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49
"김치우 너, 내가 입 함부로 놀리지 말랬지?"
얼굴이 작고 눈이 큰 그녀는 그 가녀린 팔다리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파워로 김치우라 불린 꼬마 아이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쾅!!
바닥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먼지가 흩날렸다.
"어, 언니! 그만 하세요……."
아까부터 김치우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던 유순한 인상의 여자아이가 강하나를 말렸다.
"소유야, 내가 벌써 말로 몇 번이나 입조심하라고 했는 줄 알아? 이 녀석 때문에 전에 온누리 클랜하고도 시비가 붙었었다고!! 그 때문에 내가 골치 썩은 걸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모자라!!"
"그, 그래도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면……."
"이 정도로는 이 녀석 머리에 기스도 안 나는 거 알면서 괜한 걱정은."
과연 강하나의 말대로 김치우라 불린 아이가 바닥에서 머리를 빼내며 툭툭 털고 일어났다.
"누, 누나! 아무리 그래도 남들 앞에서 너무하잖아요!"
"너무? 네가 아직 너무한 게 뭔지 제대로 맛을 못 봤구나?"
강하나가 팔을 걷어붙이는 걸 보며 김치우가 쌍둥이인 김소유의 뒤에 가서 숨었다.
김소유가 난감한 웃음을 짓는 가운데 강하나는 결국 한숨을 쉬더니 한서후에게 다가와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쁜 녀석은 아닌데 워낙 생각이 없는 녀석이라서."
그 한 편의 촌극을 황당한 얼굴로 감상 중이던 한서후가 고개를 저었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이분……."
그렇게 나한테 사과하라 하려는 한서후를 잡으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들 눈에 띄기 싫어하는 내 성격을 아는 한서후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강하나의 눈길은 이미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한서후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강하나가 모호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돌아서 자기 클랜원들 사이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한 사람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화해 보이는 인상의, 긴 머리를 뒤에서 묶은 청년이었다.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눈 그녀는 호오~? 하는 흥미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흐음, 슈리, 저쪽이 나를 알고 있는 거 같지?'
[그러게요. 아무래도 저쪽도 마스터를 주시하던 몇 군데 중 하나인거 같습니다.]
기술에 목말라하는 기업들 외에도 정보력 빠른 몇몇 클랜은 은하그룹에 꽤 뛰어난 헌터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나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이지스 클랜의 두뇌인가?'
나는 그의 정보를 읽어봤다.
-이름 : 천재령 -상태 : 천재, 각성자 -고유 스킬 : [고속학습], [다중사고], [고속연산], [빛나는 지식의 별]
보통 헌터는 1개, 운이 좋아야 2개 정도의 고유 스킬을 갖게 마련인데 나보다도 많은 4개의 고유 스킬이라니.
'명불허전이군.'
과연 전생에서도 경이로운 마법 실력과 뛰어난 분석력으로 전황을 좌우했다던 천재다웠다.
'다른 이지스 클랜원들의 정보도 읽어볼까?'
그런 생각과 함께 다시 [하늘의 눈]을 활성화시키려 할 때였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분주하게 움직이던 한 헌터가 입을 열었다.
"저 커다란 몬스터의 이름은 '베히모스'입니다. 지금 파견 나간 정찰대가 있습니다만, 베히모스의 근처에 간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사태 파악이 될 때까지 위험하니 베히모스 가까이 가는 것은 삼가 해 주십시오!"
웅성웅성.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렸다.
헌터들은 30분에 걸쳐서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나는 모여드는 헌터들의 면면을 [하늘의 눈]으로 관찰했다.
그사이 각 단체의 수장 또는 수장 대리들이 모여 회의를 지속했다.
그사이 연락이 끊겼던 한 정찰대원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베히모스 속에 던전이 있습니다.
"뭐? 던전이라고?"
보고를 들은 헌터가 놀람에 가득 차 말했다.
몬스터 내부에 던전이 존재한 사례는 이제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베히모스의 신체 어느 곳이든 손을 대면 [베히모스의 꿈]이란 던전속으로 진입합니다.
베히모스는 사실 몬스터이면서도 던전인 특이한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단어인 '재앙형 던전'에 속하는 던전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기계룡의 둥지]처럼 한 번 실패하자마자 재앙이 발동되는 무지막지한 던전은 아니었고, 다만 일정 기간 동안 클리어하지 못하면 베히모스가 깨어나게 되는 던전이었다.
