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신과 함께 029 우리가 비밀통로를 지나 나온 곳은 총단 북문 인근이었다.
비밀통로 속에는 여러 갈림길이 있었는데, 공손혁은 내 부탁대로 천마봉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 우리를 데려왔다.
그러나 전투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인 듯 멀지 않은 곳에서 병장기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떤가, 여기가 어딘지 알겠나?"
공손혁 장로가 물어왔다.
나는 재빨리 주변 지리를 살폈다.
'아는 곳이야.'
눈에 익은 지형이었다.
"빨리 가야 하네. 이미 이 근처에도 정파 놈들이 매복해 있을 걸세. 포위망을 뚫어야 하니 성녀님, 혹시 뛰실수 있겠습니까?"
"예, 장로는 걱정하지 말고 길을 뚫어주세요. 비록 무공은 모르지만 저도 달리기는 자신 있답니다."
성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모두의 긴장이 한결 풀어졌다.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웃음만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그녀에게는 일반인에게는 없는 신비함이 있었다.
성녀라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어떤가, 길을 알겠는가?"
공손혁 장로가 내게 물어왔다.
"예예."
"그럼 여기서부터는 자네가 안내하게."
공손혁 장로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일단 장삼의 기억을 토대로 천마봉 꼭대기의 절벽으로 향하는 여러 경로가 떠올랐다. 거기에 헌터로서의 내 경험이 더해졌다.
'절벽 쪽으로 가려면 이쪽 길이 가장 빠른 길이야. 하지만 풀이 꺾인 흔적이 있어. 뭔가가 지나갔다는 소리.'
나는 그쪽 방향의 길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흙의 색이 달라. 물기를 머금었어.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었단 말. 그리고…… 족적을 보아하니 사람이야! 최소 다섯 명. 이 길은 사로(死路)다.'
그 길은 즉각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추적술과 도주술은 내가 헌터 생활을 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익힌 생존 기술 중 하나였다.
생존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이런 기술들을 익히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헌터가 되자마자 배운 기술들도 있었지만, 때로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던전에 들어가 온몸으로 터득한 것도 있었으며, 어떤 것은 던전에 같이 들어온다른 헌터에게 큰 대가를 치르고 배운 것도 있었다.
전생에서의 이런 피땀 어린 노력들이 모여 내 탄탄한 기초(基變)를 구성하고 있었다.
나는 추적술을 통해 여러 방면의 길을 검토해 봤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든 길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정파인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중 족적이 가장 깊고 사람 수가 적은 쪽을 택했다. 족적이 깊은 사람일수록 무공의 경지가 낮을 확률이 높았다.
반대로 고수일수록 몸의 무게를 발전체에 분산시키며 걸으므로 족적이 얕아진다.
'그나마 이쪽 길이 최선이다. 서쪽 붉은 돌원숭이의 영역을 경유하는 게 좋겠어.'
"장로님, 이쪽 방향으로 가야겠습니다만……."
"뭔가?"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요."
내 말에 장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처리하게."
장로가 뒤에 시립해 있던 세 호위 무사 중 두 명을 지목해서 말했다.
"옛!"
두 호위무사가 즉시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사라졌다.
"가세."
공손혁 장로는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는 듯 먼저 앞서며 발길을 재촉했다.
우리 또한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 두 구 옆에 시립해 있는 호위무사들이 보였다.
'실력이 좋군.'
정파인들의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것으로 호위무사들의 상대적인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가다 보면 간혹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길들이 보였다.
그런 길들은 웬만하면 피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호위무사들에게 처리를 부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덕분에 정파의 인물은 하나도 만나지 않고 길을 안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잘못이었던 것일까?
"자네…… 약초꾼치고는 눈썰미가 좋군?"
결국 공손혁 장로에게 내 눈썰미를 들켜버렸다.
돌아보니 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 추적술을 배운 적이 있나? 옆에서 몇 마디 보탤까 했지만 보탤 부분이 없는 선택을 했어. 자네 정말 약초꾼 맞나?"
내 추론 과정을 알아첸 모양이었다.
'좋지 않아.'
내 머릿속에서는 경종이 울렸다.
그는 그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그 가면 밑에 숨겨진의 심을 읽을 수 있었다.
무공이라고는 기초만 배우다 만 일개 약초꾼의 눈썰미가 너무도 날카로운 것이었다.
'조금 욕심냈나?'
