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38
"그럼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한서후가 등을 돌리며 웃어 보였다.
저 앞에서부터는 마교와 정파의 대치 구역이었다.
하지만 밤이라 전투는 소강상태였고, 멀찍이서 상대측을 감시하는 인원만 배치된 상태였다.
한서후는 약속대로 우리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의 도움을 준것이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에 대한 보답은 언젠가 꼭 하겠습니다."
한서후도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빚을 갚은 것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그럼 이만."
한서후의 사라지는 등을 보며 생각 했다.
한서후가 무엇 때문에 죽었더라?
[얼마 안 있어 등장할 재앙형 던전인 '베히모스의 꿈'에서 사망합니다.]
슈리가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내용을 검색한 모양인지 내게 알려왔다.
'맞아, 조금 있으면 그놈이 나오는 구나.'
한반도를 초토화시킬 그놈. 그놈에 의해 참 많은 각성자가 죽어나갔다.
'한서후에게 진 빚도 있고, 어떻게 든 피해를 최소화할 대책을 강구해야겠어.'
물론 한서후는 반드시 살릴 생각이었다.
강하고 헌신적인 각성자들을 최대한 살려놔야 인류가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인류가 거의 멸망 상태에 이르렸던 [기계룡의 둥지]조차도 이 게임의 끝이 아니었다. 기계룡이 등장한 때가 이 게임의 초반인지 중반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강한 몬스터가 더 많이 나올수록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은 최대한 많이 살려 가야 했다.
'물론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은 최대한 빨리 죽여야 되고.'
그런 놈들 몇몇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단은 이 일부터.'
나는 성녀와 함께 저 멀리 보이는 교주전을 향해 발을 내디녔다.
* * *
"서, 성녀님!"
한 깐깐해 보이는 노인네가 인상과는 다르게 혈레벌떡 뛰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호법장로님."
성녀가 헐레벌떡 다가온 공손혁 장로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한 듯도 하고, 고마운 듯도 한 미소.
"다행입니다. 무사하셨군요."
"장로님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이렇게 된 이상 교주님 옆이 가장 안전할 겁니다. 가시지요. 교주님도 반가워하실 겁니다."
"그래요."
성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손혁 장로는 성녀를 교주전으로 이끌었다.
"장삼, 자네도 수고했네. 임무는 못 마쳤지만 자네의 노고는 잊지 않겠네. 물러가 있게."
공손혁 장로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차가운 어조였다. 아무래도 마음대로 성녀님을 데리고 떠난 것에 대해 그새 앙심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눈빛이 '당장 저놈의 주리를 틀어라!'해도 이상하지 않은 눈빛입니다.]
슈리의 말대로 공손혁 장로는 내 독단에 의해 성녀를 놓쳐 버린 게 짜증 났는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성녀만 교주에게 데려다주고 나를 제거할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녀의 말에 그의 계획(?) 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아, 장로님. 그가 고생이 많았어요. 교주님께도 인사드리고 싶은데 따라오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성녀의 부탁에 공손혁 장로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돌아서는 공손혁 장로를 따르며 싱긋 웃었다.
* * *
"장로님, 지금 교의 상태는 어떤가요?"
"……."
"말해주세요."
"……실은 최악입니다. 천마멸살대만 무너진다면 바로 정파 놈들은 바로 교주전까지 당도하겠지요. 황공 합니다만 오늘 밤이 교주님을 뵙는 마지막 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수고했어요, 장로님."
"예? 아직 교주전까지는……."
장로가 의아한 표정을 짓다 말고 돌연 온몸을 굳혔다.
"큭, 크윽!!"
그는 몸을 빳빳하게 굳힌 채 모로 쓰러졌다.
"교주 명령에 따라 성녀님 감시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렇게 굳어 쓰러진 공손혁 장로를 내려다보았다.
성녀는 이곳으로 오며 한 가지 사실을 내게 털어놓았다.
성녀에게 있어서 가장 교내 생활이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천마의 뒤를 이은 현재의 천마신교 교주였다. 그는 다른 교도들 앞에서는 성녀를 극진히 대하는 척하며, 그녀와 단둘이 만날 때마다 그녀를 협박하고 압박했다.
그는 촉망받는 천마신교의 후기지수였다. 실제로 천마가 다음 후계자로 찍었을 정도로 무(武)에 대한 재능이 넘쳐나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천마의 무공을 물려받지 못했다. 왠지는 모르나 천마는 그에게 자신의 진신절기를 전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천마가 사라졌다. 성녀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마가 자신에게 부탁한 말을 그는 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성녀를 공손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의 무공에 대한 열망은 결국 성녀 앞에서 그가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녀가 사라진 천마의 무공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때문에 그는 후계자인 자신에게는 무공을 넘겨주지 않은 천마와 그가 무공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한 성녀에게 추하고 비틀어진 원망의 감정을 뿜어내며 이제까지 성녀를 괴롭혀 왔다.
교주야말로 성녀가 교내에서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게 했던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 말을 성녀에게 전해 듣고 생각 난 것은 공손혁 장로였다. 나는 공손혁이 뻣속까지 교주의 사람이라는 것을 [하늘의 눈]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특징에 적혀 있는 것은 우습게도 '교주를 향한 무한한 충성심'이었다.
