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35 나는 슬쩍 성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그녀의 눈길은 서찰에 고정된 채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꺼내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서찰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녀가 천마의 바람대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나에게도 좀 말해주지 않겠나?
이놈의 호기심은 저승을 가는 이때 까지 내 발목을 잡는군.
'영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보아 하니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 군요.'
보금자리가 정파인들에 의해 박살이 나 도망치고 있는 상황이니.
-마지막으로 당부 하나 하겠다.
이 의기활신유가선공은 나와 천마의 눈높이에서 작성한 거라 웬만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그래도 가급적 알아듣기 쉽게 풀어 놓았으니 그대가 이것을 익히게 된다면 부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쓰기를 바란다.
이것으로 길고 긴 서찰은 끝이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가세요. 무공은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마스터 좋은 일에요?]
'하하, 나한테 좋은 일이 세상이 좋은 일이지 않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성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에 빠진 눈으로 서찰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저…… 성녀님?"
"……."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안 괜찮아요."
그녀는 말없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서찰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자리를 피해주었다.
장삼의 기억상으로, 성녀는 항상 고고한 존재였다.
그 상징성과 신성성 때문에 항상 천마성전에 머물며 다른 어느 누구 와도 접촉하지 않고 단절된 삶을 살아온 그녀.
모두가 올려다보는 천마신교의 상징, 늙지 않는 신비의 여인.
그리고 그녀는 그만큼 외로운 존재였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으나,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게 되니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내가 알고 지내던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울고 웃고, 화낼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지금은 그녀의 삶이 별로 행복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대화 나눌 시비마저 없이 한 공간에 갇힌 채로 수십 년을 지내오는 기분이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것이 과연 천마가 그녀를 천마신교에 남겨놓은 의도였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지가 않다.
[성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슈리가 물어왔다.
'글쎄……. 자신을 여기 홀로 남겨 놓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의선의 유서에 적힌 대로 성녀가 아무런 기억이 없는 채로 낯선 자들 가운데 남겨졌다면, 그리고 고독한 생활이 오래되었다면 자신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한 그 남자를 원망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유서에 따르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인데요?]
'음…… 슈리, 인간의 감정이란 꼭 순리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야. 인간은 원망할 대상이 있다면, 냉정히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의 탓이 아니라 해도 그를 원망하고는 하지.'
[이해가 안돼요. 왜 그러는 거죠?]
'인간이 냉정하지 않기 때문이야.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랄까? 사실 천마의 의도와 다르게 성녀를 고독하게 한 사람들은 천마신교의 사람들이겠지만, 천마가 자신을 그 무리 가운데 두었다는 것만으로 성녀는 그를 원망할 가능성이 충분해. 설령 그가 목숨을 구해주었다 해도.'
[그렇군요. 납득은 잘 가지 않지만 이해했습니다.]
'물론 내가 본 성녀의 성품상 그녀가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나도 그녀의 됨됨이를 오래 살펴 본 것은 아니라서 속마음까지는 잘 모르겠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았던가.
그녀랑 친구도 아닌데 속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화를 내고 있군.'
정말 그를 원망하기라도 하는 걸까?
이윽고 서찰을 살펴보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장삼,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미안 해요. 목적지를 변경하겠어요."
설마…… 이 전개는……?
"천마께서 잠들어 있다는 이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세요."
[퀘스트 목적지가 '천마신교 교주 전의 숨겨진 방'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의선이 남긴 유서의 내용대로라면 천마는 천마신교 교주전 내에 있는 숨겨진 방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쯤 천마신교 본단은 정파인들에 의해 거의 점령되었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둘둘 포위되었을 것이다.
그들을 뚫고 다시 천마신교 본단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녀를 데려다줘야 한다?
난이도가 단숨에 세 배는 상승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미 시스템 차원에서 목적지가 변경됐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퀘스트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단, 지금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필요했다.
"정파인들이 신교를 점령하고 나면 본단 전체를 불태우려고 할 텐데요? 그럼 천마께서 잠드신 비밀의 방도 불에 탈 거예요."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현재의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수가 생긴다는 건 가요?"
