇가지 -설명 : 나뭇잎을 떼어 물고 있는 동안 행운이 작용한다. 행운이 일어나면 나뭇잎은 바스러진다.
행운.
생각하기에 따라 참 애매모호한 이야기다.
길을 가다 만 원짜리 지폐를 줍는 것은 행운이다. 그건 일시적으로 기분은 좋지만 그렇게 큰 행운이라 할 수 없다.
반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 또한 행운이다. 정말 커다란 행운이다.
두 가지 모두 행운이라는 범주 안에 둘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가 같은 행운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듯 행운이란 게 크게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별 소용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행운의 여신 니케의 이름이 달린 나뭇가지를 고른 이유가 있었다.
던전 시대의 행운과 관련된 아이템은, 최소한 로또 3등 당첨 정도의 행운은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행운 관련 아이템을 지닌 사람들이 행운 아이템 덕분에 쓸만한 아이템을 얻은 사례부터 크게는 목숨을 구한 사례도 있었다.
어차피 상자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해봐야 최대 레어의 소모성 아이템들이라 할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득템이라 할 수 있었다.
"괜찮군."
나는 나뭇가지를 주머니 속에 집어 넣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방울을 밟으며 한서후가 기다리는 동굴로 내려갔다.
* * *
"한서후 씨, 저 왔습니다."
그런데 동굴에 도착했을 땐 의외의 불청객들이 있었다.
한서후 외에 네 명의 남녀가 동굴 한편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여어, 또 보네?"
이지스 클랜의 김치우.
"시, 실례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지스 클랜의 김소유, 김치우의 쌍둥이 동생.
그리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지스 클랜 로드, 강하나였다.
그녀의 옆에는 말없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 헌터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이지스 클랜의 두뇌 천재령이었다.
"여러분이 왜 여기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김치우가 내 질문에는 대답 하지도 않고 내 블랙미슈릴 슈트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어. 그런 삐까 번쩍한 슈트를 갖고 있었으면서 왜 안 입고 있었어?"
"요!"
옆에서 강하나가 찌릿한 눈으로 김치우를 노려보았다.
"……요."
김치우가 마지못해 뒤에요 자를 붙였다.
"바이크에 두고 내렸던 것뿐입니다."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순순히 대답 해줬다.
"아항. 아무튼 미안……합니다."
강하나가 손을 들어을리자 김치우가 황급히 또 다시 뒷말을 붙였다.
"아씨, 전 저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존댓말이 안 나온단 말이에요!"
"네가 아직 덜 맞아서 그렇구나. 어디 복날개 패듯 패도 존댓말이 안 나오나 보자."
강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야, 아니야! 존댓말 나와요, 나온다고요!"
김치우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에휴, 얘가 각성한 뒤로는 성격이 이상해져서……. 죄송합니다."
강하나가 또 다시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전생에서도 이지스 클랜의 개차반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긴 했다. 안하 무인에 예의를 차릴 줄 모르는, 그러나 그 신체 능력만은 발군이었던 한 헌터.
그것 때문에 강하나가 골치깨나 썩었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이 녀석, 김치우였던 것 같다.
'그나저나 이 녀석도 각성 뒤로 성격이 이상해졌단 말이지?'
나는 괜찮다는 말을 하며 슬쩍 [하늘의 눈]을 발동시켜 김치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