장삼은 아는 거라고는 약초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던전을 빨리 클리어하고 싶은 마음에 장삼의 능력과는 관련 없는 추적술을 너무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 리스크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별거 아닌 잔재주입니다요. 밥 먹고 자는 거 외에는 산속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 스럽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말에 공손혁 장로가 허허 웃었다.
"허허…… 그것이야말로 산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산이 되는 경지 아닌가? 물아일체(物我─體)라……. 대단하군. 무공을 계속 배웠다면 대성했을지도 모르겠어."
공손혁 장로가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헷갈리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앞을 보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 말을 믿었다기보다 나를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철저히 피했다는 것은 내가 적어도 정파의 간자가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공손혁이 계산한 대로 생각해 준 덕에 한숨 돌렸다.
'조심해야겠어.'
역할극이란 것은 그 역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순간 여지없이 의심받는 리스크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얌전한 공주였던 사람이 갑자기 검을 집어 들고 전장에 뛰어 든다면?
당연히 주변의 모두로부터 예전의 그 공주가 맞는지 의심받을 것이다.
그런 리스크를 짊어지면서도 역할의 가면을 벗어나는 것은 던전을 들어온 각성자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빠르게 달리겠습니다. 성녀님은 지치신 듯하니 장로님께서 업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재빨리 주의를 돌렸다.
내 말에 일행이 일제히 성녀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면사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친 티가 났다.
"알았네."
공손혁 장로가 아차 하는 얼굴로 성녀를 업었다.
"성녀님,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요."
"괜찮아요. 오히려 짐이 돼서 미안 해요. 신세 좀 질게요."
공손혁 장로가 성녀를 업은 후 우리는 산속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호위무사들은 단런받은 자들답게 빨랐고, 장삼은 산을 타는데는 이미 도사였다.
장삼의 기억과 내 헌터로서의 경험이 합쳐져 나는 무인들 못지않은 속도로 산길을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내 지시에 따라 방향올 바꿔가며 산길을 달리던 어느 순간.
퓨풋!
미세한 파공음이 올림과 동시에,
"컥!"
성녀의 뒤에서 따라오던 호위무사 한 명이 등에 두 발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채챙!
공손혁 장로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추격이야! 따라잡혔네!"
그의 앞으로도 잘린 화살들이 뒹굴고 있었다.
나와 성녀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쳐낸 것으로 보였다.
삐익- 삐익-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손혁 장로가 성녀를 내려놓고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먹잇감올 향해 달려드는 호랑이의 속도가 저럴까?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컥!"
"으윽!"
공손혁 장로가 추적자들을 베어갔다.
내 머리는 긴박한 순간에도 차갑게 가라앉아 공손혁 장로와 추적자들의 무공 수준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이곳의 무력 수준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추적자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폈다.
'용천혈에 내공을 싣는 움직임이 없어.'
용천혈이란 발바닥에 위치한 혈도로, 내공의 도움을 받으면 발의 움직임이 일반적인 움직임과는 조금 달라지게 마련이다.
'검술에도 내공의 흔적이 없군.'
정파인들에게서는 내공을 쓰는 자 들에게서 드러나는 특징적인 움직임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정파인들은 내공을 안 배웠어. 내공을 가진 자들의 움직임이 아니야.'
일반인보다 단련되긴 했지만, 일반 인들 또한 단련하면 나타낼 수 있는 움직임.
딱 그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공손혁 장로를 관찰했다.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세 명의 정파인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음, 장로는…….'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이내 그의 움직임에서 내공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공을 갖고 있어. 하지만…… 미약해.'
내공을 운용하고 있는 걸로 보이긴 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속도와 힘이 그의 검술에서 엿보였다.
그러나 이 정도면 내공이 없는 것 과 크지 않은 차이.
전 세계 최고의 육상선수와 달리기 시합을 한다면 한 2초 정도의 차이로 이길 실력.
내가고수라기엔 모자란 실력이었다.
'음, 이거 점점 의심되기 시작하는데.'
공손혁 장로라면 무림에서도 제법 명성을 날리는 고수라고 내 기억이 말하고 있는데, 내공을 어정쩡하게 익힌 상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하자면, 이곳은 역시 당초 예상했던 대로 내공의 발전이 미약한 무림일 가능성이 컸다.
던전 데이터베이스에는 이 던전의 배경이 내공이 갓 태동하기 시작한 중세 무림의 초기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 품고 있던 의심 한 가지가 실체화되는 것을 느꼈다.