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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신과 함께 037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37/215)

  기계신과 함께 037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나와 성녀는 멀리 본단의 성문이 보이는 위치에서 본단을 관찰했다.

  '일단 아직 다 함락되지는 않은 것 같군.'

  정파인들이 천마신교를 함락하는 즉시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떠날 것이라 공언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점은 다행이었지만 역시 본단으로 들어가는 문은 경계가 삼엄 했다.

  정파인들을 뚫고 들어가자니 성녀를 지키기가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길을 찾자니 본단으로 들어가는 다른 길이 없었다.

  전에 빠져나왔던 비밀통로는 이미 발각되었을 터였다.

  '음, 이를 어쩐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접근하는 기척을 느꼈다.

  '응? 이런.'

  내공을 얻은 후로 기감이 예민해졌 건만 꽤 가까이 올 때까지도 기척을 못 알아챘다.

  그 말은 즉 상대가 고수라는 소리.

  성녀를 업고 도망가기는 이미 틀렸다.

  "밤에 만난 새."

  상대가 갑자기 우리가 있는 곳에 대고 뜬금없는 소리를 해왔다. 밀마 (密鳴), 즉 암호였다.

  저기에 맞는 대답을 하면 같은 편이라는 증거가 된다.

  물론 대답을 알 리 없는 나는 대답 대신 재빠르게 놈을 향해 튀어나갔다. 가능하면 소리 없이 저놈을 잡고 빠져나가야 했다.

  놈이 등에 멘 검을 뽑아 휘둘렀다.

  '방심을 유도해야 해.'

  지금의 나는 내 주 무기인 총은 커녕 아무런 무기도 없는데다 아직 날붙이로부터 몸을 상하지 않을 만큼 내공을 익히지도 못했기 때문에, 검을 든 데다 내공을 익힌 저자는 결코 여유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권갑(幸抑) 같은 무기만 있었더라도 훨씬 여유로웠겠다.'

  그러나 전장에서 항상 최상의 준비를 갖추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

  가진 것만으로 최상의 결과를 도출 해야 한다.

  쉬익- 놈의 검은 빠르고, 무엇보다 기교가 대단했다.

  나는 놈의 검이 세 갈래로 갈라져 오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어제의 나라면 꼼짝없이 당했겠지만, 내공을 얻은 지금의 나는 달랐다.

  '저게 진짜다!'

  세 갈래의 검 중 내공이 실린 한 개의 검을 구분해 내, 나머지는 일부러 몸으로 맞았다. 그리고 약간 허둥대며 운으로 피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놈이 나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검을 찔러왔다.

  그때 내 움직임이 바뀌었다. 정련 되고 빠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큭!"

  놈이 갑자기 달라진 내 움직임에 당황하였다.

  나는 정권으로 놈의 명치를 노렸다.

  하지만 놈도 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뻥!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손이 튕겨 나왔다. 놈은 가까스로 왼손을 들어 내 정권을 막아낸 것이다.

  '내공이 나보다 강해.'

  내 자세가 더 안정적이었는데도 공격이 막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 기회는 저물지 않았다. 놈이 내 공격을 막아내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것이다.

  나는 눈을 번쩍이며 반대쪽 손을 놈의 명치를 향해 힘껏 뻗어내었다. 내공의 8할을 실었기 때문에 내 주먹은 엄청난 위력을 담고 있었다.

  그 순간 놈의 검이 스르르 다가와…… 스르륵- 폭풍같이 짓쳐들어가는 내 손을 부드립게 흘려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뒤로 빠졌다.

  '이 수법은……?'

  놈의 검에는 내 손에 비교하면 반 의반도 안 되는 내력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 미량의 내력으로 내 공세를 부드럽게 흘려낸 것이다.

  네 량의 힘으로 천 근의 힘을 흘려낸다는 수법,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

  이 수법,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하늘의 눈]을 발동해 그를 살펴봤다.

  확실했다.

  "한서후 씨."

  내가 엘리멘탈 골렘으로부터 구해 주었던 우리나라의 검도 유망주 각성자, 한서후였다.

  "엇?"

  상대방이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내 이름을……?"

  그의 눈에 난 동공 지진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그 또한 타인의 이름과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 현실에서의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나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나는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두 가지 역할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1.천마신교의 말단 교도 2.정파의 후기지수 던전 입장 시 나왔던 두 선택지 중, 한서후는 두 번째를 골랐을 것이다. 아니, 내가 첫 번째를 골랐으니 나보다 나중에 던전에 들어왔을 그에게는 두 번째 선택지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으음……."

  나는 이 기막힌 우연에 침음했다.

  분명한 건, 이게 내게 기회가 되리란 점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군요."

  "대체 누구시죠? 누구시기에 현실에서의 제 이름을 알고 계신 겁니까?"

  한서후 또한 잠시 검을 거두고 물어왔다.

  나는 그의 말에 순순히 대답해줬다.

  "저는 당신보다 먼저 이 던전을 들어온 각성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각성자이기도 하죠."

  "아, 던전에 각성자 여러 명이 들어올 수도 있는 거였군요? 근데 제가 알고 있는 각성자라시면……?"

  그의 동공 지진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엘리멘탈 골렘."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저기에 맞설 생각을 하냐? 검기도 못 뽑는 애송이 주제에. 네가 불사신이냐?'"

  나는 그때 그에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말했다. 기억력 하나는 좀 좋아서.

  "어엇?"

  한서후도 뭔가 생각난 듯했다.

