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41
"……."
가슴 아픈 성녀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모든 정황이 정리되었다.
천마는 불치병에 걸린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와 함께 차원 이동을 했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목숨마저 바쳐 그녀를 살려 내었다.
성녀는 그 과정에서 기억을 잃었다가…… 방금 다시 되찾았다.
"결국 이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성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마에게 다가갔다.
"바보 같은 사람."
그는 천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천마의 얼굴을 바라 보던 그녀가 손을 내려, 그가 임종의 순간까지 들고 있던 꽃을 들어 올렸다.
"화령초의 꽃이에요……. 함께 화령초 따러 참 많이 다녔는데."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했을 말을 해 주었다.
"고마워요."
성녀의 목소리가 기어코 떨려나왔다.
"그리고, 사랑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마의 몸이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파스스 부서져 가루가 된 천마의 앞에서, 성녀는 바닥을 짚은 채 오열했다.
* * * 성녀는 자신의 목걸이를 목에서 풀었다.
목걸이에는 작은 바닷빛 돌이 달려 있었다. 바닷빛 돌은 마치 물방울처럼 생겼는데, 물방울의 뾰족한 부분이 갈고리처럼 살짝 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이가 내게 준 목걸이에요. 이것 덕분에 이제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네요."
그녀는 그것을 내게 건넸다.
"제 마음 같아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그녀는 '이것밖에'라고 표현했지만, 무려 천마가 그녀의 목숨을 붙들어 놓기 위해 그녀에게 선물한 기물(奇物)이다. 여기에 담긴 그녀의 마음이 결코 가벼울리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팅팅 부은 얼굴로 빙긋 웃어 보였다.
"실은 제 치유 능력도 이 목걸이의 힘이에요. 아팠을 때는 치유 능력 같은 건 못 썼는데…… 저를 살리려고 소모되던 힘을, 제가 치유되면서 밖으로 내뿜을 수 있게된 것 같아요. 처음으로 남한테 말해주네요. 부디 유용하게 쓰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목걸이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아까 경험했던 따스하고 청량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
나는 기어이 묻고 말았다. 사랑하는 임을 잃고 홀로 남은 그녀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성녀는 물끄러미, 우리가 밤새 만든 봉분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죽으면, 저이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되는 거겠죠?"
"……."
성녀의 마음에 담긴 상심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녀가 돌연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 쳤다.
"살 거예요! 살아서 맛있는 것도 먹고, 아름다운 풍경도 보고, 또…… 행복해야죠. 그게 저이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인걸요."
그녀가 봉분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잘 가요."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축하합니다.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성녀로부터 받은 '천옥보주(天玉寶珠)'가 던전 보상으로 인정됨니다.]
['천옥보주(天玉寶珠)'를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초마권법(初魔學法)'이 삭제 됩니다.]
[스킬 '디바이스 컨트롤'이 활성화 됩니다.]
* * * 눈을 감았다 뜨니 던전 밖이었다.
아침 이슬이 나뭇잎에 걸려 있는 새벽녘이었다.
던전의 입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퀘스트 형식의 던전이 끝난 후에는 항상 묘한 여운이 남는다. 어떤 때는 후련하기만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후련하면서도 찜찜하기도 하고.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모두 본 기분이 랄까.
드라마로 치면 이 던전은 새드 엔딩일까, 해피 엔딩일까?
나는 고개를 저어 남은 감정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성녀에게 받은 [천옥보주]를 [하늘의 눈]으로 확인해 보았다.
-이름 : 천옥보주(天玉寶珠) -희귀도 : 레어 -상태 : 일월신교의 삼대지보(三大至寶) '일월신교의 삼대지보?'
일월신교의 세 가지 지고한 보물 중 하나라는 뜻인데, 이것만 봐서는 이게 정확히 무슨 아이템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엄청난 치유 효과가 있다는 것은 대충 경험했던 바였고, 나머지 기능이 있다면 차차 알아가면 될 터였다. 일단은 희귀도가 레어라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나는 천옥보주를 품속으로 갈무리 했다.
[마스터, 그런데 전에는 스킬을 B, A+ 이런 식으로 평가하셨지 않습니까? 왜 [천옥보주]는 B, A, 이런 게 아니라 '레어'로 나타나는 건가요?]
'아, 그건 말이지.'
나는 슈리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커먼, 언커먼, 레어, 유니크 등으로 평가되는 스킬의 '희귀도'는 던전 시스템이 정해주는 등급이다.
즉 던전 시스템을 확인하는 [하늘의 눈]으로 확인하면 언커먼, 레어, 유니크 등으로 표기된다는 뜻이다.
반면 C, B, A, S 등으로 평가되는 스킬의 '활용도'는 헌터들이 자체적으로 정한 등급이다.
