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52 나는 허공을 떠다니는 커다란 비눗방울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근처의 절벽으로 다가갔다. 비눗방울들은 내가 밟을 때마다 뿅뿅 터지긴 했지만 무사히 내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절벽에 가까워졌을 때쯤 나는 손목에 차고 있던 플라스마 링 두 개를 꺼내 앞으로 날렸다.
위잉- 플라스마 커터는 마치 두부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절벽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절벽을 빠져나와 내 양손 손목에 안착했다.
나는 절벽 속으로 푹 팔꿈치까지 집어넣고 힘을 주었다.
"후욱!"
우득, 우드득.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며 절벽이 직 사각형 모양으로 딸려나왔다.
내가 절벽을 뽑아내 아래로 던져 버리자 족히 10명은 들어갈 만한 즉석 동굴이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 평평해진 절벽 바닥에 업고 있던 한서후를 눕혔다.
"됐나?"
결과적으로 나와 함께 있는 셈이 되었으니 아마 한서후는 이제 죽을 운명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후우."
한숨을 쉬며 [하늘의 눈]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생각해 보니 [하늘의 눈]이 성장해 타인의 고유 스킬을 볼 수 있게 된 후로 그의 정보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름 : 한서후 -상태 : 각성자 -고유 스킬 : [천살성]
'천살성 (天殺星)?'
이런 무지막지한 이름의 고유 스킬을 갖고 있을 줄이야.
[천살성이 뭔데요?]
슈리가 물어왔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무협소설에서 보편적으로 나오는 설정이랑, 아까의 살기,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봤을 때 일종의 버서커 (Berserker) 상태로 들어가는 스킬이지 싶다. 물론 내 추측일 뿐이야.'
버서 커 (Berserker) 란 죽을 때 까지 미친 듯이 싸우는 광전사를 일컫는 용어였다.
"으음…….."
그렇게 한서후를 살피고 있을 때 신음이 들리더니, 한서후가 눈을 떴다.
"끄응……"
한서후가 고개를 흔들다가 오른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다시 자려는 것 같았다.
"크흠, 한서후 씨."
아직도 비몽사몽인 듯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위해 내가 기척을 조금 내주었다.
한서후는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발딱 일어나더니 후다닥 뒤로 물러 났다.
"접니다, 신무결."
"아, 은인님."
한서후가 의아한 얼굴로 경계를 풀며 내게 다가왔다.
"제가 왜 여기에…… 어떻게 된 거죠?"
"한서후 씨, 당황스러우시겠지만 혹시 기억이 어디까지 있으십니까?"
"아, 저…… 클랜원들이 갑자기 던전을 나가고…… 음, 그때부터 기억이 없습니다."
"던전에서 술이라도 드신 겁니까? 필름이 끊어지시다니요."
"그게…… 음……."
한서후가 곤란한 얼굴로 뺨을 긁적 거렸다.
그는 자신의 팔다리를 살펴보기도하고, 옷가지를 보기도하며 꽤나 혼란스러워했다. 마치 자신이 왜 이렇게 멀쩡한지 의아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폭주하면서 몸을 다쳐본 경험이 많나 보군. [천살성]이란 게 원래 그런 건가?'
나는 그렇게 한서후를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군요."
내 말에 한서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지금 자신의 상태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첸 듯했다.
"은인님, 제가…… 은인님을 만났을 때 어떤 상태였던가요?"
한서후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입을 열었다.
"폭주하고 계셨습니다."
"아……."
그 말에 한서후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손으로 짚었다.
"그럼 은인님께서 또 다시 절 도와주셨군요."
"음, 폭주하는 걸 말려 드리기는 했죠."
"역시. 후우…… 은인님."
"예."
한서후는 나를 불러놓고도 한참 동안을 망설였다. 뭔가 그 자신과 관련된 중대한 비밀을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자코 그의 결정을 기다려 주었다.
한서후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나를 진지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은인님."
"예."
나도 모르게 '빨리 좀 말하세요'라고 보챌 뻔했다.
"보셨다시피 사실, 저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마침내 한서후의 입에서 그에 대한 사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간헐적 폭발 장애'라는 병이 있습니다."
"간혈적 폭발 장애?"
"예…… 흔한 말로, '분노조절장애' 라고 부르는 병이에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한서후가 무슨 병을 앓고 있다고?
"이제까지 병증이 나타난 적은 몇 번 없습니다만…… 6살 무렵이었습니다. 처음 발병했을 때, 전 제 옆에 있던 가위로 부모님을 죽일 뻔했죠."
작은 꾸지람 하나에 한서후는 눈이 뒤집어지고 옆에 있던 가위를 들어 아버지를 찌르려 했다. 다행히 깜짝 놀란 아버지에 의해 그의 행동은 불발에 그쳤지만, 그때 받은 부모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착하고 말 잘 듣던 아이였으니.
정신이 되돌아온 한서후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후 한서후의 부모님들은 병원에서 한서후의 병명이 간헐성 폭발 장애로 진단받은 후, 갖은 방면으로 한서후를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한번 폭발한 한서후의 분노조절장애는 날이 갈수록 빈도가 높아졌다.