"예, 그렇습니다. 이게 있잖습니까."
나는 의선이 남긴 [의기활신유가선공]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성녀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 본다.
"유서에도 쓰여 있듯이 두 천재가 만든 거예요. 평생 가도 못 익힐지도 모르는 절학(絶學)인데, 그걸 어느 세월에 익히려고요?"
나는 그 말에 씨익 웃었다.
"두고 보시면 압니다."
그리고 나는 품에서 꺼냈다.
찬란한 황금빛의 열쇠를.
최초의 던전에서 마지막 마더를 잡고 얻은 [황금고블린 상점 열쇠]였다.
나는 그것을 쥐고, 허공에 밀어 넣고, 한쪽으로 비틀었다.
철컥- 허공에서 날리가 없는, 자물쇠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나자마자 열쇠는 황금빛 파편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내 눈앞으로 공간을 열고, 황금색 고블린 한 마리가 보따리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나는 성녀를 살짝 살펴봤다.
이 모든 것을 본 성녀의 표정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허공에 대고 웬 삽질을 하고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두고 보라고 한 뒤 허공에 이상한 손짓을 하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그녀의 눈에는 황금고블린 상점 열쇠를 비롯한 황금고블린이 눈에 안 보일 테니.
언제 어디서든 황금고블린을 부를 수 있는 이 열쇠와 열쇠로 부른 황금고블린은 열쇠의 소유주에게만 보인다. 그리고 고블린이 건네준 이 카탈로그 또한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이리라.
나는 말없이 그가 건네준 카탈로그를 꺼내 목록을 살펴보았다. 전에도 한 번 와봤기 때문에 대충 카탈로그에 뭐가 있는지는 안다.
어차피 다른 건 포인트가 모자라니 눈길도 주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었다.
'여기 있군!'
-[무황성(武皇星)의 축복.]
내가 고른 것은 한 스킬이었다.
언뜻 보기엔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 갈 수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내가 두 천재가 만든 무공을 익히기 위해 가장 필요한 스킬이었다. 스킬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무황성(武皇星)의 축복]
희귀도 : 유니크 상태 : 임시 스킬 설명 : 5일 동안 무황(武후)의 오성(悟性)을 지니게 된다.
무황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무지막지한 인물이리라는 것은, 이 스킬을 써본 자들에 의해 회자되는 바였다. 왜냐하면 이 스킬을 썼을 때 무공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히 천재적인 수준으로 향상 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천재적인 오성을 지닌 채로 평생을 지냈을 이 무황이라는 인물은 과연 얼마나 강하겠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스킬이 부여해 주는 무공에 대한 재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유용성 때문에 이 스킬은 잠시밖에 사용할 수 없는 스킬임에도, 무려 1만 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했다.
나는 내 잔여 카르마 포인트를 살펴봤다.
-13, 303 내가 이제까지 스킬과 스테이터스에 투자하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며 악착같이 모은 포인트였다.
사실 이 13,000포인트 중 12, 000 포인트 정도가 최초의 던전에서 번 포인트였다.
그 이후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 약 3주간 다른 던전을 돌며 포인트를 모아봤지만, 역시 최초의 던전이 포인트 벌이에 있어 넘사벽이었다는 사실만 절감했을 뿐이었다. 이제는 유혹을 참아낸 과실을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1만 포인트를 스킬을 구매하는데 사용했다. 1만 포인트로 쓸만한 래어 스킬을 하나 살 수 있음을 감안하면 큰 투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 투자가 아깝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리라.
나는 여기에 더해 2천 포인트로 영단 하나를 구입했다. 1만 3천에 달했던 내 카르마 포인트가 순식간에 천 포인트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황금고블린이 스킬북 한 권과 작은 목함을 건네주고 나왔던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황금고블린으로부터 받은 스킬북을 곧바로 사용했다.
"습득."
황금색의 서기가 내 몸을 감싸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이 다른 관점으로 보이기 시작 했다.
성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무공의 원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내 코 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기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눈앞에 놓인 [의기활신유가선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책을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