시스템이 알려주는 '희귀도'만으로는 그 스킬의 정확한 가치를 판단할 수 없어서 헌터들이 자체적으로 평가한 게 바로 '활용도'다. 이것은 [하늘의 눈]으로 봐도 표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만근추(萬斤經)라는 무공은 던전 시스템상 유니크로 평가 받는다. 아마 '사용자를 무거워지게 한다'는 측면 때문에 유니크라는 등급을 받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이리라.
그러나 헌터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유용한지를 지표로 하는 스킬 활용도에 있어서는 B+에 불과하다. 실제 사냥에서는 써먹는데 제약이 많이 따르기 때문이다.
[아하. 그럼 [디바이스 컨트롤]은 활용도가 무척 높기 때문에 A+이군요.]
'그래, [아르고스의 눈]에서 제공한 지표를 참고해서 내 자체적으로 평가한 등급이긴 하지만. 참고로 [디바이스 컨트롤]은 굳이 희귀도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어.'
[왜요?]
'그거 확인받다가는 내 스킬 정보며 약점, 쓰리 사이즈까지 탈탈 털리는데, 그러면서도 알아보고 싶겠냐.'
물론 정보단체 [아르고스의 눈]에서 절대비밀을 보장한다고는 하지만 내 정보를 타인에게 넘긴다는 것 자체가 별로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금세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천옥보주]보다 더 중요한 걸 확인할 때가 되었다.
나는 거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천히 정신을 집중한 다음, 후읍 숨을 들이마시며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던전 안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기(氣)가 내 몸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장삼의 12밖에 되지 않던 마력 스텟에 비해 내 마력 스텟은 42였기 때문이다.
장삼과 비교하면, 내 몸은 그 자체로 마력 덩어리라 할 수 있었다.
내 [유가선공]은 게걸스럽게 온몸의 마력을 먹어치워 자신의 색깔로 물들인 다음, 단전으로 마력을 갈무리해 나갔다.
나는 해가 떠오르고 지고, 다시 떠오를 때까지 제자리에 앉아 운공을 이어나갔다.
* * * 나는 은하그룹에서 보내준 차량을 타고 은하그룹으로 가는 중이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지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없던 노숙자들을 거리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몬스터가 많아진 시골에서 그나마 치안이 나은 서울로 피난을 온 것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사회는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태블릿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국 NASA, 던전 탐지기 개발 착수]
[영국 군사기업 크론, 엑소 스켈레톤 슈트 개발 성공]
[인도, 우주여행선 개발 中]
[미국, 셸터 개설 논란]
[텔레포트 단서 발견]
[세계 각국 도시에 인구 밀집 현상, 도시방어권 건설 중]
[성당기사단 나이트 제이니, 최초 3서클 돌입]
[북두그룹, 이지스 클랜 지원 중단. 북두그룹 산하 북두클랜 창설]
다양한 헤드라인 뉴스들을 보며 은하그룹 건물이 저 멀리 보이는 곳에 다다를 무렵.
"응? 무슨 일이지?"
은하그룹 본사 앞에 일단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슈리야, 저 사람들 대체 뭘까.'
[모르겠습니다만 꼭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이군요.]
'그러게.'
딴에는 그냥 여유를 즐기는 일반인 인 것처럼 보였지만, 내 눈에는 은하그룹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 가운데는 각성자들도 더러 끼어 있었다.
'아항.'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은하그룹으로 향하면서 [유가 선공]으로 이목구비와 체격에 변화를 주었다.
뚜둑- 뚜둑.
근육과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작게 난 후, 나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30대의 샐러리맨.
그게 지금 내 모습이었다.
나는 샐러리맨의 모습을 한 채로 은하그룹으로 걸어 들어갔다.
띠딕- 정문을 지나 ID카드를 대고 들어서자마자 웬 꼬맹이가 팔을 벌리며 나를 반겼다.
"여어, 우리 대주주~"
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녀석이 바로 은하그룹의 후계자 은하수. 피터 팬 병이라고도 불리는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성장이 멈춘 30대 아저씨였다.
"호오,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보네?"
뚜둑뚜둑.
내가 변신(?)을 풀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우리 대주주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시든 저희는 다~ 알 수가 있어요."
은하수가 그 정도는 일도 아니라며 씨익 웃었다.
이 녀석이 나를 '대주주'라 부르는 이유는, 내가 얼마 전에 은하그룹의 대주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요 두 달간 나는 현대 장르의 던전을 주로 클리어하며 미래기술이 집약된 첨단 아이템들을 은하그룹에 팔아왔는데, 계약 내용대로 일정 지 분을 주식으로 받은 덕에 대주주로 등극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보유한 지분은 회사 경영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룹 후계자인 은하수가 저렇게 유난을 떠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