"그래서 저는 시골 한적한 곳에 부모님과 함께 내려가 생활하게 됐죠. 그런데……."
자신을 보고 짖는 시골 개에게 그만 또 다시 이성을 잃고 만 것이다.
"전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제가 그 개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근데 그때 다행히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한서후는 때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던 한 노인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눈에 뵈는 게 없던 한서후는 몽둥이를 든 채로 그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개처럼 두드려 맞았죠."
놀랍게도 노인은 15살이란 나이답지 않게 뛰어난 체격과 탁월한 운동 신경을 갖고 있던 한서후를 단지 맨 몸으로 제압하고 오히려 몽둥이를 빼앗아 쥐어됐다고 한다.
하지만 한서후는 온몸에 쏟아지는 몽둥이찜질 속에서도 계속해서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흔히들 분노조절장애가 '자기보다 더 센 상대 앞에선 잘 조절된다'고하죠? 그렇지 않아요. 센 사람 앞에서만 잘 조절되면 그건 그냥 단순히 다혈질 양아치일 뿐이에요.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다면 상대가 나보다 세든 지위가 높든 그딴 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계속되는 노인의 몽둥이 찜질 속에서, 한서후는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다.
"제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물은 그 분은 저를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그분 밑에서 무술을 배우며 지냈어요."
그의 밑에서 무술을 배우며 심신을 단련하자, 거짓말같이 분노조절장애증상이 사그라들어갔다.
"스승님은 제게 무술은 마음을 갈고닦는 수단일 뿐이라며, 남을 살상 할 수 있는 무술은 절대 가르쳐 주지 않으셨죠."
'그래서였구나, 아까의 그 방어적인 움직임.'
유독 방어에 있어서만 뛰어난 한서후의 움직임이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완전히 병이 나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증상이 사라졌어요. 마침내 스승님께 하산을 명 받았을 때는 어찌나 기쁘던지."
그날로 한서후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스승 밑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세계검도선수권대회를 제패하기도 했고.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 스승님이란 분은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그런 방식으로 한서후 씨를 치료하신 건 가요?"
"웃긴 얘기지만, 저는 스승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직 스승님의 성함도 몰라요. 무슨 일을 하셨는지, 어디서 오셨는지 같은 것들, 여줘봤지만 날아오는 건 몽둥이밖에 없더군요."
그때가 생각나는지 한서후가 하하 웃었다.
"스승님은 단지 지리산 심산유곡에서 저와 둘이 생활하며 제게 삶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을 갈고닦는 법을 알려주셨을 뿐이죠."
"기인이시군요."
"예, 기인이셨죠. 그런데…… 어느 날 병이 다시 발병하고 말았습니다."
한서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정신이 든 그 날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골목에서 우연히 납치되는 한 사람을 목격하게 된 게 그 계기였다. 한 서후는 그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고, 그때부터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한 인신매매 조직을 없애버렸더라구요."
나는 일반인을 해친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이 남자에게 그런 말은 그리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
대신 나는 다른 부분을 물었다.
"그거…… 각성하고 나서 일어난 일 아닙니까?"
그러자 한서후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 [천살성]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나 보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킬이란 것은 각자의 특기와 특성에 맞춰 발현된다.
회계사는 [속기]라는 능력을, 양궁 선수는 [속사]라는 능력을 얻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서후의 특기는 뭐였을까?
자타공인 세계 제일의 검도 선수였던 그의 특기는 당연하게도 '검술' 이었을 것이다.
그 말인즉슨 [검술]이 스킬로 발현 되었어야 하는데 왜 [천살성]이라는 스킬이 발현된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검술 말고 또 다른 그의 기질이, 그의 스킬 발현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의 스킬 발현에 영향을 준 또 다른 기질은 바로 그의 분노조절 장애.
즉 그의 검술 실력과 분노조절장애가 합쳐져 [천살성]이라는 스킬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나는 한서후에게 질문했다.
"서후 씨, 혹시 각성하고 나서 검술을 배우는 속도도 같이 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서후는 이번에도 놀란 표정으로 내게 반문해 왔다.
역시 [천살성]은 한서후의 검술 실력에도 영향을 주는 스킬이었다.
"흐음, 스킬이 버서커 종류이신 듯 하군요."
"버서커요?"
"예, 흔하진 않지만 스킬북으로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사용자를 광전사로 만드는 대신 특별한 능력을 주는 종류의 스킬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제가……."
"예, 그런데 한서후 씨의 [천살성] 은 그 특별한 능력이 무술에 대한 재능인 것 같습니다. 상당히 특이한 종류의 버서커 스킬이죠."
'이대로 살기는 짙어지지 않고 무에 대한 재능만 늘어나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편리한 스킬 같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한서후가 이 [천살성]이라는 스킬을 완벽히 컨트롤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에는 10강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강자가 탄생할 거라는 것.
그만큼 한서후가 내게 보여준 무공의 활용 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