성녀 또한 공손혁 장로와 호위무사들이 교주의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성녀가 그들에게 보였던 차가운 태도는 그 때문이었다.
또한 공손혁 장로는 성녀를 보호하는 척하며 실은 교주의 명에 따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이 모든 것을 전해들은 나는 교주가 꾸민 일의 전말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눈앞에 문이 보였다.
나와 성녀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의외로군.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건 무림맹주일 줄 알았는데."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손혁으로부터 우리가 왔다는 전언을 듣지는 못한 듯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천마의 진전을 넘기지 않겠다는 건가? 후후."
"천마의 진전 같은 건 처음부터 저 한테 없었어요."
"그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옆에 있는 그자, 닷새 전에 그대와 함께 떠날 때만 해도 무공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닌가?"
닷새 전에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교주 또한 보고 있었나 보다.
"……이건 이자 스스로가 얻어낸 과실이에요."
"그렇겠지. 그대가 기회를 주고, 저 자는 기회를 잡았겠지. 아닌가!!!"
여유롭던 교주로부터 갑자기 사자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물론 기회는 나 스스로가 만들었지만 그런 말을 해봤자 저자의 귀에 들릴 리가 없다.
그런 말을 할 생각도 없고.
"내가 그토록 기회를 달라고 부탁 하고 애걸했건만!! 저딴 듣도 보도 못한 놈한테 천마의 진전을 이어줬나?!!"
그가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교가 위험에 빠지니 천마의 무공을 찾으러 갔군. 공손혁 그 늙은이만 제대로 너를 감시했어도 그 무공은 내 것이 되었을 텐데. 일처리 하나 똑바로 못하는 멍청한 늙은이."
새삼 저런 놈에게 무한한 충성을 맹세하고 죽어간 공손혁 장로가 불쌍해진다.
"……역시 장삼의 말대로, 교의 위험은 당신이 초래한 건가요?"
"오호, 네놈이 그것까지 눈치챘단말이냐?"
교주의 눈이 나에게 향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내가 알아챈 교주의 계획은 간단하지만 잔인한 것이었다.
교주의 계획은 성녀가 천마의 무공을 필요로하게 하는 것.
그렇다면 교주는 성녀가 천마의 무공을 언제 필요로 할 거라 생각한 걸까? 바로 천마가 세운 천마신교가 위험에 빠지는 순간이다.
그런 생각만으로 교주는 일부러 정파인들을 끌어들여 천마신교에 위험을 초래했다. 단지 천마의 무공을 얻을 생각으로 자신을 따르는 수만 명의 교도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래, 눈치챘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어? 네놈, 지금 본좌에게 반말로 지껄인 것이냐?"
"곧 죽일 사람한테 말투까지 가려야 해? 빡빡하긴."
"고작해야 며칠간 익힌 무공으로 이 나를 상대하겠다는 태도구나? 하하하하!"
교주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돌연 웃음을 멈추었다.
"농담도 정도껏 해라!!!"
분노한 교주가 돌연 내게 튕기듯 달려들었다.
'시작이다.'
어차피 교주전의 비밀 공간을 찾기 위해선 교주를 죽여야 했다. 그리고 이왕 싸울 거면 도발에 흥분한 교주를 상대하는 게 나았다.
'빠르다.'
그런데 교주는 내 예상치를 뛰어넘는 속도로 내게 쇄도해 왔다. 원래 무기를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나 정도는 맨손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긴 건지 어떤 무기도 꺼내지 않은 채였다.
"산 채로 혀를 뽑아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그가 잔인한 표정을 지으며 단숨에 내 목을 틀어 쥐려 했다. 나는 왼손의 손등으로 그의 팔을 쳐내며 빠르게 뒤로 물러 섰다.
"호오? 초마권법? 초마권법 따위로 내 공격을 막다니, 제법이구나."
교주가 사뭇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성큼성큼 다가들었다.
'빠르기는 나보다 한 단계 위, 파괴력은 두 단계 위.'
나는 [배틀 센스]로 파악되는 감각으로 교주의 전력을 파악해 나갔다.
그러나 이내 전력 측정이 아직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팟! 파파팟!
공방이 계속될수록 교주의 속도와 파괴력이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가지고 놀려고 하는군.'
교주는 처음부터 자신의 전력을 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고양이가 생쥐를 가지고 놀듯, 교주는 나를 조금씩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 하고 있었다.
팟!
어깨에 상처가 만들어졌다. 중상이라 하기엔 얕지만, 충분히 살을 찢고 들어온 상처였다. 교주의 갈고리 같은 손가락에 의해 파인 상처였다.
손가락 또는 손톱으로 상대를 공격 하는 무공, 조법 (HV法)이었다.
'너무 강해.'
어느 정도 힘을 숨기고 있을 거라 감안하고 싸우고 있음에도 상처를 입었다. 교주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고, 더 큰 문제는 아직도 그가 숨겨둔 힘을 전혀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몸의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내공의 발달이 미약한 세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교주라는 녀석은 시대를 넘어선 강함을 갖고 있었다. 내가 그의 무공을 간신히라도 받아 치고 있는 것은, 장삼이 아주 간단하게나마 익힌 [초마권법] 덕분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초마권법]과 [의기활신유가선공]의 상성이 굉장히 잘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