물론 '재앙형 던전'이란 이름이 붙은 만큼, 깨어나면 '아, 깨어났구나'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지난 생에서는 이놈 때문에 몇만 명이 죽었더라.'
전생에서는 저 던전의 클리어가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결국 베히모스가 깨어났었다. 헌터들의 안일한 생각이 결국 끔찍한 인명 피해를 초래한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놈의 몸속에 있는 던전은 초반에 클리어하지 않으면 답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부라부랴 달려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초반에 모인 인원으로 베히모스를 잠재워야 해.'
안 그러면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몰려들어서 더욱더 던전의 클리어가 힘들어진다.
곧 정찰대원들이 하나둘 던전에서 나와 던전의 시작정보, 대략적인 특성, 생태 등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정보는 모든 헌터에게 공개되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헌터 협회에서 나서서 정찰대를 파견한 클랜에게 부탁했다.
클랜들은 다소 편치 않은 심경이었지만, 협회로부터 응분의 대가를 받기로 하고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어차피 곧 밝혀질 초기 정보니만큼 그리 인색하지 않게 군 것이다.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
정보를 듣고 이렇게 말하는 헌터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려를 표하는 헌터들도 있었다.
"인간끼리 상잔하게 만든 던전이야. 너무 위험해."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다수의 목소리에 의해 묻혀 버렸다.
대다수는 던전에 들어가고 싶어 안 달하는 자들이었기에, 헌터들은 곧 베히모스의 다리 아래쪽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고개를 쳐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베히모스의 아래, 약 200여 명의 헌터가 모였다. 산보다 큰 베히모스의 발아래 모인 헌터들은, 마치 개미 떼와 같았다.
놈이 슬쩍만 움직여도 밟혀 터질 것만 같은 개미.
헌터들은 베히모스의 지척에 멈춰 서서 슬쩍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발을 떼어 마침내 베히모스의 발에 손을 대었다.
그는 빛에 휘감기며 사라졌다. 그를 시작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베히모스의 발에 손을 대고, 던전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하나둘, 200에 달하는 헌터가 빠르게 던전속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이렇듯 다들 던전 입장을 서두르는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은 [최초의 던전] 이후로 등장한 기회야.
항상 던전은 도전하는 자에게 그에 걸맞은 대가를 주었다.
던전에서 '남들보다 일찍'이란 것은 그만큼 많은 위험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만큼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다.
후발 주자는 그만큼 많은 정보를 얻고 시작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선발 주자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기회를 얻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선발대에게 들은 바로도 이곳은 충분히 기회의 땅이라 불릴 만한 곳이었다.
반면에 좀 더 신중한 헌터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던전을 빠르게 클리어해야 한다.
이 베히모스란 미지의 존재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
언제 깨어날지, 깨어나면 어떤 파괴력을 보일지.
그러나 한 가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던전의 클리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 대한 베히모스의 위협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 란 것. 그리고 클리어되지 않는다면,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거라는 것.
던전들이란 것들이 다 그랬다. 클리어되면 저절로 사라지고, 반대로 클리어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위험한 것들을 토해내고.
그래서 헌터들은 예상했다.
이 던전이 빨리 클리어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압 감을 주는 이 괴물이 움직일 수 있음을.
이 괴물이 날뛴다면 한국에는 엄청난 재앙이 도래할 것이기에 헌터들은 가능한 한 빠르게 던전 클리어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실패한다면 후발대는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으니, 전체로 봤을 때도 손해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던전은 탈출이 가능한 던전이었다.
즉 위험해지면 탈출이 가능한 던전.
그것이 헌터들이 안심하고 던전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던전 '베히모스의 꿈'에 입장하셨습니다.]
[제1스테이지 '꿈의 열은 곳']
[입장으로부터 7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퇴장됩니다.]
[몬스터를 사냥하면 꿈의 조각 1~50개를, 인간을 사냥하면 꿈의 조각 50개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조각의 50%를 획득합니다.]
[주머니 속에 카탈로그가 생성됩니다. 카탈로그의 아이템들은 일정 개 수의 꿈의 조각을 사용하면 구매할 수 있습니다.]
[습득한 모든 아이템은 던전 퇴장 시 소유권이 인정됩니다.]
[꿈의 조각을 모아 제2스테이지로 진입하십시오.]
나는 던전에 입장해 바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작은 산의 꼭대기였다. 그리고 이 산의 주변으로 비슷한 다른 산들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
저 멀리, 압도적으로 거대한 화산이 보였다.