  그에 따라 내 입가에 미소가 생겨 났다.

  "'다음부터는 상대 좀 보고 덤벼라. 너 그러다 죽었었어, 인마'."

  "아, 그때 그 각성자분!!"

  "그때는 반말해서 미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어떻게 저런 중2병스러운 대사를 쳤을까.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거릴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사실 반말로 하신 줄도 몰랐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여기 이렇게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서후가 마침내 검을 완전히 집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아니아니, 인사는 됐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부탁요?"

  "네, 갑작스럽지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때 일에 대한 보답도 못 드렸으니 제가 가능한 거라면 성심을 다해 돕겠습니다."

  과연 한서후는 듣던 대로 호인(好 人)이었다.

  입을 여는 내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 * *

  "부상자입니다! 비켜주십시오!"

  한서후가 빠르게 문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뒤를 성녀를 업고 쫓아가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한서후는 여기서 '송서욱'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정파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꽤나 알려져 있는 후기지수였다.

  한서후는 빠르게 달리며 나를 흘끗 곁눈질했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 지 확인하는 눈치였다.

  내가 성녀를 업고도 자신을 잘 따라오는 눈치이자 한서후의 눈에는 '역시' 하는 감탄이 어렸다. 딱히 내가 경공을 펼치고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성녀를 업고도 경공을 펼치는 자신을 너끈히 따라오는 모습에서 감탄한 것이다.

  반면 나는 한서후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입은 캐릭터의 힘일지도 모르지만, 한서후는 내공심법과 검술에 더해 신법까지 여러 종류의 무공을 참 밸런스 있게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임을 봐선 자기 무공 같은데, 무슨 기연이라도 얻었나?'

  그에게서는 낯선 스킬을 운용하는 자 특유의 어색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서후를 관찰하며 움직이던 도중, 누군가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거기 잠깐!"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공덕 사숙."

  한서후가 그에게가 포권했다.

  "그분들은 뉘신가?"

  그가 우리를 보며 물었다.

  "예, 사숙. 함께 정찰을 나갔다가 마교도들에게 부상당한 동료들입니다. 죄송하지만 부상이 심해서 빨리 가봐야 합니다."

  사숙이라는 사람이 혹시나 우리의 소속에 대해 물을까 봐 한서후는 우리의 부상이 심하다 둘러대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치명적인 악수가 되었다.

  "그래?"

  사숙이란 자가 나와 성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왔다.

  "제가 보기엔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 같지는 않은데. 어디에 부상을 입었는지 볼 수 있겠습니까?"

  "부, 부상을요?"

  한서후가 떠듬거렸다.

  "하, 하지만 사숙, 지금 한시가 급한……."

  "네 이놈!!"

  사숙이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사숙이 다른 분들과 얘기를 나누는데 끼어들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더냐!!"

  "……."

  한서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저벅저벅.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침내내게 손이 닿을 거리까지 왔을 때.

  저벅.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이 냄새는……."

  그가 나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말 부상이 심한가 보오. 실례했소, 빨리 가시오."

  그러더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빨리 모시고 가지 않고 뭣 하느냐!"

  무안한지 괜히 한서후를 닦달하는 그였다.

  "네? 네, 사숙!"

  한서후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다시 나와 성녀를 이끌고 자리를 벗어 났다.

  다행히 그는 멀리 서서 우리에게 포권을 취한 채로 우리를 배웅했다.

  예의 그 사숙이라는 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달렸다. 그리고 얼마 안가 나는 한서후를 멈춰 세웠다.

  "서후 씨, 잠깐 쉬었다 가죠."

  나는 등에서 일어나는 지독한 고통을 참아내며 업고 있던 성녀를 내려 놓았다.

  그러자 후욱- 혈향이 퍼져 나갔다.

  "후읍."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세상에……."

  한서후와 성녀는 피로 가득한 내 등을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한서후의 사숙이 물러난 이유는 간단했다. 짙고 생생한 혈향(血香)을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다가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유가선공]을 운용해 강제로 내 등의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유가선공]으로는 내 뼈와 살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상자 역할을 맡은 것은 성녀였지만, 내 등과 성녀가 접촉해 있는 이상, 사숙이 이 혈향이 누구의 것인 지 구분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혈향을 맡고도 끝까지 칼 맞은 부위를 보자고 할 만큼 낯짝이 두껍지 않았던 그는 결국 순순히 길을 비켜주고 말았다.

  우리 모두 한서후가 구해준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혈향에 비해 피에 물들지 않은 옷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첸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내력을 운용해 찢어진 등을 서서히 치료해 나갔다. 역시 치유 무공답게 [유가선공]은 상처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등에 낸 상처는 피만 많이 나오도록 깨끗이 찢어낸 것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아물어갔다.

  나는 대충 치료를 끝내고 일어섰다.

  "다시 업히시지요."

  "……아직 안색이 창백해요."

  성녀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더 지체한다면 들킬 확률만 높아집니다. 나머지는 대충 가면서도 치료될 테니 일단 빨리 자리를 뜨죠."

  내 말에 성녀는 한숨을 쉬면서도 업혔다.

  "……고마워요."

  이토록 무리해 가며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내게, 성녀는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해왔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실패하지 않습니다."

  나는 굳게 말했다.

  "실패 같은 건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거든요."

  실패는 저번 생에서 기계룡에게 죽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다 왔으니, 다들 힘내서 가죠."

  빈말이 아니었다.

  교주전이 저 멀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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