저곳은 이 거대한 섬의 중앙이었다.
산들 사이로 빽빽한 나무가 펼쳐진 밀림 지대가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허공에는 지름이 사람키보다 큰 비눗방울 같은 것들이 떠 다니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입장과 동시에 모두 다른 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클랜끼리는 서로 연락 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테고, 이곳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아마 하루 정도면 충분히 한자리에 모일 터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카탈로그를 꺼내 보았다.
'역시 바뀐 것은 없군.'
내 전생의 기억 그대로였다.
각종 레어 아이템들의 목록과 그것에 필요한 [꿈의 조각]의 개수가 적혀 있는 카탈로그.
카탈로그 속에는 다채로운 아이템 들이 그 목록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쯤 카탈로그를 살펴보는 다른 헌터들은 환희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아래쪽으로 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눈이 돌아갈 만큼 레어한 아이템들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 습득한 모든 것이 소유권으로 인정된다니!
아이템 이름 옆에는 재고 수량이 적혀 있었다.
가장 희귀한 레어 아이템의 경우 대부분 [1/1]에서 [3/3].
즉 한 개에서 세 개까지만 판매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먼저 얻는 사람이 임자!
그것이 가능한 빨리 포인트를 모아야 하는 이유였다.
카탈로그에는 아이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1스테이지 탈출권]
[49, 996/50, 000] - 꿈의 조각 3개 선발대 4명 정도가 이미 구매한 흔적이 있었다.
꿈의 조각 3개.
실력이 그럭저럭 괜찮은 헌터의 경우 혼자 1시간이면 충분히 모을 수 있는 양.
나는 카탈로그의 목록을 계속 훑어 내려갔다.
[제2스테이지 입장권]
[1, 000/1, 000]- 꿈의 조각 500개 마침내 내 목표물이 나타났다.
꿈의 조각 500개.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다. 꿈의 조각 500개라면 꽤 유용한 레어 아이템 가격과 비슷했는데, 자는 시간 빼고 꼬박 7일 내내 몬스터 사냥에 집중해야 얻을까 말까 한 양이다.
즉 던전은 아이템 또는 제2스테이지 입장권 중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물론, 몬스터만 사냥한다는 가정하에.
나는 아이템 설명을 읽어보았다.
[제2스테이지 입장권]
-제2스테이지 '꿈의 깊은 곳'으로 입장할 수 있는 열쇠.
입장하는 순간 3일의 추가 시간이 주어진다.
"으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처음에는 이것을 본 많은 헌터가 제2스테이지에 도전하게 된다.
제1스테이지의 보상이 이 정도로 좋으니 제2스테이지는 얼마나 많은것을 줄까 하는 상상에 빠져서.
하지만 그런 꿈의 나래를 펴며 제2스테이지에 입장한 사람들은 곧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제2스테이지는 제1스테이지에 비하면 지옥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극한 환경과 끊임없이 몰아치는 몬스터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존재하는 '그 놈'.
결국 사람들은 최대한 제1스테이지에 머물며 많은 꿈의 조각을 모아 아이템을 얻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몬스터 사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몬스터를 사냥하면 꿈의 조각 1~50개를, 인간을 사냥하면 꿈의 조각 50개를 획득합니다.]
인간을 사냥하면 꿈의 조각을 준다. 그것도 몬스터에 비해 아주 많이.
이 개 같은 조항 때문에 희생도 참 많이 났었다.
즉 인간끼리의 사냥이 권장되는 던전.
아이템 제한이 전혀 없는 만큼, 강력한 빌런들 또한 꼭 한 번씩 들어 와서 사람들을 사냥해 꿈의 조각을 얻어가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 곳은 혼자 다니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위험했다.
나는 은하그룹에서 새로 지급해 준 스마트워치에서 3D 매핑 엡을 켰다.
엡이 주변을 스캔하더니 시계 위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정확히 주변 지형이 축소되어 보기 편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빨간 점으로 내 위치가 표시되었다.
내가 이동하면 할수록 스마트워치의 지형 정보가 자동으로 저장될 것이다. 거기다가 이 스마트워치의 인공지능이, 내 경우에는 그보다 훨씬 뛰어난 슈리가 내가 경험하는 몬스터와 식생의 분포 등을 알아서 입력 해 줄 테니, 나는 걸어다니는 것만으로 이곳의 생태 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자, 그럼 가보자.'
나는 저 멀리지도 바깥의 푸른 점, 즉 한서후가 있는 위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